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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 위량은 날마다 그림 공부에 푹 빠져 지냈다. 그녀는 누드화를 연습하기 위해 공중목욕탕에서 여인들의 나신을 크로키하다 쫓겨나 목욕탕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개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어도 누드화나 누드모델에 대한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다. 위량은 결국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계속해서 작업을 해 나갔다.

누드화 그리고 조강지처와의 갈등

고된 작업 끝에 〈나녀(裸女)〉를 완성한 위량은 이 그림을 학교에서 거행하는 〈사제 간 연합 전시회〉에 출품했다.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린 위량의 파격적인 작품은 학교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판찬화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한 번도 위량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한 적이 없었지만 누드화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 전시까지 한 위량을 행동에 그는 거의 모욕감을 느꼈다.

<나녀(裸女)>를 본 판찬화는 결혼 후 처음으로 위량에게 화를 냈다. 다른 누구의 말보다 판찬화의 말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위량 또한 그의 반응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갈등을 거쳐 위량은 차츰 성숙한 시야를 지닌 예술가로 성장해 갔다.

그것보다 더 큰 위기는 따로 있었다. 위량이 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향에 있던 조강지처가 위량을 만나고 싶다고 요구한 것이다. 봉건적인 사고를 지닌 조강지처의 눈에 위량은 분명 ‘첩’이었으며 첩에 대한 권리는 정실부인에게도 있었다. 그동안 고향에서 부모님을 착실히 모시며 아이들을 키워왔던 조강지처의 요구를 거절할 핑계는 아무 것도 없었다.

위량의 유럽 유학을 뒷바라지 하다

판찬화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마치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위량이 졸업 후에 서양미술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예상치도 못한 위량의 말에 판찬화는 깜짝 놀랐지만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결심했다. 헤어져야 하는 것은 가슴이 아팠지만 위량이 조강지처와 부모님 앞에서 숨죽인 채 ‘첩’으로서 살아가는 것보다 공부를 계속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판찬화가 순순히 허락하자 위량은 곧 유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국비 유학생 시험을 준비했다. 판찬화는 그 동안 얼마나 걸릴이지 모를 위량의 유학 준비를 도왔다. 1921년, 소량의 유학 장려금을 손에 쥔 위량은 퀸 캐나다호에 올랐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긴 판찬화가 홀로 위량을 배웅했다. 다시 만날 때까지 10년 남짓한 세월이 흐를 것이라는 것 또한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기러기 남편의 안타까운 마음

프랑스에 도착한 위량은 리옹국립대학에 입학해 프랑스어를 배웠다. 얼마 뒤 리옹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한 위량은 1923년, 프랑스국립미술학원에 입학했다. 한편 위량이 유학을 떠난 후 상하이에 남아 공무원 생활을 계속하던 판찬화는 서서히 정치적인 격동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눈에 띄게 드러나면서 혁명당 출신이긴 하지만 천두슈 같은 고위 공산당 간부를 친구를 둔 판찬화의 입장이 점점 난처해진 것이었다. 이 무렵 쑨원이 세상을 떠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으로 사분오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제스(蔣介石, 1887.10.31.~1975.4.5. 그의 아내 쑹메이링은 쑨원의 아내 쑹칭링의 동생이기도 하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수립된 상하이의 혼란은 특히 극에 달해 있었다.

판찬화는 이런 상황을 조금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위량은 서양미술의 본고장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닦는 데에만 매진했다. 1925년, 프랑스국립미술학원을 졸업한 위량은 귀국 대신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로마국립미술학원에 들어가 회화뿐 아니라 조각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판찬화는 점차 요직으로부터 멀어졌다. 정치적 위기 속에서 생활은 점점 곤궁해졌지만 판찬화는 귀국을 미루고 공부를 계속하는 위량에게만큼은 어떻게든 편지며 돈을 보내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위량은 중국에서 오는 장학금과 판찬화가 보내는 돈이 줄자 가난한 생활을 해야 했다.

중국 최고 서양화가의 남편으로

1927년, 위량은 이탈리아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습작 유화 〈나녀(裸女)〉로 중국인 최초로 3등에 당선되었다. 중국에 있을 때 판찬화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마침내 학생이 아닌 정식 서양화가가 된 위량은 1928년, 9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마중을 나온 판찬화는 지난 9년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팔지 않았던 옛 집으로 위량을 데려갔다. 언제라도 자신이 돌아왔을 때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관리해 놓은 집을 보며 위량은 감동했다. 생활에 바로 안정을 찾은 위량은 곧 활동을 시작했다. 유학까지 다녀온 서양화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귀국 직후부터 위량을 찾는 곳은 많았다. 귀국하던 해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위량은 성공리에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곧바로 모교인 상하이미술전문대학의 서양화과 주임으로 부임했다.

이를 시작으로 위량은 마치 지난 9년간의 배움을 몽땅 조국의 학생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처럼 맹렬하게 활동했다. 그녀는 신화예전과 중학대학 그리고 난징의 중앙미술대학 교수도 겸임하며 후학 지도에 힘쓰는 한편 작품 활동 또한 계속해 나갔다. 이듬해인 1929년 개최된 제1회 전국 미전에 참가한 위량은 중국 서양화가 부문에서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판찬화와 처음 만났을 때에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여인이 15년 만에 어엿한 한 명의 예술가로 우뚝 선 것이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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