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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⑥ 조선시대 태안반도에 물길공사 왜?

태종 때부터 세곡 안전운송 위해 운하 건설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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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02-13 09:52:16      수정 : 2008-02-13 09: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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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에 제작된 ‘태안 지도’. 태안 앞바다 안흥량은 예로부터 물살이 빠르고 파도가 높아 이곳을 지나는 배들의 침몰 사고가 잦았다. 따라서 조선시대 태안반도에서 육지까지 거리가 가장 짧은 흥인교∼굴포 운하 공사가 실제 진행되기도 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중점 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문제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다. 대운하 건설은 청계천 공사처럼 일자리를 창출하고 관광이나 미래의 자원을 확보하는 데 매우 유효한 방안이라는 찬성쪽 의견과 경제성이나 수질 및 환경 문제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미래에 거의 실익이 없을 것이라는 반대쪽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 문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큰 과제인 만큼, 당선인이 공언한 대로 국민 여론을 최대한 검토하고 경제와 환경 문제까지 고려하여 신중하게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운하 공사가 국가 과제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태안반도에서 육지 간 거리가 가장 짧은 지역인 흥인교에서 굴포까지 운하 공사가 논의되고 실제 공사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뱃길과 운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한 일본인이 용산구청에 기증한 1930년대 용산구 청암동 한강 부근 모습. 조선시대 용산에는 충주 가흥창에서 뱃길을 이용해 운송된 세곡을 보관하는 경창, 즉 풍저창이 있었다.

#1. 세금의 주요 운송로, 뱃길
◇조선시대 조운로


조선시대에는 수로 교통이 지금보다 훨씬 중요하게 인식되고 실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남한강의 뱃길은 국가의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주요 루트였고, 남해안과 서해안의 뱃길을 이용해서도 세곡을 실어 날랐다.

현재 한반도 대운하 사업의 핵심 경로인 경부운하는 남한강과 낙동강의 뱃길을 부산에서 서울까지 수로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조선시대까지도 남한강 뱃길은 세금의 주요 운송로로 큰 기능을 하였다. 남한강 뱃길은 경상도 북부와 충주, 단양, 청풍, 제천 등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운반하는 주요 통로였다. 충주 남한강변에 설치한 조창(漕倉:지방의 세곡 창고)인 가흥창은 당시 이 일대 세곡의 최고 보관처였고, 15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충주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운송된 세곡은 경창(京倉)인 한강의 용산 풍저창에 보관되었다.

한편 전라도 곡창에서 나는 세곡 대부분은 바닷길을 따라 운반되었다. 나주의 영산창, 영광의 법성포창이 주요 창고였다. 호남 지역이 곡창인 만큼 영산창에는 53척의 조운선이, 법성포창에는 39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다. 서남해안의 해로를 따라 강화도 앞바다를 거쳐 한강의 서강에 세곡이 모여들었다. 서강의 광흥창이 그 중심지로서, 지금으로 치면 서울 국세청쯤 된다. 현재의 마포구 창전동이라는 지명은 ‘창고 앞 동네’라는 뜻으로, 옛날 광흥창이 있었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준다.

#2. 태안에 운하 공사를 시도한 까닭은
◇한반도 대운하 계획도.


한반도 최대의 곡창인 호남 지역의 세곡을 서울까지 운반하는 데 있어 가장 난코스가 바로 태안 앞바다 일대였다. 태안 앞바다 안흥량(安興梁)은 물살이 빠르고 파도가 높아 때때로 세곡선이 침몰하는 위험한 장소였다. 수도 개성으로 호남의 세곡을 운반했던 고려시대부터 고민은 시작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9에 있는 ‘태안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때 인종이 안흥정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격하는 곳이 되어 있고, 또 암석의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에 종실 왕강이 건의하여, “예전에 파던 도랑이 깊이 판 곳은 10여 리나 되고, 파지 않는 곳이 불과 7리인데, 만약 다 파서 바닷물로 하여금 유통하게 한다면 매년 조운(漕運)할 때 안흥량 400여 리의 위험한 물길을 경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에 인부를 징발하여 다시 파니, 돌이 물밑에 깔려 있었고, 또 조수가 왕래하여 파는 대로 이를 메워버리므로 필경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세조 때에는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고 하여 세조가 안철손을 보내어 시험하였다. 안철손은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에게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중지되고 말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위의 기록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운하 공사에 대한 논의와 시도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지역에 돌산이 많아 굴착 공사가 어려웠고, 조수 간만의 차로 배가 항시 운하 지역을 통과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쉽게 완공을 보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이 지역의 수로가 험하여 조운선이 자주 실패를 보자, 이를 막기 위해 안파사(安波寺) 즉 ‘파도를 안정시키는 절’까지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운하 공사는 주로 태안반도에서 육지 간 거리가 가장 짧은 흥인교에서 굴포리까지 운하를 뚫는 논의들이 시도되고 직접 굴착 공사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한양에 청계천을 뚫어 현재 서울 모습의 원형을 갖추는 데 기여한 태종은 태안반도의 운하공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태종 때에는 운하 공사의 어려움을 들어 운하 지역에 제방을 쌓아 포구를 만들어, 포구에서 육로로 세곡을 운송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현종 때에도 국가의 중대 현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운하로 굴착할 지역이 육로로 30리쯤 되어 굴착 후에 남북의 물이 들어와 자연히 흙이 채워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공사에 착수하지는 못하였다.

#3. 정조, 운하 공사에 대한 대책을 묻다
◇대동법 주창자로 유명한 잠곡 김육(1580∼1658)의 초상화. 그는 대동미를 한양으로 원활하게 운반할 방안으로 태안 운하를 제안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태안반도 운하 건설은 세곡 운반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공사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세종 때의 신숙주, 효종 때의 김육과 같은 학자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운하의 효용성은 충분히 인정되었지만 돌산이라는 이 지역의 토질 여건, 조수 간만 차이의 고려, 새로운 조창의 설치 등 수반되는 난제들이 계속 제기되면서 공사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효종 시대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김육은 서산과 태안 사이에 관통하는 석맥(石脈) 때문에 운하 공사가 이루어지지 못함을 간파하였다. 김육은 대안으로 서산의 팔봉산 아래에 큰 창고를 설치하여 험한 안흥량 일대의 바닷길을 피하는 대신 육로 일부를 활용하여 세곡을 운송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이 역시 부작용이 제기되면서 폐기되었다.

조선시대의 운하 공사는 꼭 필요한 사업이었지만 당대의 기술력이나 비용·인력 조달 등의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완공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운하 공사는 전 시기에 걸쳐 조선 왕조의 계속적인 관심거리였고, 신하와 백성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면서 공사의 시행 여부를 결정한 점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정조가 태안반도 운하 건설에 관한 내용을 과거시험 문제로 낸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는 양서지방(관서, 해서)의 곡식은 장산(長山)에서 손실을 당하고 삼남 지방의 곡식은 안흥에서 손실을 당하는데, 운하를 파고 뱃길을 뚫어서 배가 다니도록 한다면 양서의 곡식이 서울에 도달될 수 있고 삼남의 곡식이 복몰당할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더러 발언은 했어도 시험해보지 않은 경우도 있고 더러는 시작을 하였다가 바로 그만두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고위 당국자의 수치요 또한 백성들이 다같이 걱정해야 될 일이 아닌가 한다. 여러 선비들은 고금(古今)의 일을 널리 알고 있을 것이니, 반드시 폐단을 바르게 고칠 계책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각각 마음껏 기술하라.”(‘다산시문집’ 제9권, 책문, ‘조운책’)
◇‘신증동국여지승람’ ‘태안군’의 굴포에 실린 태안반도 운하 기록.

위의 기록에서 태안반도 운하 문제가 조선 후기에도 국가 과제로 계속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책문을 내면서 “마음껏 기술하라, 내 친히 열람하리라”고 하였다고 한다. 역량 있는 젊은 인재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려 했던 정조의 자세는 현재에도 여전히 의미있게 다가서고 있다.

한반도 운하 문제는 단순히 공사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먼 미래에까지 우리 후손들에게 ‘축복’이 되어야지 ‘재앙’으로 남아서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본과 기술력을 감안한다면, 대운하 건설은 조선시대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연 상태를 인공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환경이나 수질 문제는 결코 우리 당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정치권에서 국민들의 합의를 제대로 이끌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운하 공사에 관한 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최고 지도자들은 실무자와 백성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했다. 역사 속에 남겨진 작은 기록들을 현재의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로 삼았으면 한다.

(다음에 계속)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shinb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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