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일찍 부모님을 잃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쳐 외삼촌의 손에 팔려 억지로 기생이 되었던 위량은 판찬화 같은 관리와 결혼했다는 것만으로도 꿈만 같았다. 인생에 있어 늘 아무런 선택권이 없던, 너무나 많은 고난만이 계속되어온 위량에게 판찬화의 존재는 동화 속 왕자님만큼이나 눈부셨다. 결혼이라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위량은 ‘첩’이라는 위치조차 감지덕지하게 여겼다. 하지만 판찬화는 위량을 자신의 ‘아내’로 인정했고 항상 존중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새로운 생활

일단 결혼을 한 이상 판찬화는 우후현(그곳은 판찬화의 고향과도 멀지 않았다)에서 위량과 함께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을 끌 수도 있고 또 근거 없는 소문이 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에게 위량을 뇌물로 바쳤다가 한 방 크게 먹었던 상인들이 앙심을 품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판찬화는 위량을 상하이로 데려갔다. 중국 최고의 대도시 중 하나인 상하이에서는 그와 위량의 관계를 눈여겨 볼 사람도 없었고, 또 일본에서 판찬화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도 많았다. 판찬화는 중산층 지식인들이 많이 사는 위양리에 집을 구한 뒤 도움이 될 만한하고 또 친한 친구들을 불러 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위량을 소개했다. 왜냐하면 그가 우후현으로 돌아가고 나면 위량이 상하이에서 주로 혼자 지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배움의 기회를 마련해주다

판찬화는 또 위량이 제대로 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가정교사를 구해 주었다. 당시 신지식인들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아내(첩)에게 그런 기회를 마련해 주는 남자들은 매우 드물었다. 마음속으로 늘 배움을 갈망했던 위량은 가정교사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학문을 익혀 나갔다.

좋은 남편을 만나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위량은 과거의 불행을 모두 떨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시나 그림 같은 예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판찬화는 볼 때마다 실력이 늘어 있는 위량을 기특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응원했다. 바빠서 상하이에 오지 못할 때면 그는 편지를 보내 위량의 공부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확인하며 그녀에게 공부를 하는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했다. 위량은 그런 판찬화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혁명 그리고 판위량이라는 이름의 탄생

이제 막 안정된 생활을 시작한 위량과 달리 시대는 빠른 속도로 변화를 맞이해 혁명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동맹회 일원이던 판찬화는 1913년 7월, 위안스카이를 몰아내는 제2차 혁명에 참여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하여 혁명의 실패로 쑨원과 2차 혁명에 참여했던 동지들 중 대다수가 일본으로 도피하자 새로운 중국의 미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는 크게 낙담하고 말았다.

의기소침해진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위량은 자신의 성(性)인 ‘짱(張)’ 대신 그의 성인 ‘판(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기생이었을 때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던 것을 늘 미안하게 생각했던 위량은 스스로 남편의 성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훗날 화가가 된 후에도 언제나 ‘판위량’이라는 사인을 했다. 그녀에게 ‘판위량’이라는 이름은 남편 판찬화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판찬화는 계속하여 윈난의 차이어, 탕지샤오 조직의 호국군에 가담하여 최선봉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15년 제3차 혁명 후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은 상하이로 본부를 옮기고 중국국민당으로 명칭을 바꿨다. 혁명에 투신했던 판찬화도 상하이 중국국민당에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중국의 미래와 위량과의 생활을 상상하며 세관 감독이라는 안정된 지위를 미련 없이 버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대학생이 된 위량과 판찬화의 적극적인 후원

중국국민당의 본부가 들어서자 수많은 지식인들이 상하이로 몰려왔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위량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그 무렵 위량은 우연히 이웃집에 살던 상하이미술전문대학 교수 홍예 선생으로부터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위량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 홍예 선생은 그녀에게 상하이미술전문대학에 입학시험을 칠 것을 권했다.

생애 첫 입학시험을 치른 위량은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낙방의 이유는 실력 부족이 아닌 출신 때문이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살 때는 몰랐지만 ‘대학생’이 되려니 기생이었던 과거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잠재력을 알아본 상하이미술전문대학의 교수였던 류하이쑤(劉海粟. 1895~1994. 중국현대미술의 대표 작가. 중국화단에서는 ‘미전파(美專派)’ 지도자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와 천두슈(陳獨秀, 1879.~1942. 중국의 사상가, 혁명가, 정치가. 1916년 상하이에서 〈신청년〉 잡지를 발간, 문학혁명을 주창했으며 베이징대 문과대 학장을 역임했다. 1921년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중앙서기에 피선.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자 총서기직에서 축출되었다)의 적극적인 추천과 도움으로 마침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천두슈는 판찬화의 고향 친구이기도 했다.

판찬화는 뒤늦게 재능을 찾은 위량을 열심히 응원했다. 사실 위량이 선택한 서양미술은 재료비도 워낙 많이 들어가는데다가 작업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생들 대부분은 생활에 쪼들리고 애를 먹어가며 공부를 하곤 했다. 하지만 위량은 판찬화의 배려로 집 전체를 아예 작업실로 삼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학비에 대한 부담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 훨씬 여유가 있었다. 위량이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미술공부를 시작했음에도 누구보다 빨리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런 환경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