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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43> 공양왕릉과 광중 혈토

관련이슈 이규원-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

입력 : 2007-08-31 20:01:00 수정 : 2007-08-31 2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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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마지막 비운의 왕
공양왕릉 잡초만 무성
죽어서 무덤이 몇 개인 사람이 있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은 강원도 춘천 한 자리에 봉분이 세 개며, 사육신 성삼문도 무덤이 서울 노량진, 충남 논산, 고향인 홍성 등 세 곳에 흩어져 있다. 봉분마다, 무덤마다 끔찍한 곡절과 충신의 절개가 역사적 사실로 기록돼 전해온다. 재상도, 장군도 아닌 일국의 임금 무덤이 두개인 경우가 있다. 고려의 망주(亡主) 공양왕(恭讓王·1345∼1394)은 강원 삼척과 경기 고양 두 군데에 능이 있다. 삼척에서는 강원도기념물 제71호(1995년 10월 지정), 고양에서는 국가사적 제191호로 지정돼 있다. 무슨 연고일까. 그 피 엉킨 사연은 다음과 같다.
◇조수창 교수 집에 보관 중인 광중혈토.

제31대 공민왕(재위 1351∼1374) 때부터 망조가 들기 시작한 고려는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나라에서 시집온 노국공주가 15년 만에 출산하다 산고로 죽어 버리자 공민왕은 혼미해져 버렸다. 정신병 증세를 보이며 요승 신돈에게 정사를 내맡기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녀들을 방 안에 모아 귀족집 미소년 김흥경 홍륜 한안 등과 난잡한 음행을 시켜놓고 자신은 문틈으로 엿보는가 하면, 때로는 침실로 불러들여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다. 자신의 후계가 없자 세 번째 부인 익비 한씨를 차례로 윤간케 해 임신시켜 놓고 왕손으로 조작하기 위해 이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 법. 사전 기밀누설로 오히려 이들의 칼에 맞아 최후를 맞은 것이 공민왕의 일생이다.
공민왕에게는 부인 다섯이 있었으나 모두 소생이 없었다. 오직 신돈의 몸종으로 여섯째 부인이 된 반야한테서만 아들이 생겼는데 제32대 우왕이다. 이것이 바로 신흥세력들이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창업한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움)의 명분이다. 신돈의 몸종이었으니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로 우왕과 창왕(제33대) 부자는 왕위에서 쫓겨나 결국 살해되고 억지로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재위 1389∼1392)이다. 그는 제20대 신종의 6대손으로 나이(45세)가 많은 데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 덕분에 보좌에 오른다. 새 왕조 창업이 다급한 신흥세력들이 그를 군왕으로 오래 머물게 할 리 없었다. 2년8개월 만에 ‘양위’라는 명분으로 밀어낸 뒤 강원 원주로 유배 보내 간성 삼척으로 옮기며 험한 꼴은 모조리 겪게 한다.
◇고릉 앞에 있는 백호 작국의 연화도수형 안산. 수체(水體)로 능을 향해 굽어보고 있다.

위엄으로 군림하던 제왕도 곤룡포를 벗고 나면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되는 법. 거기에다 망주와 패주의 몰골은 더욱 처참해져 차라리 민초만도 못해진다. 조선왕조 개국 2년 후 1394년 4월 17일 공양왕은 역모죄로 몰려 교살(絞殺)된 뒤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묻힌다. ‘궁촌왕릉’으로 불리며 아들 왕석, 왕우의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진다. 그 후 ‘경기 고양으로 이장했다고도 한다’는 안내문이 있으나 현재까지도 ‘궁촌왕릉’에서는 제향을 지내고 있다.
그러나 경기 고양시 원당동 속칭 왕릉골에 있는 또 하나의 공양왕릉 내력은 전혀 다르다. 개성에서 도망쳐 이곳 견달산 아래에 도착한 왕이 다락골 누각에 숨어들었을 때 돌보는 이 아무도 없었으나 인근 절의 스님이 공양(식사)을 몰래 날라주며 정성으로 보살폈다. 어느 날 왕이 보이지 않아 왕비가 아끼던 삽살개가 짖어대는 연못을 뒤져보니 둘이 나란히 빠져 죽어 있었다. 바로 위에 쌍분으로 장사 지내니 고릉(高陵)이다.
현재까지도 이곳 주변에는 ‘식사동(食寺洞)’ ‘대궐고개’ ‘언침이’ 등의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삼척 궁촌왕릉과 고양 고릉 중 어디에 공양왕 시신이 매장돼 있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지방자치단체로서는 모두가 소중한 역사유산이어서 진위를 가려 섣불리 양보할 사안도 아니다. 이 중 고양 고릉에는 조선조 고종 때 세운 ‘고려공양왕릉’이란 석비와 함께 석상, 장명등, 석인, 석호 등도 있어 왕릉 형식을 갖추고 있다. 특히 왕과 왕비의 시신을 찾아 주었다는 삽살개 석상이 봉분 앞을 지키고 있어 참배객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능 앞을 지키는 삽살개와 밥그릇 석상.

고양시 공양왕릉 취재는 필자 요청으로 동국대 사회교육원에서 풍수지리학을 강의 중인 벽계(碧啓) 조수창(曺洙昶·61) 교수와 동행했다. 벽계풍수학회 회장으로 한양대, 단국대 등에서도 강의해 온 그는 ‘광중혈토(壙中穴土)’ 제대로 찾아 묘 잘 써주기로 소문나 있다.
“이 기자는 지금까지 모두 몇 분의 풍수지사들과 전국 명당취재를 다녀 봤습니까?”
첫 대면의 첫 질문이 범상치가 않다.
“열 다섯 분입니다.”
“그럼, 그분들의 숨겨진 내공들을 모조리 꿰고 있겠네요.”
“글쎄요. 그게 쉽기야 하겠습니까. 다만 취재현장에서 독자분들이 최고 학문에 접하도록 핵심 요체만 가려 설명해 달라고 부탁은 드립니다. 벽계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잠시 말문을 트며 공양왕릉 내룡맥에 올라서더니 입수룡맥 재는 지점부터 정확히 찾자고 한다. 벽계풍수학회 정춘재(72) 이종춘(68) 김헌영(56) 김기선(41·총무) 전영식(39) 회원 모두가 허리춤의 나경을 꺼내 든다.
“아시다시피 내룡맥의 측정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굵은 뱀이 평지를 기어가다 산을 오르기 위해 머리를 치켜드는 곳, 바로 거기가 분절룡(分折龍)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양 옆보다 높아 건수(빗물)가 머물지 않고 흘러내리는 척상(脊上)이지요. 자그마한 오차가 분절로 이어지며 겹칠수록 커져 결국에는 광중혈토를 놓치고 마는 과오를 범하고 맙니다. 혈토가 안 나오면 명당이 아닙니다.”
여기서 광중혈토란 혈처를 정한 뒤 매장을 위해 광중을 팠을 때 나오는 흙을 말한다. 목화토금수의 오행에 근거한 청색 붉은색 누런색 흰색 검은색의 다섯 가지 색깔로 드러나며 주변의 흙과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장소에 따라 두세 가지 색이 비치기도 하는데 ‘매장문화의 꽃’으로 분류된다. 더욱 놀라운 건 시신을 안장할 광중 부분에만 혈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이다.
◇간산 길에 나선 벽계풍수학회 회원들. 왼쪽부터 조수창 교수와 이종춘 정춘재 김기선 김헌영 전영식씨.

벽계는 이 같은 혈토를 전국 각지에서 취토하여 현장 채록사진과 함께 200여 종을 보관하고 있다. 모두가 진귀한 흙이어서 지장수(地藏水·가는 천으로 여과시킨 물)로 걸러 먹으면 인체 활력을 증진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계축(북→동으로 22.5도) 쌍산 용에서 계룡(북→동으로 15도)으로 살짝 돌아선 입수룡맥에 계좌정향을 놓았으니 정음정양에는 부합되나 태극훈이 당판 아래 있어요. 쌍혈로 지나갈 때는 아래쪽에 자리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벽계의 지맥 보는 안목이 남다르다. 태극훈(太極暈)이란 땅 위에 감도는 상서로운 기운 같은 것을 말한다. 짚으로 엮어 만든 맷방석처럼 땅위를 감아 돌며 보일 듯 말 듯 솟아 있다. 그 태극훈의 1.5∼2m 지하에 광중혈토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 땅은 불도저로 깎아 평토를 만들어도 나중에는 튀어나옵니다. 마치 어린애의 유치가 빠지면 영구치로 새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러니까 공양왕릉은 과맥에 용사했다는 얘깁니다. 망국의 임금 묘 쓰는 데 누가 나서 신경이나 썼겠습니까.”
벽계가 가리키는 왕릉 아래 태극훈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부풀어 있다. 아쉽게도 목책을 두른 능역 내여서 누구라도 탐낼 자리는 아니다. 공양왕릉 바로 위에는 조선조 때 고위 관직을 지낸 사대부가의 묘가 말끔히 금초된 채 넓게 자리하고 있다. 사신사에 대한 물형 해석이 궁금해 물었더니 “왕릉 자리보다 이곳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귀띔한다. 명당이라는 암시다.
“백호 작국(作局)으로 연화도수(蓮花倒水·연꽃이 물을 향해 고개 숙인 산세)형입니다. 안산으로 이어진 백호 자락이 공양왕릉 앞 연못을 바라보며 숙이고 있잖아요. 이 가문의 외손 발복이 두드러졌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입수도 안 보이지만 파수도 가려져 있어요.”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으로 남는다. 지금 공양왕릉은 사초도 안 된 채 잡초만 우거져 패자의 탄식만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제34대 475년으로 고려조가 멸한 뒤 왕(王)씨들은 전(全) 옥(玉) 전(田) 용(龍)씨 등으로 변성하여 새 왕조 신흥세력들의 핍박과 살해위기를 넘기며 위태롭게 연명했다. 王자를 절묘하게 덧씌워 풍진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빠져 죽었다는 능 앞 연못에는 탁수가 고여 있다. 깊이야 알 수 없지만 갈대가 휘청이며 늦여름 폭염에 기죽은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정치를 하며 무고한 인명을 왜 그렇게 살상했을까 하는 속절없는 생각이 스쳐간다.
왕릉을 내려오며 벽계한테 물었다.
“공양왕릉 광중에도 혈토가 있겠습니까?”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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