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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② 흥선대원군 이하응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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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9-08 16:28:00 수정 : 2006-09-08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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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이나 이장했는데… 용맥이 지나가는 과협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년). 그를 모르는 한국인도 있을까. 그의 묘는 어디에 있으며 얼마나 크고 화려할까. 역사적 인물이니 천하길지의 대명당 터에 편안히 잘 모셔져 있겠지….
희대의 풍운아. 걸인보다 못한 능멸과 수모를 참아내며 아들을 임금 자리에 등극시킨 후 삼천리강산을 손 안에 쥐고 호령했는가 하면, 권력싸움의 진흙탕에서 참패하여 필부필부(匹夫匹婦)만도 못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가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그의 묘는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록에 있다. 으리으리하게 웅엄단장해 놓기는커녕 어느 양반가 벼슬아치의 무덤만도 못하다. 뜻밖이다. 한 나라의 황제 아버지 묘가 이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심사가 어지럽다.
“이곳은 묘자리가 아닙니다. 자, 다함께 잘 살펴봅시다. 용맥(龍脈)이 지나가는 과협(過峽)이잖습니까. 과맥(過脈)에 묘를 쓰면 후손들이 감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어찌 두 번씩이나 천장(遷葬)을 하였으면서 이런 자리에 모시는가.”
윤갑원 교수(70·동서울대 부동산학과 외래교수·풍수지리학)의 판정은 언제나 명쾌하다. 산과 물이 어우러진 국세(局勢)를 정밀 탐색하고 묘가 모셔져 있는 방향을 살피는 이번 간산(看山) 길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연구학회 회원들이 동행했다.
용맥이란 산등성이에 척추처럼 분명히 솟아 꿈틀대고 내려오는 기(氣)의 흐름이요, 과협은 그 맥이 솟구쳤다가 가라앉아 달아나는 형국이니 그런 과맥에서는 혈(穴)이 뭉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곳에 용사(用事·묘를 쓰는 일)를 하고 어찌 후손 도리를 다했다고 하겠느냐는 설명이다.
흥선대원군의 묘는 서울에서 멀지 않다. 경춘국도 춘천 방향으로 가다가 화도읍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이정표를 따라 가면 ‘흥원(興園)’이란 안내 표석을 만나게 된다.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돼 있다. 한북정맥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곳곳의 별미식당들이 솔밭 속에 감춰져 있다.
“묘좌유향(卯坐酉向)이면 정서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묘 뒤의 후룡지맥(後龍支脈)이 요도(橈道)맥의 팔자형으로 내려와 명당 자리로 착각하여 용사한 것입니다. 요도지맥은 배의 노를 젓는 형상으로 명당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흐르는 맥이지 기혈(氣穴)이 뭉치는 곳은 아닙니다.”
묘 뒤의 산세는 계축용입수(癸丑龍入首·북쪽에서 동쪽으로 30도 치우친 방향에서 용맥이 들어오는 형세)인데, 묘 앞의 안산(案山)을 비켜 쓴 것이 너무 아쉽다는 것이다. 안산이란 묘 앞에 살포시 자리하고 앉아 살풍을 막아 주며 손님 역할을 한다 하여 객산(客山)이라고도 부른다. 이를테면 서울 경복궁 건너의 남산을 떠올리면 된다. 용맥의 흐름을 잡을 때는 물의 흐름을 잘 살피고 앞의 전망이 흩어지면 안 된다고 꼼꼼히 설명한다.


◇(왼쪽부터)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의 남연군 묘. 흥선대원군은 아버지를 이 자리에 모시고 고종이 등극하면서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종식시켰다. 누가 보아도 천하제일의 대명당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왕조의 왕기를 단절시키고자 후룡맥을 일부러 파헤쳐 끊어 놓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모습, 흥선대원군 묘의 표석.


조선 제23대 순조 임금이 등극(1800년)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에 몸부림을 쳤던 이하응이다. 영특하고 쓸 만한 왕손은 어떤 구실이나 트집을 잡아서라도 도륙하던 때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세도 가문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도 서슴지 않았다. 식은 전 조각에 침을 퉤퉤 받아 내던지면 얼른 주워 도포 자락에 쓱쓱 닦아 앙천대소하며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대원군. 궁도령이라 놀림 받고 시정잡배 무뢰한 천하장안(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과 어울려 다니며 기방 출입도 ‘없는 놈 밥 굶듯’ 했다. 기생 초선이와 사랑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철종(제25대)의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안동 김씨 수뇌부에서 무식하고 미련한 왕손을 고르던 참, 흥선군 이하응의 얘기가 나오자 “그 자도 왕손이냐”고 껄껄대며 조롱했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남은 그다.
윤 교수의 설명은 자상하다.
“흔히 이하응이란 본명보다도 흥선대원군을 이름처럼 알다시피 하는데 조선왕조에는 모두 네 분의 대원군이 계셨어요.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인데, 이 중 유일하게 흥선대원군만이 살아서 집권했던 분입니다. 누구보다도 풍수지리를 굳게 믿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기고 때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랬다.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기 전인 1846년(헌종12년)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묘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옮겼다. 2대군왕지지(二代君王之地)라는 당시 지사(地師) 정만인(鄭萬仁)의 명당 판정을 확신하고 이장했던 것이다. 어쨌든 흥선군은 천장한 지 7년 만에 후일 고종이 되는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낳았고 손자인 순종까지 2대에 걸쳐 황제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제대로 보는 풍수다.
“산을 보려면 적어도 우리나라의 산맥과 하천을 관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서울의 북한산은 백두대간에서 용틀임한 대맥이며, 관악산은 서울의 턱 앞이지만 속리산에서 달려온 내룡맥입니다. 사람의 등뼈같이 솟은 산등성이의 맥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몇 번을 굽이치면 반드시 큰 자리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그 법도를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고는 오히려 흥선대원군 묘 좌측 산등성이의 파묘 자리에서 ‘한자리’를 찾아냈다. 묘좌(卯坐·동쪽)에서 용맥을 잡고 갑좌경향(甲坐庚向·정동쪽에서 북쪽으로 15도 기운 방향)으로 쓰면 누가 봐도 길지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여기서 좌란 돌아가신 분의 머리를 모시는 곳이니 향은 마땅히 발이 안치되는 곳이다. 풍수에서는 24방위를 사용하는데, 한 방위가 15도씩을 차지해 모두 360도가 되는 것이다.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음양오행에 의해 구분되어 지며 자(子)는 북쪽이고 오(午)는 남쪽이다.
각 좌향마다 남녀간, 장남, 차남, 막내아들과 큰딸, 막내딸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로 배속돼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지간조차 등돌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 남연군의 묘혈은 어떤 자리인가. 전설과 일화도 많은 남연군(李球·?∼1822년) 묘는 풍수를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틈 날 때마다 찾는 전국 최고의 학습장이다. 풍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묘자리에 서 봐도 무릎을 탁 치며 탄복하는 명당이다.
“해좌사행(亥坐巳向)이면 알기 쉽게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묘 앞 오른쪽 당판의 바위를 옥새인으로 보며 후룡이 힘 있게 내려오고 좌청룡과 우백호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어요. 다만 현재 안산의 백호 가락 끝이 칼끝으로 보여 자손 중에 비명횡사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퍼뜩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떠오른다.
일본인들은 남연군묘의 왕기(王氣)가 너무 세다하여 후룡맥을 일부러 끊어 놓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들은 풍수는 미신이라며 당시 조선 민중들은 배우지 못하게 했다.
윤 교수는 “옛 선사(先師)들께서 어련히 잘 알아 모셨겠지만 혈처를 4m 우측으로 옮긴 자리에 술좌진향(戌座辰向·해좌사향보다 우측으로 30도 이동한 방향)으로 용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아쉬워 한다.
일본인들이 끊어 놓은 후룡맥을 지나 500m쯤 올라가면 유명 풍수로 한 시대를 날렸던 육관 손석우 선생의 묘가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술좌진향으로 복치혈(伏雉穴·꿩이 엎드려 있다가 날으려는 형국)이라고 간산 나온 다른 일행끼리 주고 받는다.
흥선대원군은 죽어서도 순탄치가 않았다.
1898년(광무1년) 5월16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에 부인 여흥 민씨와 처음 묻혔다가 1908년 1월30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이장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58년 후인 1966년 6월 16일 현 위치로 천장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후손들 대부분이 이장을 결심할 때는 보다 나은 자리를 택해 잘되자고 모시는 법인데, 그의 묘에도 이 같은 사가례(私家禮)가 적용되었는지 누구도 모를 일이다.
“대원군은 괴강사주였어요. 육십갑자 중에서 경진(庚辰)·경술(庚戌)·임진(壬辰)·임술(壬戌)·무술(戊戌) 등 다섯 가지가 사주팔자의 일주(日柱)에 들어가는 것을 말해요. 참을성과 인내심이 뛰어나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정말 보기 싫은 사람과도 만납니다. 자유당 때의 이기붕씨,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 노태우 전 대통령도 괴강사주였어요. 잘 생각해 보면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괴강사주라….
“이 기자, 잠에서 깨어나 읽는 조간신문에 죽은 사람 묘지 얘기만 해서 되겠어요? 다음에는 집 터를 찾아가 봅시다.”
객원전문기자·온세종교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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