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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세계인의 사랑 대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한 예술가-5

예술가의 남자, 오노 요코 편

관련이슈 : 외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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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3-10 08:57:24      수정 : 2011-03-10 08:57:24

사라진 열정, 사라진 재능

이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던 존과 요코의 사랑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요코를 향해 뜨겁게 불타올랐던 존의 사랑은 5년쯤 지나면서부터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요코를 비난하는 세상에 맞서 싸웠던 존이 지쳐갔던 것이다. 사회성과 정치성을 띤 시위를 계속해 온 탓에 당국으로부터 집요하게 감시를 당하는 것 역시 존을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게 했다.

언제나 주류에 속하는 것을 거부했던 존은 세상을 비웃기 위해 시작한 ‘비틀즈’를 통해 자신이 거대한 주류가 되자 당황했다. 철저하게 비주류인 요코와의 삶에 끌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코와의 하루하루는 점차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에 가까웠고, 이것은 존의 창작욕과 감수성을 바싹 말려버렸다. 요코와 함께 하면서 주류 사회의 속성이나 습성을 통쾌하게 꼬집어내는 것에 희열도 점차 사라졌고, 창작 의욕과 영감이 사라진 이상 그녀는 더 이상 존에게 기쁨이나 위안이 되지 않았다. 존은 눈앞이 캄캄했다.

별거, 잃어버린 주말

 

존이 점점 지쳐갔던 반면 요코는 더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모든 분야에 도전했고, 자신이 흥미로워하는 모든 분야에 존이 관여해 주기를 원했다. 결국 존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육체적인 것으로 해소했다. 존과 요코의 비서로 일하던 젊은 중국계 여성 메이 팡이 그 대상이었다.

요코는 누구보다 빨리 이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존의 불륜까지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요코는 메이 팡에게 존의 요구에 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대범하게 대처했다. 존을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요코의 생각과는 달리 한 번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1973년 10월, 존과 요코는 별거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요코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 제작에 매달렸다. 존은 별거 중이었지만 요코의 예술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두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요코는 존 레논이란 부록이 없는 한 자신의 예술 활동은 대중성이나 상업성 그리고 화제성에서 타격을 입을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했다.

되찾은 주말, 아들 ‘션’의 탄생

앨범이 실패한 후 요코가 선택한 새로운 일은 바로 사업이었다. 존의 절대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도 매번 예술가로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지 못했던 요코는 마침내 자신이 혼자서도 잘해낼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저작권과 부동산 등 ‘재산 증식’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많은 수익을 올렸다. 수년에 걸쳐 줄기차게 적자를 기록해온 요코는 예술이 아닌 사업을 통해 적어도 투자에 대한 감각만큼은 존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했다.

홍보 담당이자 경쟁자인 존이 곁에 없는 동안 요코가 예술에 대한 욕심을 잠시 접고 사업에 열중해 있는 사이 존은 메이 팡과 18개월 동안의 밀월을 마치고 요코에게 돌아갔다. 존은 요코와 떨어져 지낸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표현하며 용서를 빌었고 요코는 받아들였다. 요코와 존은 평소처럼 별거 전과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세상을 향한 전투적인 공격성만큼은 다소 줄어들었다. 요코의 임신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유산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나이도 적지 않았던 요코는 존과 재결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특별히 조심했다. 아홉 달 동안 거의 아무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지냈던 요코는 1975년 10월 11일 새벽 제왕절개로 아들 션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요코는 “나는 9개월 동안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내보냈어요. 이제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당신 차례예요.”라고 말하며 존에게 아이의 육아를 일임했다. 첫 아들 줄리안을 낳았을 때도 육아에 아무 관심이 없었던 존은 요코의 결정을 행복하게 받아들였다.

요코는 계속해서 사업에 몰두했다. 사실 존은 음악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능력은 별로 없었다. 어쩌면 그런 점 때문에 요코의 예술에 그처럼 무모한 투자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예술가로써는 수익이 전무했던 요코는 사업가로써 탁월했다. 원래부터 충분했던 존의 재산은 요코의 손을 한 번씩 거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존은 결국 요코의 뜻에 따라 그녀를 자신의 공식 재산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두 사람의 동상이몽,〈Double Fantasy〉

 

1980년 6월, 존과 요코는 아들 션과 함께 팜비치로 여행을 떠났다. 온 가족과 함께 간 이 여행에서 존은 심한 풍랑을 만나 거의 죽을 뻔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존은 길고 긴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다시 살려냈다.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존은 5년간의 전업 주부 생활을 끝내고 오랜만에 다시 창작 활동에 들어갔다.

존이 의욕을 되찾자 요코도 앨범 작업에 동참했다. 예술에 대한 욕심을 접었던 요코가 갑자기 다시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자취는 확연했다. 11월 16일 발표한 새로운 앨범 〈Double Fantasy〉는 곡의 순서가 ‘존-요코-존-요코’ 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매우 평등했지만 새로운 영감으로 충만한 존의 곡들과 달리 요코의 곡 중에는 노골적으로 상업성이 엿보이는 노래도 있어 전체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대중들과 평론가들 역시 이 불편함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한〈Double Fantasy〉가 세간의 비난을 받자 섬세한 존은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양한 음악 활동을 기획했다. 다시 슬럼프로 움츠러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기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1980년 12월 8일 밤, 앨범 홍보 활동을 마치고 스튜디오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존은 한 남자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범인의 이름은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 25세의 그는 존의 열성 팬이었다.

죽음 그리고 요코에게 남긴 것

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엄청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존의 시신이 화장된 날, 요코는 공식 성명을 내고 자신의 ‘남편’인 존을 위한 묵념을 제안했다. 12월 14일 일요일, 전 세계적으로 10분간 묵념이 거행되었다. 팬들이 요코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존의 아까운 죽음은 요코의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날 밤 녹음한 요코의 〈Walking on Thin Ice〉는 성공을 거뒀다. 이 노래는 요코의 곡들 중 거의 유일하게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곡이 되었다. 존이 살아 있을 때 요코를 무조건 적대시하던 대중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요코의 작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존의 그림자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요코의 작품과 활동들은 천천히 대중들 사이로 스며들었고, 존은 세상을 떠나서도 매개자 역할을 했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2월 8일이 되자 세계 곳곳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센트럴파크를 찾았다. 이날은 존 레논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0년째 되는 날이었다.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 팬들은 함께 모여 밤을 새우며 추모 의식을 가졌다.

같은 날, 뉴욕 저팬소사이어티에서 〈예스 오노 요코〉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존 레논의 미망인인 오노 요코 단독 주연, 감독, 각본의 〈예스 오노 요코〉는 뉴욕을 시작으로 미니애폴리스, 휴스턴, 케임브리지, 토론토,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를 순회하며 열렸다. 전시회에서는 오노 요코의 전기 형식의 수필과 비평 그리고 요코의 새 음반 CD가 들어 있는 아트 북 〈예스 오노 요코〉를 볼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요코는 자신의 작품에 기여한 존의 영향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제는 일흔이 넘은 요코는 존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존 레논 재단을 운영하며 남편을 추모하는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예술가로 언론 앞에 설 때면 “존 레논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다.”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긴 하지만 존과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작품들을 포함한 예술 활동이 계속되는 한 그녀는 언제나 존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셈이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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