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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겁탈당한 몽골 출신 고려왕비는?

입력 : 2007-06-29 14:11:00 수정 : 2007-06-29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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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이한수 지음/김영사/9900원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이한수 지음/김영사/9900원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의 딸들이 완성한 고려 말 파란의 역사!
세계제국 몽골을 씨줄로, 고려를 날줄로 엮은 새로운 동아시아의 역사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100여 년간 고려의 왕은 몽골여인들과 혼인했다. 이들은 황실을 배경으로 왕을 뛰어 넘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위에 오른 아들을 대신해 나라를 지배했다. 세계를 정복한 몽골이 유독 고려에만 공주들을 시집보낸 것은 항몽전쟁에서 보여준 고려인의 투지와 저력 때문이었다.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이한수 지음, 김영사 펴냄)은 이들의 인생을 통해 세계제극 원과 고려의 역학관계, 그 당시 격동의 역사를 한눈에 읽는다.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 통해 읽는 여몽관계사

고려 제25대 임금 충렬왕부터 제31대 임금 공민왕까지 약 100년간 고려의 왕들은 모두 몽골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충선왕은 두 명, 충숙왕은 세 명의 몽골여인과 혼인했다. 고려 국왕이 몽골 여인과 혼인하고 몽골 여인이 낳은 아들이 고려 국왕이 된 현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심각한 주권 훼손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으며 정치적 독립성을 거의 상실했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교체되기 일쑤였다. 충렬왕과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은 모두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했다. 그러나 무신정권 하에서 꼭두각시로 지냈던 백 년간을 생각하면, 몽골치하의 왕정복고가 왕실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은 황제의 권력을 배경으로 남편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이 된 아들을 대신해 섭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정략결혼으로 만리타향에 시집온 서글픈 여인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외롭게 삶을 마감했으며, 게다가 유일하게 금슬이 좋았던 보탑실련공주(노국공주)는 이후 왕과 국가의 운명을 어느 고려왕비보다 치명적으로 뒤흔들어 놓았으니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은 이후 역사 속에서 까맣게 잊혀졌다. 몽골의 지배 아래 나라가 좌지우지되었던 시대를 잊고 싶어하는 집단심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몽골에 저항한 고려의 항쟁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당시 고려를 지배한 몽골여인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들을 통해 세계제국 원과 고려의 관계를 읽으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얼굴을 한 역사가 드러난다. 이것이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들의 이름을 지금 하나하나 다시 부르는 이유다.
▲팔인팔색 몽골공주들의 다양한 면모-황제의 딸 고려에 왕림하시다, 충렬왕비 홀도로게리미실
세계제국 원 황제의 핏줄이 변방의 소국 고려에 시집왔다. 이는 원이 고려를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아내로서의 질투냐, 황녀로서의 권위냐? 홀도로게리미실은 갈등했다. 그녀는 충렬왕에게 최고의 권력과 함께 소국의 왕이라는 거대한 콤플렉스를 선사했다.
충렬왕은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마다 공주와 함께 갔는데 이는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1277년 1월 봉은사에서 열린 관등행사에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행차했을 때였다. 여러 신하들의 도착이 늦어지자 충렬왕은 화를 내며 관리들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충렬왕은 승지를 몰래 보내 신하들에게 말했다. “공주가 과인에게 일찍 가자고 하였는데 경들이 늦게 왔으니 공주가 과인을 질책할까 두려워 잠시 관리들을 가두었다. 경들은 과인을 조급하다고 하지 말라.”
또 7월 천효사라는 절에 행차했을 때다. 충렬왕은 먼저 가서 홀도로게리미실을 기다렸다. 그러나 공주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의 숫자가 적다고 화를 내면서 궁궐로 그냥 돌아가 버렸다. 충렬왕이 할 수 없이 궁궐로 돌아오자 공주는 지팡이로 충렬왕을 마구 때렸다. 충렬왕은 왕관을 벗어 던지면서 공주의 시종 홀라태를 쫓아가며 꾸짖는 시늉을 했다. “이는 모두 너희들의 소행이다. 너희들을 반드시 죄 주겠다.”
▲바람난 남편 탓에 바람 잘 날 없다! 충선왕비 보탑실련과 평범한 몽골여인, 야속진
1298년 8월 충선왕은 보탑실련공주와 함께 원나라로 들어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는다. 충선왕이 사신 발로올을 따라 원나라로 가기 직전 충렬왕이 주재하는 전별연이 열렸을 때였다. 흥겨운 잔치 자리에서 사신은 충선왕이 가지고 있는 국왕의 인신(印信)을 빼앗았다. 그리고 충렬왕에게 그것을 다시 돌려주었다.
황제는 충선왕의 독단적인 정치를 폐위 이유로 밝혔다. 관제를 개혁하고 정방을 폐지한 충선왕의 개혁정책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당시 충선왕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는데 “나이가 장년에 이르지 못해 경험이 적은 까닭”이라는 폐위 이유도 설득력이 없었다. 충선왕이 폐위된 직접적인 이유는 사실 보탑실련공주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략을 발휘해 원나라의 새 황제를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는 다시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보탑실련은 낯선 이국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야속진은 고려왕비가 된 몽골여인 중 유일하게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의 출신 배경은 몽골여인이란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그녀는 높은 신분 출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에 머물 때 그녀를 만났거나 충선왕의 처소에서 그를 시종하던 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야속진의 존재는 충선왕과 보탑실련공주가 결혼할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신분이 높지 않은 여인이었음을 반증한다.
▲고려판 매 맞는 아내! 충숙왕비 역련진팔라와 의문의 죽음, 금동공주
충숙왕과 역련진팔라의 부부관계가 좋지 못하다는 소식은 원나라까지 알려졌다. 1318년 12월 충숙왕의 장인 영왕은 부인 편비를 고려에 보낸다. 편비는 충숙왕과 공주에게 연회를 베풀며 석 달간 머무른 뒤 돌아갔다. 그런데 편비가 돌아가고 다섯 달 후 역련진팔라가 갑자기 사망한다. 이듬해 충숙왕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덕비의 처소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영왕은 사람을 보내 조문하였고, 황태후도 내사(內使) 어신불화를 보내 공주의 죽음을 조문했다. 하지만 이들의 조문은 단순히 공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주가 죽은 까닭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종 시데발라는 즉위 원년인 1321년 1월 충숙왕에게 원나라에 입조할 것을 명령했다. 충숙왕이 입조한 뒤 원나라 중서성은 선사(宣使) 이상지를 고려에 보내 역련진팔라가 죽은 까닭에 대해 집중 수사를 벌였다. 그는 공주의 궁녀와 요리사 한만복을 체포하고 공주가 죽은 이유를 캐물었다. 한만복은 역련진팔라가 충숙왕에게 맞아 죽었다고 진술했다.
금동공주는 1325년 5월 충숙왕과 함께 고려에 도착했고 석 달 후 현재의 서울인 한양의 용산에 충숙왕과 함께 거둥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왕자는 태어난 곳을 따라 '용산원자(龍山元子)'로 불린다. 그러나 금동공주는 용산원자를 낳은 후 두 달 만에 용산의 행궁에서 사망했다. 열여덟 살 안타까운 청춘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음을 주장하는 익명서가 나붙었다.
“선사(禪師) 조륜과 사부(師傅) 왕삼석이 왕을 유인하여 낮고 습기가 찬 용산 바닷가 땅에 머물게 하였기 때문에 공주가 전막 속에서 아이를 낳고 병을 얻어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만약 이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두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익명서에 나온 조륜과 왕삼석은 모두 충숙왕이 총애하는 인물들이었다. 금동공주의 죽음에 이들이 책임이 있다는 말은 결국 충숙왕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사실 출산이 가까이 다가온 금동공주를 데리고 멀리 한양까지 가서 아이를 낳게 한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었다.
▲아들에게 겁탈당한 어머니? 충숙왕비 백안홀도
충혜왕은 백안홀도를 초청해 여러 차례 잔치를 열었다. 공주가 그 답례로 충혜왕에게 연회를 베푼 자리였다. 충혜왕은 잔치가 끝났는데도 술이 취한 체하며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공주의 침실로 들어갔다. 공주가 깜짝 놀라 일어나자 충혜왕은 송명리 등 몇 사람을 시켜 공주를 꼼짝 못하도록 붙잡게 한 뒤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겁탈했다. 백안홀도는 충숙왕의 부인으로 충혜왕에게는 어머니 격인 여자였지만 충혜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석 달 후 원나라 사신이 도착했다. 충혜왕은 선의문 밖에 나아가 이들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충혜왕을 거들떠보지 않은 채 먼저 백안홀도의 궁으로 갔다. 그들은 공주에게 황제가 내리는 술을 올렸다. 그리고 충혜왕의 궁전으로 가서 국새를 빼앗아 공주에게 넘겨주었다. 백안홀도가 임시 국왕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백안홀도는 김지겸에게 정동행성의 사무를 맡게 하고 김자를 제조도첨의사사로 임명해 정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고려 개혁의 좌절은 네 탓이다! 충혜왕비 역련진반
역련진반은 충혜왕이 유배길에서 죽고 어린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하자 고려를 섭정한다. 그녀의 외아들인 고려 제29대 임금 충목왕은 즉위 당시 여덟 살이었다. 그녀는 국왕과 함께 원나라 사신을 맞이했고 직접 인사를 관장했다. 충목왕이 병치레를 할 때 그녀는 밀직부사 안목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신하들은 모든 정무를 그 집으로 가지고 가서 그녀에게 결재를 받았다. 역련진반은 충정왕대까지 자신이 군주의 자리인 남면(南面)에 위치하고 국왕이 동면(東面)을 할 만큼 최고 정책결정권자로서 권력을 틀어쥐었다. 당시 사신(史臣)은 고려의 정치개혁이 좌절된 이유를 역련진반에게서 찾고 있다.
“덕령공주(역련진반)는 젊은 몸으로 궁중에 있었는데 강윤충과 배전이 드나들면서 공주의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였다. 왕후와 김영돈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옛 폐정을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강윤충 등의 모함에 빠져버리니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왕에겐 달콤한 사랑, 고려엔 쓰디쓴 독약! 공민왕비 보탑실리
정략결혼이었지만, 보탑실리와 공민왕 두 사람은 곧 깊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할 때부터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했던 것 같다. 1365년 2월 보탑실리공주가 아이를 낳다 사망하자 공민왕은 잠시도 공주의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슬프게 울었다. 최영이 다른 궁전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청하자 공민왕은 “나는 공주와 그렇게 약속하지 않았다”면서 “다른 곳으로 멀리 피해 내 한 몸만 편하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공민왕의 첫사랑이었으며, 공민왕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잊지 못했다.
공민왕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냉혹한 사람이었다. 공민왕의 냉혹한 성격은 강화도에 유폐된 조카 충정왕을 즉위 후 불과 석 달 만에 독살한 데서 잘 나타난다. 공민왕은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민심조차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나칠 만큼 신중하며 잔인할 만큼 냉혹한 권력자일수록 위안을 받을 곳이 더욱 필요한 법이다. 보탑실리공주의 사랑은 공민왕에게 위로와 안락을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자신을 철석같이 믿으며 따뜻한 사랑을 주던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자 공민왕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이는 곧 고려의 몰락을 의미했다.
▲몽골공주들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함께 펼쳐지는 색다른 고려의 풍경!
몽골 지배기는 잊고 싶은 수치스런 시대로 서술되거나, 삼별초 항쟁이라는 민족 자존적 모습만 강조되기 십상이다. 그 때문인지 몽골과 원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전이나 이후의 몽골과는 완전히 위상이 달랐던 ‘원’이라는 국가가 그냥 ‘몽골’이라 칭해지기도 하고, 심지어 ‘몽고’라는 잘못된 이름도 끈질기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든 대원제국의 역사적 진면모를 놓치게 되며, 원과 고려의 관계조차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1206년 몽골지역 유목민들을 통합하고 즉위한 칭기즈칸 이후, 3대 안에 모스크바를 포함한 동유럽 지역부터 티베트와 중국을 포괄하는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이 탄생한다. 조그만 동방의 나라 고려는 이러한 대원제국에 가장 오래 끈질기게 맞선 나라였으며, 마침내 원에서 무력정벌을 포기하고 황녀를 시집보내 회유정책을 펼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고려 무신정권의 ‘결사항전’은 본디 애국의 의지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동기가 더 강했고, 강화천도는 사실상 백성들의 생명을 포기한 행위였다.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도피한 동안 본토는 초토화되었고 남은 백성들은 살육당했다.
“몽고병사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20만6800여 명이요,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나가는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는 ‘고려사’ 고종 41년(1254)의 기록은 전쟁의 참혹함을 잘 보여준다. 어이없게도 몽골사신이 “하루에 죽는 백성들이 수천 수만이 되는데 왕은 일신만을 아껴 만민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가”라며 고려정부를 비난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때문에 백성들은 고려국왕이 황제의 사위가 되었을 때 “백 년 난리 후에 다시 태평 시절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환영했다. 이후 고려는 대원제국의 ‘사위 나라’라는 우산 아래서 거의 100년간 큰 전쟁을 겪지 않았으며, 원의 세력이 약해진 공민왕대에 이르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치명적 손실을 입어야 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제국의 문명을 전면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였다. 충선왕은 원 수도에 만권당이라는 개인 연구소를 설립하고 세계 최고수준의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역옹패설’ ‘제왕운기’의 저자 이제현은 이곳에서 세계적인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일급 학자로 거듭났다. 최해, 이곡, 이색 등 뛰어난 고려인들은 원나라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원나라 관리로 근무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의 이념적 바탕이 된 성리학이 도입된 것도 이때였다. 이렇듯 역사에서 암흑시대는 때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남편의 정략적 협약으로 결정된 그들의 기구한 운명!
‘팍스 몽골리카’ 아래서 고려는 평화를 누렸으나, 그것이 국가로서 고려의 발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에든 원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왕의 지위는 언제나 위태로웠고, 언제 폐위될지 모르는 허약한 왕 아래 국가 전체가 불안정했다. 체제가 불안정한 시대에는 개인의 욕망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리고 국가 구성원들의 엇갈리는 욕망들 속에서 역사는 더욱 복잡해지게 마련이다.
왕실의 보전을 위해 원의 후계자를 직접 찾아가 항복한 원종 이래, 고려의 왕들은 왕이라는 지위를 지키려 혹은 뺏으려 아버지나 아들과 치사한 쟁탈전을 벌였으며 그 지위를 얻고 나면 자신의 안온과 쾌락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개선 후 사흘간 거리에서 죽을 끓여 굶주린 자에게 먹이도록 했던 충선왕의 조치 자체는 칭송할 만하나, 당시 아버지 충렬왕과 벌이던 신경전을 고려해보건대 그 의도는 순수한 백성에 대한 염려라기보다는 과시적인 이벤트에 가까웠다. 신하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왕과 고려의 사직을 기꺼이 대국 앞에 내놓으려 했다. 충숙왕 대신 심왕 고를 지지하던 유청신과 오잠은 고려에 성을 세우고 원의 한 식민지로 만들기를 청하면서까지 심왕을 옹립하고 자신들의 이득을 좇았다. 그러나 원의 신하들은 그들을 “왕에게 죄를 얻고는 독심을 품고 드디어 제 본국을 뒤엎기를 꾀하여 스스로 편안하기를 기도했으며 본심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충성을 바치려는 것이 아니니 올빼미나 개와 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라 했으니 그리 부정확한 판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고려라는 국가든 몽골의 한 성이든 전란이 없고 먹고살 만하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애국심을 논하기에 그들의 삶은 너무 고단했다.
일일이 원의 제약을 받는 정치에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던 고려왕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이 주색잡기와 개인적 욕망만을 우선시한 그들의 삶을 온전히 변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남편 충렬왕보다도 더욱 나랏일을 근심했던 홀도로게리미실공주나, 남편 충선왕의 난행에 평생 속앓이했던 보탑실련공주의 삶은 ‘몽골 출신 왕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가려지고 말았다. 정략결혼이 본디 왕실사람들의 운명이라지만, 고려에서(혹은 몽골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로 진행되었던 고려왕자와 몽골제후들-남편과 아버지 간의 협약에서 평생의 운명이 결정된 몽골공주들의 삶은 역사에서 가려졌으나 그들의 남편보다 더욱 기구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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