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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서얼들의 신분상승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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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2-03 18:23:14 수정 : 2009-02-03 18: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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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呼父呼兄’을 원했던 者 역사의 주역으로 서다
지난달 20일 미국의 역사에서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흑인 출신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한 것이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선언한 것만도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었는데, 146년이 지난 지금 당당히 흑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처럼 역사에서는 소외받던 신분이나 계층이 역사적 주역으로 성장해가는 사례들이 몇 차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얼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신분층이었다. 서얼들은 양반 신분 사회의 희생양이었지만 점차 차별의 굴레를 벗고 조선후기 역사의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허균이 지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표지와 본문. 허균은 1613년 박응서를 비롯한 7명의 서자들이 차별받는 현실을 바꿔보고자 역모를 꾀했던 ‘칠서지옥’에서 ‘홍길동전’의 모티프를 따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MBC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정조는 서얼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해 학문연구와 정책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케 했다.
◇박제가, 유득공 등이 규장각 검서관 시절 펴낸 ‘무예도보통지’의 내용을 한 무예연구단체가 재현 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 초당에 복원된 허균 생가. 허균은 ‘홍길동전’에서 조선시대 불합리한 적서 제도의 모순을 폭로하고 서얼들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대변했다.
#1. 서얼, 그 차별의 역사


서얼 차별의 문제가 등장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시작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성리학 이념이 조선 사회에 강하게 정착되면서 이념과 명분이 강화됐고 그 과정에서 양반과 상민, 남자와 여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심해졌다.

양반이 첩을 두는 것을 관행으로 인정하는 조선사회의 구조 속에서 서얼들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얼 차별을 되레 강화하였다. 의식이 있는 서얼들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되었다. 한 개인으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서로 간에 힘을 북돋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서얼들은 기술직 중인, 관청 서리, 지방 향리와 함께 신분적으로 중인의 한 축을 형성하였다. 홍길동은 소설 속 서얼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얼 출신으로 역사의 현장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서얼 출신으로 조선 전기에 명성을 떨친 인물은 유자광이다. 남이 장군의 역모 사실을 고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점과 1498년 무오사화의 실질 주모자로 사림파 선비들에게 큰 화를 입힌 장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유자광은 간신의 전형으로 꼽혀왔다. 그러나 그가 지닌 출중한 자질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도 불구하고 고위직에 진출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외에 ‘패관잡기’의 저자 어숙권, 초서와 문장으로 유명한 양사언, 양대박 등이 조선 전기에 이름을 떨친 서얼이었다. 조선 중기 서얼들이 조직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사건은 바로 ‘홍길동전’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1613년 일곱 명의 서얼들이 주도한 은상 살해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도 서얼들의 신분상승 운동은 계속되었다. 서얼들은 관직에 차별 없이 등용될 수 있게 해달라는 서얼허통(庶孼許通:서얼들도 관직에 등용되도록 요구한 것)의 상소문을 계속해서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2. 서얼의 아픔을 형상화한 ‘홍길동전’

비록 소설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서얼이 바로 홍길동이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서얼의 아픔이 가장 부각된 대목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설움을 표현한 아래의 대목이다.

“소인이 평생 서러운 바는 대감 정기로 당당한 남자가 되어서 부모가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가 깊거늘 그 부친을 부친이라 하지 못하옵고 그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이처럼 가족에게 호칭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서얼 차별의 현실은 가족의 범위를 떠나 사회에서 보다 큰 제약으로 다가섰다. 홍길동은 결국 이러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도적의 길로 들어선다. 홍길동이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도적이라는 점과 허균이 크게 영향을 받은 소설 ‘수호전’의 주인공이 도적인 점을 감안하면 서얼 출신 주인공을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도적으로 변신시킨 점은 그만큼 서얼의 출구가 막혔던 사회적 상황을 보여준다.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 홍길동은 부정축재로 재산을 모은 해인사나, 탐관오리가 수령으로 있는 지역 등을 집중 약탈하는 의적(義賊)이 된다. 그들 무리의 이름은 백성들을 살려준다는 뜻으로 ‘활빈당’이라 하였다. 홍길동은 고통을 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탐관오리를 통쾌하게 물리침으로써 서얼이나 민중들에게 대리만족을 가져다준 것이다. ‘홍길동전’은 작자 허균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 홍길동이 서얼로 설정된 것은 다분히 그의 삶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허균은 아버지 허엽이 판서직을 역임하고 형, 누나 모두 학문으로 명망을 떨친 명문가의 기대주였지만, 스승인 이달이 서얼이라는 점 때문에 차별을 받고, 서양갑이나 심우영 등과 같이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이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만으로 좌절하는 현실을 결코 좌시하지는 않았다.

‘홍길동전’의 구체적인 모델은 1613년(광해군 5)에 있었던 칠서지옥(七庶之獄)에서 찾을 수 있다. ‘칠서’란 ‘일곱 명의 서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칠서들이 현실개혁에 뜻을 품기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1608년에 제기한 그들의 서얼허통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있었다. 1613년 봄 서인의 영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위시하여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 박치의, 허홍인 등 7명의 서자들이 조령에서 은상을 살해하고 은 700냥을 강탈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문 도중 이들이 무인들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하자 때문에 차별받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사건이 있기 전부터 스스로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현을 칭하면서 서로 간에 교분을 형성하였고, 중앙 관리들과 교유해 자신들의 입장을 정치권에 반영하려 하였다. 허균은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관리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3. 허균, 서얼의 가능성을 발견하다

허균은 서얼의 처지에 크게 공감했으며 나아가 서얼들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 사상의 동반자임을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유재론(遺才論)’에서 서얼의 능력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한다.

“고금(古今)이 멀고 세상이 넓지만 서얼 출신이라 하여 그 현명함을 버리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하여 그 재주를 쓰지 않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고 개가(改嫁)한 자손은 모두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 나라가 양 오랑캐에 끼여 있어 모든 인재가 국가의 쓰임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할 판에 도리어 인재등용을 막고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다’고 하니, 이것이 남쪽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허균은 기본적으로 서얼의 차별이 나라에 원망하는 백성을 양산하게 하여 불안의 요인이 됨을 지적하고 있다.

“한 부인이 원한을 품는 것도 걱정스러운데 원망하는 남정과 홀어미가 나라 안에 반이 넘으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는 또한 어렵다. (…) 하늘이 낳아주는 것을 사람이 버리니 이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늘을 거스르면서 하늘에 기도하여 목숨을 영원히 한 자는 없다.”

허균은 ‘유재론’에서 서출이라 하여 능력이 있는 인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점임을 지적하고, 서얼 차별의 문제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1613년에 일어난 7명 서얼의 옥사 사건은 서얼들의 조선 정부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저항운동이었고 결국 ‘홍길동전’의 집필로 이어졌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술로 사회제도의 모순을 폭로하면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서얼들의 꿈과 희망을 대변해 주었던 것이다.

#4. 서얼들의 신분상승 운동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얼들의 신분상승 운동은 보다 적극적이었다. 국왕들 역시 서얼 문제를 피해가지 않았다. 서얼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국왕은 영조다. 영조는 어머니가 궁중의 무수리 출신으로, 서얼로서 왕이 된 전형적 인물이었다. 영조는 이러한 신분상 콤플렉스 때문인지 서얼에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1772년(영조 48)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려 서얼을 중요 관직에 등용하도록 하는가 하면,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한다는 조치를 내리는 등 적극적으로 서얼의 차별을 없애고자 했다.

영조의 서얼허통 정책은 정조대에 그 결실을 보게 된다. 1777년(정조 1) 마침내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이 반포되어 서얼들의 관직 진출은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학자 군주 정조는 특히 서얼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정조가 개혁정치의 산실로 만든 규장각에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 서얼 출신의 학자들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학문연구와 정책결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자신의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서얼들은 조선중기 이후 신분사회의 벽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것은 시대의 대세이자 역사의 흐름이었다. 보통의 양반들처럼 주요 관직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통청(通淸) 운동을 전개하고, 정조 때에 서얼의 관직 등용을 허용하는 ‘서얼허통절목’이 만들어지면서 서얼들의 노력은 일부 결실을 맺었다. 조선후기 서얼들의 이러한 노력은 1859년 대구의 달서정사에서 간행된 ‘규사(葵史)’에서도 확인된다. 해바라기를 뜻하는 ‘규(葵)’ 자를 넣어 해를 향한 해바라기처럼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변함없음을 약속한 서얼들의 전기 ‘규사’는 이제 서얼도 역사의 당당한 주인공임을 만천하에 공포한 기록이었다.

차별의 벽을 뚫고 마침내 최강국의 대통령 오바마를 배출한 미국 흑인의 성장과, 양반사회의 강고한 신분 차별의 벽을 뚫었던 조선시대 서얼의 모습에서 역사 속 소수자의 성장이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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