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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듣는 사람끼리 공감대 조성
‘존버’ ‘솔까말’ 등 일상경험 소재로
가벼워보여도 표피 한겹 벗겨내면
청년들 묵직한 실상 보여주는 듯

‘아싸/아웃사이더’처럼 단어의 음절을 줄이거나 ‘누물보/누구 물어보신 분’처럼 문장의 앞글자만을 딴 조어들이 젊은이들의 일상언어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문자로 일일이 긴 내용을 치려니 시간이 걸리고 상대방이 읽기에도 지루할까 봐 생겨난 휴대전화 톡 문화 때문이라지만, 반드시 그런 이유만은 아닐 거다.

조어는, 마치 은어를 사용하는 패거리처럼,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 사람들끼리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생명력을 유지한다. 조어를 소비하는 이들은 클럽의 멤버십 같은 자기들만의 장을 형성한다. 멤버십이란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과 밖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구성원으로 환대받지만 이질적인 사람은 배제되거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게 된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조어의 유행이 갑작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오래전에도 요즘과 비슷한 방식으로 생겨난 조어들이 항간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만 과거에는 평소의 대화가 아니라, 모임에 나갈 때를 대비하여 집단의 화합을 외치는 조어를 준비해두어야 했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술잔을 들며 선창했던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같은 건배사가 대표적인 예다.

그런 건배사들과는 뭔가 분위기가 달라서 신선하던 게 있었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자’는 문구에서 따온 ‘낄끼빠빠’였다. 이 건배사를 만든 이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낄끼빠빠’를 생각해냈는지 정확한 함의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낄끼빠빠’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서른 중반쯤이었는데, 저마다 눈치껏 슬기롭게 단체생활의 압력으로부터 살아남자는 뜻으로 들었다. ‘우리’라는 대의명분으로 인해 항상 억눌려 있던 ‘나’의 사생활을 해방시키는 외침 같았다고나 할까.

오늘날 조어를 즐기는 이들은 보고, 듣고, 먹고, 만나는 일상의 경험을 소재로 다룬다. 역사를 이끌어갔던 거대 서사가 이제는 조어 활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사사로운 작은 서사들은 톡톡 튀는 조어로 등장하여 관심을 끈다. 젊은이들은 고상한 우리말을 쓸 줄 몰라서가 아니라, 친근함을 불어넣기 위해 유치한 B급 문화적인 요소를 애초부터 스타일로 끌어들인다. 교과서적인 공식 언어로는 담지 못하는 감성이나 가치관을 조어를 통해 발산시키면서, 알아듣는 이들끼리 공감하고 유대감을 느끼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가벼움으로 포장된 조어들의 표피를 한 겹 벗겨내면 청년들의 묵직한 실상이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대책이 없어 마냥 기다린다는 뜻으로 쓰이는 ‘존버’라는 조어의 배후에는 주류사회로의 진입장벽이 높은 것에 대한 청년들의 좌절감이 감추어져 있다. ‘솔직하게 까발려 말하자면’이라고 풀어쓸 수 있는 ‘솔까말’이라는 조어는 이른바 MZ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에게 의외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자기주장을 잘한다고 알려진 MZ세대는 표면적으로는 할 말 다하고 지내기 때문에 윗세대로부터 당돌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바닥에 있는 진심까지는 솔직하게 밝히지 못하고 사는 모양이다. 진심을 터놓아봤자 이해받지 못할 테고 어차피 타인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없으니, 아예 그럴듯한 말로 피해버릴 뿐 속마음은 숨기는 것이다. 이들이 ‘솔까말’이라고 진심을 드러내는 때는 누군가 알아주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끄덕임이라도 받고픈 상황일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새로 들어온 훌쩍 어린 후배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내가 살던 세상과는 완전히 달라진 때에 태어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제자들도 있다. 간혹 그런 이들 앞에서 건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과연 서로 통하는 말이 있을까 싶어 머뭇거리게 된다. ‘낄끼빠빠’를 떠올려 보기는 하지만, 요즘에 누가 그런 촌스러운 건배사를 좋아하겠는가. 괜히 이상스럽게 끼어들었다가 분위기 망칠 것 같아 ‘마돈나/마시고 돈 내고 나온다’라고 외치고 빠진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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