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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84>고대 논터 발굴된 오사카 ‘나가하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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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1-13 21:42:04 수정 : 2009-01-13 21: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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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농업문화 현해탄 건너 씨뿌리다
일본 오사카 지방의 각 지역에는 ‘구다라데라(百濟寺, 백제사) 특별 사적’과 ‘나시즈쿠리 유적지’ 등을 비롯해 200여곳에 이르는 백제 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사카 히라노의 ‘나가하라(長原) 유적’은 아득한 옛날 백제 농업 문화의 역사 터전 중 한 곳이다. 이곳은 백제에서 현해탄을 건너 새로운 개척지 나니와쓰(難波津) 나루터로 상륙했던 수많은 백제인의 뜨거운 숨결을 오늘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나가하라 유적 발굴 당시의 논 터.
필자는 지난해 11월 25일 나가하라 유적 지대를 돌면서 오사카시 문화재협회 나가하라조사사무소의 기누가와 가즈노리(絹川一德) 소장 대리의 안내로 나가하라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고고학자인 기누가와 가즈노리는 전시되어 있는 토기 유물들을 가리키며 “이 유물들은 ‘나가하라식 토기’라고 이름붙였습니다만, 이 토기들 중에서 발굴 당시(1977∼1981)에 벼의 뉘가 짓눌린 자국 등이 여러 개의 그릇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곳 나가하라 지역에서 조몬시대(BC 3C 이전)가 끝나던 마지막 무렵과 야요이시대(BC 3∼AD 3C경) 토기에서 벼의 자국이 나타난 것은 벼농사가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도래한 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발자취로 봅니다”라고 했다.

오사카성 천수각(天守閣) 관장인 사학자 마쓰오 노부히로(松尾信裕)도 “조몬시대 후기에 북 규슈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로부터 벼를 생산하는 기술이 전해왔다. 그 시기는 지금부터 3000년 전으로 보고 있다. 나가하라식 조몬 토기 등에서 벼자국이 나타났다. 개중에는 벼의 겨를 벗긴 현미가 붙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토기도 발견되었다”고 했다. 즉 한반도로부터의 벼농사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부터 일본 각지로 퍼졌다는 것은 오늘날 저명한 고대 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며, 오사카에서도 이미 그 당시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가하라 87호 고분 출토분인 흙말 하니와.
나가하라 유적에서 논갈이의 터전이 발굴된 것에 대해 오사카 문화재협회의 고고학자 이치카와 쓰쿠루(市川創) 학예원은 “한반도로부터 처음 규슈 북부에 전해온 벼농사 기술은 괭이며 써레, 돌식칼(벼이삭을 잘라내기 위한 석기) 등 논농사용 도구이며 야요이식 토기와 더불어 급속하게(일본열도 서쪽으로부터, 필자주) 동쪽으로 퍼지게 됐다.

이곳 오사카의 나가하라 유적에서도 야요이 시대 전기 말에 만들어졌다가 중기 초두에 묻혀버린 것으로 보이는 논터(홍수 때문에 논이 매몰된 터전, 필자주)가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 논의 모습은 똑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전해진 탓인지, 기내 지방(오사카, 나라, 교토 등지)에서 어느 정도 서로 공통된 요소를 보이고 있다”(‘농경사회성립’ 2008)고 지적했다.

그런데 고대 한국으로부터 벼농사가 건너오기 전까지 일본열도의 선주민들은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쓰오 노부히로는 “조몬시대에는 먹을거리를 찾아 주변의 산이며 강, 또는 가까운 바다에까지 찾아가 음식이 되는 동식물이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나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지면 주저없이 딴 곳으로 이동했다. 

◇나가하라 유적 일대의 밭과 주택.
그러던 중 벼농사가 건너와 조몬인들은 신선한 음식을 맛보았고, 볍씨를 보관했다가 이듬해 봄에 심으면 그해 가을에는 다시금 열매가 되는 소중한 식료였다. 벼농사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한 곳에서 정착 생활을 하게 되고, 집단 주거지를 옮겨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건너오기 이전의 일본열도에는 그야말로 미개한 채집 생활을 하던 선주민들의 원시적 삶만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옷감을 짜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옷 대신 짐승 가죽 따위로 몸을 가려 추위를 모면했다.

오사카 나시즈쿠리 유적에서 나무로 된 베틀 부품을 발굴함으로써 5세기 말에 고대 백제로부터 베틀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黑須亞希子 ‘나시즈쿠리 유적 발굴 보고서’ 2005). 물론 고대 백제로부터 그 이전인 5세기 초엽에 일본 왕실(백제계 오진왕 시대)로 백제 재봉사가 건너왔다는 역사 기사(‘일본서기’)도 있다.

여하간에 옷감을 직조하는 베틀 부품의 실물이 오사카 지방에서 2005년에 발굴돼 고대 백제 복식 문화가 미개한 일본땅에서 옷을 지어 입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의미가 크다. 모름지기 베틀은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한 한반도 사람들에 의해 그보다 더 일찍, 이를테면 야요이시대 이전에 벼농사와 함께 이주해온 사람들이 보급했을 것으로도 추측된다.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볍씨 자루만을 덜렁 둘러메고 오는 것이 아니다. 큰 배에 농기구와 베틀 등 각종 생활 도구, 삽과 칼, 괭이를 만들기 위한 대장간 시설 등도 모두 함께 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확히 언제 백제 벼농사가 일본으로 전해졌을까.

현재 일본고고학회 회장인 규슈대학 고고학과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교수가 16년 전에 발표한 일본 농경문화 연구론(‘朝鮮半島の道’ 1993)에 보면 고대 한반도 백제가 일본에 벼농사를 전해주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학계도 이 연구론을 평가하며 크게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연구론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 각지의 초기 논의 구조 형태와 농기구들, 주거 형태와 부락 등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상세히 규명하고 있다.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니시타니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검토해보면 그 모든 것이 한반도 남부와 직결된다.

이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하나로 정립된 문화 체계로서 이식되어 왔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벼농사 문화를 전파한 데에 백제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벼농사 문화의 담당자를 일본으로 이주시킬 필연성이 한반도 내부 사회에 있었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니시타니 교수는 벼농사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던 당시의 주거와 부락의 형태 등에 대한 논증을 다음처럼 상세하게 밝혔다. “주거 형식은 한반도 서남부인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유적의 주거 자취를 표준으로 삼아 ‘송국리형 주거 자취’로 부르게 되는데, 지금까지의 ‘이마가와(今川) 유적’(후쿠오카현 무나가타군 쓰야사키정 소재) 등이 ‘송국리형 주거 자취’와 똑같다는 것은 그동안 잘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서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가스야정의 ‘에쓰지 유적’에서도 송국리형이 검출됐다. ‘에쓰지 유적’은 처음으로 그 부락 구조가 숫자상으로 어느 정도 추측할 만큼의 주거 자취들이 발견된 것으로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니시타니 교수는 2007년 4월 7일 필자 등과 함께 가진 강연(‘국립영산강고고학박물관 건립방향과제 세미나’ 전남 영암군 시종복지회관)에서도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 문화를 전파한 것은 영산강 유역을 필두로 하는 한국의 벼농사 문화였다”며 백제 영산강 유역이 최초로 일본에 벼농사를 전파했다는 사실을 밝혀 크게 주목받은 바 있다.

부여 송국리의 벼농사와 돼지 등 축산이 일본에 전파된 것을 벳푸대학의 가가와 미쓰오(賀川光夫) 교수도 다음처럼 밝혔다. “일본의 경우 야요이 시대까지 가축이 없는 ‘결축(缺畜) 농업’이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돼지도 농업의 기원과 더불어 존재하게 되었다. 일본의 농경은 중국과 한국에 뒤지고 있었다. 송국리를 정점으로 해 널리 확산됐으며 일본에 돼지도 전파되었을 것이다”(‘日韓中を結ぶ稻の道’ 1989)라며 의미 있는 주장을 펼쳤다. 즉 백제의 벼농사와 함께 돼지도 백제로부터 일본열도에 처음으로 전파된 것을 추찰케 했다.

백제의 아직기 왕자(5C)가 암수 한 쌍의 말을 일본 왕실로 데리고 가 백제말이 종마로서 일본에 처음 퍼지게 되었다는 것은 일본 역사(‘일본서기’)에 기사가 있으며, 어쩌면 소와 닭도 백제로부터 일본으로 전파된 것은 아닌가 한다.

나가하라 유물전시관에는 흙으로 구워서 만든 말과 닭의 하니와(埴輪, 왕릉 등 고분에 나열하던 일종의 수호신 격의 동물)의 출토물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의 ‘흙말’ 하니와는 ‘나가하라 87호 고분’ 출토로 특히 유명하다. 또한 고대 한국 농업의 일본 전파 과정에서는 소도 건너갔으리라는 것을 추찰시킨다. 고대 일본에서는 소를 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소는 농업용 노동 가축으로서 큰 역할을 맡아 보호되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앞으로 소와 닭과 돼지 등 가축의 일본 도래 과정도 한일 농업 교류사상 매우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고대 일본어 농기구에 ‘가라스키’(韓鋤, からすき)란 것이 있다. 이는 고대 한국에서 전해왔다는 쟁기로서 “논밭을 경작할 때 소가 끄는 쟁기를 흔히 가리킨다”(‘廣辭林’ 1925)고 일찍이 고쿠가쿠인대학 국문과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 1872∼1967) 박사가 밝혔다. 이로 미루어 소가 끄는 쟁기와 더불어 소도 한국 도래임을 짐작케 한다.

이 밖에도 농기구의 옛 명칭에는 한국 것이라는 뜻에서 이를테면 도리께는 가라사오(韓竿, 한국장대)라 하는가 하면 대장간도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데서 고대부터 가라가누치(韓鍛冶, 한국대장간)로 불러왔다. 땅을 파는 삽을 ‘사비’라고 불렀던 것도 주목된다. 쇼사부로 교수는 일본어 삽(さひ)을 가리켜 “조선어 ‘Sap’과 동계어”라며 ‘삽’(Sap)의 영어 발음까지 굳이 표시하면서 한국어임을 단정하기도 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 senshy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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