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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37>교토시 기타노텐만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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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5-09 11:57:00 수정 : 2007-05-09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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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후손 ''스가와라노'' 모셔
일본인들 天神·학문神으로 숭상
일본 교토시의 북쪽 기타노(北野)에 있는 ‘기타노텐만궁’(北野天滿宮)이라는 큰 규모의 사당. 이 사당의 신주인 제신(祭神)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管原道眞, 845∼903)다. 그는 자신의 사후 세워진 이 사당에서 천신(天神)으로 숭상받은 일본 역사의 대인물로, 일본 선주민이 아닌 신라인의 후손이다.


기타노텐만궁의 주소는 교토시 가미교(上京)구 바쿠로초. 교토역에서 기타노텐만궁행 시내버스(101번)를 타면 된다.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누구를 제사 지내는 곳인지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필자도 20여년 전까지는 9세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일본 선주민 계열의 인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이 분이 신라인의 핏줄을 이은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일본 고대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815년 일본왕실 편찬)을 연구한 후부터다. ‘신찬성씨록’은 백제인 간무왕(781∼806 재위)의 지시로 그의 제5왕자 만다친왕(萬多親王, 788∼830)이 후지와라노 소논도(藤原園人, 756∼818) 등과 함께 왕실에서 편찬했다. 편찬작업이 완료된 것은 간무왕 사후의 일이다.
이 족보의 내용을 종합하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천손(天孫) 하지숙니의 후손, 즉 신라에서 건너온 천일창 왕자인 아마노히보코노미코토의 후손이다. 고닌왕 원년(781년)에 왕이 하지(土師) 성씨를 스가와라(菅原)로 바꾸도록 했다.”(‘신찬성씨록’ 右京神別下와 右京諸蕃下 및 山城國諸蕃 편 등)
일본 고대신도 연구의 권위자인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도 “하지씨 가문의 조상은 이즈모신(出雲臣, 왜왕실의 신라인)이고, 히라노신(平野神, 히라노신사에 모신 신주인 백제 제26대 성왕) 계열과는 관련이 없다”(‘귀화인과 사사’ 1974)고 밝혔다. 게이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도 “이즈모 민족(出雲 民族)은 한민족, 특히 신라인이다”(‘古代の出雲’ 1974)고 단언하면서, “이즈모 지방 사람들의 A형 혈액형과 경상도(신라인) A형 혈액형의 분포율은 거의 똑같은 수치다. 이는 이즈모인과 신라인의 혼혈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계속 행해졌기 때문이다”고 논술했다. 이즈모 지방은 일본땅 시마네현 지역이다. 즉 이 지역에 근거를 둔 이즈모족은 신라로부터 동해바다를 건너 온 신라인들에게서 연원이 찾아진다는 것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초상화

‘일본서기’(720)에 따르면 일본의 개국신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신라신이라고 하는 것이 다음처럼 드러난다. “소잔오존(素盞鳴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은 하늘나라에서 아들신 ‘이타케루신’을 이끌고 신라국으로 강림해, 그곳의 ‘소의머리’(牛頭)라는 곳에서 살았다(素盞鳴尊, 師其子五十猛神, 降到於新羅國, 居會尸茂梨之處).”
소잔오존이 신라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도쿄대 사학과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가 자신의 명저 ‘일본고대사’(1907)에서 밝힌 것을 비롯해 에도시대(1603∼1867)의 저명한 역사학자 도테이칸(藤貞幹, 1732∼1797)도 ‘충구발’에서 지적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군국주의를 전개하면서 ‘황국신도(皇國神道) 사상’의 정점에 올린 여신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미카미)도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손위 누이다. 천조대신 역시 신라신이라는 사료여서, 일본 개국신화의 주축이 신라신들로 이뤄져 있음을 실감케 한다.
947년부터 천신(天神)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신주가 모셔지게 된 기타노텐만궁은 일본인들에게 명소 중의 명소다. 기타노텐만궁에는 신라신 소잔오존의 ‘황소의 신상(神像)’이 길목마다 보일 정도로 많다. 일본 신도(神道)에서 ‘소의 머리’인 우두(牛頭)는 신라신 소잔오존의 존칭이다. 리츠메이칸대 사학과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수는 소잔오존이 하늘나라(高天原)에서 한국의 우두산(牛頭山)으로 내려왔다며, 이런 연유로 교토 야사카신사의 “기온마쓰리 제사에서 66개의 창날(호코)을 세워 병마를 퇴치하는 ‘우두천왕’(牛頭天王)으로 (소잔오존을) 모시게 됐다”고 지적했다.(‘京都’ 1963) 66개의 창날은 일본 전국 모든 지역 66개소를 일컫는다. 그때부터 신라신 소잔오존은 일본 각지의 신사에서 ‘우두천왕’으로도 제사모시게 됐다. 우두산을 일본 도쿄대 사학과 구메쿠니 다케 교수 등은 “강원도 춘천의 우두산이다”(‘일본고대사’ 1907)고 주장했는가 하면, 근년에 쓰쿠바대 사학과 마부치 가즈오(馬淵和夫) 교수는 “경북 고령이 그 본터전이다”(1999.6.28, 경북 고령 가야대학 학술강연)고 강조했다. 우두산이 한국 고대의 어느 지역이었든 간에 “우두천왕 소잔오존은 신라신”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다.
◇기타노텐만궁의 ‘황소의 신상’. 우두천왕의 상징인 황소 신상의 뿔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누구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일본의 으뜸가는 ‘학문의 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는 헤이안 시대(794∼1192)의 문장박사요 대정치가였다. 894년 일본 우다왕(887∼897 재위)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에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시오”라고 칙명을 내렸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습니다. 뱃길의 파도가 위험하오니 이제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일을 폐지하시기 바랍니다.”
“잘 알겠소. 당나라의 뱃길이 위험하다면 경이 이제부터 견당사 제도는 폐지하도록 하시오.”(‘속일본후기’ 왕실 편찬 869년)
그 당시 견당사들을 태운 일본배들이 당나라에 다니다가 난파한 사건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내용은 일본 역사책(‘속일본후기’)에 여러 대목이 실려 있다. 그러나 누구도 당시까지 칙지를 받들지 않은 신하는 없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견당사 제도 자체를 폐지시킬 만큼 조정에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일화 때문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그는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으며 탁월한 정치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스가와라노 고레요시’(812∼880)도 뛰어난 시인, 문장박사며 조정의 고관이었다. 어머니는 백제인 계열의 고관 오토모씨 가문의 딸이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11살 때부터 시를 읊었고, 17세 때에 과거(문장생시)에 급제했으며, 22세 때는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후 29세 때에 문장박사가 되었다. 그는 조정의 고관으로서 지방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관찬 역사책(‘삼대실록’) 편찬 등에도 참여했다. 895년에는 민부경(民部卿)이라는 내무장관직에 올랐다. 899년에는 마침내 우대신(右大臣)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출세가도를 달렸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899년에 좌대신이 된 인물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 871∼909)와 대립하게 됐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보다 26세나 연하인 최고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는 급기야 우대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901년의 일이었다. 우다왕이 897년에 제1왕자인 다이고왕(885∼930 재위)에게 권좌를 양위하고, 상황(上皇)이 돼 섭정하고 있을 때였다.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좌대신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우대신이 은혜를 입은 우다 상황을 폐립시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고 모함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우대신을 한직으로 좌천시킨 동시에 그의 가족 모두 왕도 교토 땅에서 추방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좌천된 터전에서 실의에 빠진 채, 2년 만인 903년에 병사했다. 그의 나이 아직 59세였다.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좌대신도 909년에 병사했다. 나이 38세의 요절이어서 사람들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원혼의 앙갚음이라고 수근댔다.
◇기타노텐만궁 입구(왼쪽사진)
◇학문신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추모하는 ‘덴만쇼’(붓글씨)대회 안내판.

해마다 기타노텐만궁 경내에 매화꽃이 활짝 핀 2월25일에 ‘기타노 매화제’(北野梅花祭)를 거행한다. 학문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제사도 겸한 축제다. 학문신에게는 쌀(현미) 2말4되를 쪄서 제수로 제단에 바친다. 이것을 ‘신찬’(神饌)이라고 하는데, 찐쌀을 ‘고다테’(紙立)라고 부르는 자그만 매화꽃 장식의 종이봉투마다 넣어 제사드린 뒤 참배자들에게 축복을 누리도록 나누어준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때 기타노텐만궁으로 몰려들어 학문신에게 상급학교 입학시험
에 합격하게 도와달라고 빈다. 청소년들은 ‘나무패(에마)’에 직접 붓글씨를 써서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합격을 기원한다. 붓글씨를 쓰는 장소에는 대형 책상과 붓, 먹물이 갖춰진 천막이 쳐있다. ‘에마소’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청소년과 그 광경을 지켜보는 학부모로 붐빈다. 에마는 학문신 신주가 모셔진 ‘어본전’에 봉납된다. 일본의 하늘신이자 유일한 학문신이 된 학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신라인의 핏줄을 이어 온 사실을 일본 학자들은 아직 한 번도 논한 일이 없다. 그가 쓴 뛰어난 시작품은 ‘관가문초(管家文草)’ ‘관가후집(管家後集)’ 등으로 전해진다. (다음주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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