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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5년만의 신작시집 ''밤 미시령''

입력 : 2006-03-18 15:21:00 수정 : 2006-03-18 15: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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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도 공중에도 머물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 ''고니''… 詩로 노래 고형렬(52·사진) 시인은 ‘고니’ 같다. 긴 다리를 땅에 붙이고 서 있어도 발에는 흙도 묻지 않을 것처럼 고고하고 허허로워 보이인다. 멀리서 지켜보기에는 좋으나, 정작 고니 자신은 땅에도 공중에도 머물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격하게 울지도 못하고, 멀리 떠나기도 힘든 존재의 불우를 그는 시로 노래한다. 그가 5년 만에 펴낸 시집 ‘밤 미시령’(창비)은 한땀 한땀 수를 놓듯 정교하게 짜 내려간 언어의 집이다.
“고니 발에는 자석이 붙어 있다/ 저릿저릿할 것이다/ 흙 속에 숨은 검은 철가루와/ 눈이 발가락에 척척 달라붙으면/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면/ 고니들은 가만히 발을 들어올린다/ 밟지 않는다 피해간다/ 고니들이 결국은 날아가고 말듯/ 고니들이 온 곳은 하늘/ 잠시 지상에 내렸을 뿐이다/ 그들이 돌아가는 곳은 아무것도/ 세울 수 없는 텅 빈, 파란, 깊은/ 무소(無巢)의 공중이다”(‘고니 발에는’ 전문)
시인은 고니가 돌아갈 집이 ‘집이 없는 공중의 집’이라고 했다. 지상의 온갖 추문과 더러운 진창을 그는 밟지 않고 피할 뿐이다. 밟지 않는다고, 피해간다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지상의 운명이다. 그리하여 지상을 탈출하고자 하지만 허공에도 집은 없다. 죽음은 미망의 불확실한 허공일 따름이다. 알기에, 시인의 비원은 깊어진다.
“고니들의 기다란 가느다란 발이 논둑을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마른/ 풀 하나 건들지 않는다// 나는 그 발목들만 보다가 그 상부가 문득 궁금했다 과연 나는/ 그 가느다란 기다란 고니들의 발 위쪽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기품 있는 모습이 그 위에 있다는 것을//(중략)// 반짝이는/ 그 사이로 눈발이 영화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내게는 그들의 집이 저 눈 내리는 하늘 속인 것 같았다/ 끝없이 눈들이 붐비는 하늘 속// 고니들은 눈송이도 건들지 않는다”(‘고니 발을 보다’ 부분)
하늘 속에 붐비는 눈송이들조차 건들지 않는 고니의 존재는 이미 실존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상처 입히지 않고 자신도 상처 입지 않는 존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하릴없이/ 태양 아래 배꼽 밑을 빤히 보고 있네/ 담배 한 대 환하게 피우고 있네/ 상스럽고 허무하게 터엉, 서 있네”(‘파주 북시티의 마지막 담배’)라고 자탄한다. 자탄하는 시인의 먼 시선 속에 창 너머로 눈이 내린다.
“하늘이 매를 맞는다, 문을 열어놓고// 새파랗게 새파랗게 매를 맞다가/ 새하얗게 날리고 만다/ 산도 바다도 엉엉 울고 만다 그예/ 생을 말하지 못해/ 나도 얼어붙은 청맹과니가 된다/ 나무는 나무 바위는 바위가 된다/ 피가 흙이 되고 종이가 되고/ 바위가 되어버린 글자들/ 사랑의 날들을 잊기 위해/ 하늘은 문을 열어놓고 매를 맞는다/ 저 국적 없는 강설”(‘눈소리’ 부분)




‘상스럽고 허무한’ 시인은 ‘눈’으로 스스로 매를 맞는다. 하지만 부처님도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데, 아무리 집도 없이 대지와 허공 사이를 떠도는 시인이라고 한들 왜 희망이 없겠는가. 시인은 2001년 8월 4일, 이렇게 희망을 썼다.
“2001년 8월 4일. 전등사 부처님 얼굴을 하얀 한지로 가려놓았다. 마당에 서서 부처님을 쳐다볼 때 세상이 다 돌아가신 것 같았다./ 불단에 이렇게 씌어 있다. ‘부처님 복장을 해야 하므로 잠시 고깔을 씌워드렸습니다.’ 새로 순금을 입힌 부처님은 화상을 입은 듯, 손금도 눈도 지워져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을 듯. 고깔을 벗겨드리려면 이달 29일이 와야 한다./ 숨소리 없는 한지 속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소년은 숨 다 뱉어내고 아버지 곁에 붙어 합장을 했다./ 아주 오래된 부처님도 휴가시다. 문밖 400년 된 느티나무에서 매미 울음이 여름을 찢는다. 세상이 환해질 눈창의 날 아직 남았다.”(‘개금불사’ 전문)
조용호 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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