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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사랑하는 존재들은 분신과 나눌 수 없을 것 같아요”

입력 : 2022-06-07 20:32:52 수정 : 2022-06-07 20:3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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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아노말리’로 佛 공쿠르상 수상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 내한 간담회

공쿠르상 佛 최고 권위… 세계 3대 문학상
작품·대중성 겸비… 40여개국 번역 출간
보르헤스 단편 ‘타인’ 읽고 아이디어 착안
분신 대면 통해 인간 실존 다채롭게 탐색
“시뮬레이션 가설로 분신 출현 사실적 설명
한국 잘 모르지만 영화·드라마로 배워”
작가 르 텔리에는 자신의 분신 대면이라는 상황을 통해서 인간 실존을 탐색한 장편 ‘아노말리’로 2020년 공쿠르상을 받았다. 그는 “저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관과, 존재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사랑하는 존재들은 분신과 나눌 수 없을 것 같다”고 웃었다. 민음사 제공

주인공인 젊은 보르헤스는 1969년 어느 아침 영국 케임브리지 찰스강이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1918년 스위스 제네바의 벤치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칠십대의 또 다른 보르헤스와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은 서로 소통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십 년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젊은 주인공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늙은 자신과 대면한다는 설정을 담은 보르헤스 단편소설 ‘타인(The Other)’을 읽고서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는 자신의 분신과 대면하는 상상을 했다. 외모는 물론 경험, 기억까지 같은 자신의 분신과 대면하게 된다면. 그는 처음 단편으로 쓰려던 계획을 중단하고 서로 다른 여러 인물이 똑같이 자기 분신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쪽으로 관심사를 확장시켰다.

“보통 소설을 쓰는 방식과 완전히 반대로 시작한 건데요. 그러니까 일반적인 소설이라고 한다면 한 명의 주인공이 있고, 이 주인공이 여러 다른 상황을 겪어나가며 진실과 이면을 탐색하게 되는데, 반대로 한 거죠. 모두 똑같은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한 후에, 여러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았죠.”

자신의 분신을 대면한다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서 인간 실존을 다채롭게 탐색한 르 텔리에의 장편 ‘아노말리’는 이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아노말리’는 ‘이상’, ‘변칙’이라는 뜻. 작품은 2020년 프랑스 최고 권위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공쿠르상은 노벨문학상, 부커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소설은 2021년 3월 파리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청부살인 업자 블레이크,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빅토르 미젤, 동성애자인 뮤지션, 나이차가 나는 두 연인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실은 뉴욕행 비행기가 공포의 난기류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여객기는 석 달 뒤인 6월에도 동일한 승객을 싣고 동일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난다. 전대미문의 사건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여객기를 뉴저지 공군 기지로 비상 착륙시키고 비밀을 캐내려 한다. 3개월이라는 시차를 두고 3월 승객과 6월 승객은 자신들의 분신을 대면하면서 삶의 진실과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는 공쿠르상 수상작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많이 팔렸다. 기존 수상작이 30만~40만부가 판매된 반면 그의 책은 3배가 넘는 110만부가 팔렸다. 평단과 독자,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은 셈. 이미 4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작품 ‘아노말리’는 어떻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었을까. ‘아노말리’의 국내 출간과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차 내한한 르 텔리에를 지난 2일 서울 정동 한식당에서 한국 기자들과 함께 만났다.

―분신이라는 주제는 문학 및 문화사에서 오래된 주제인데요.

“제가 써보고 싶었던 분신이라는 발상은 문화계에선 이미 오래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길가메시 이야기나 그리스 신화에도 나오고 현대 문학에서도 많이 다뤄지는 모티브이죠. 제가 생각하기에, 분신을 둘러싸고 4개의 큰 주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좀 클래식한데,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신이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서 동침을 하고, 이런저런 인간으로서 삶을 누리잖아요. 두 번째는 적이라는 개념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적이라는 개념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도 나오고 ‘지킬 앤 하이드’도 그런 개념이라고 볼 수 있고, 칼비노 소설에서도 이런 개념이 나옵니다. 세 번째는, ‘아노말리’가 다루는 것과도 유사한데, 바로 거울 효과, 거울 이론입니다. 자기 자신과 대면했을 때 자신을 객관적으로, 제3의 시각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네 번째 주제는, 제가 ‘아노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진짜 자기 자신과의 대면입니다. 적도 아니고, 사칭 인물도 아니고, 단순히 거울 효과로서의 자신이 아닌, 진짜 자신과의 대면인 것이죠. 이것 역시 새로운 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만, 접근 방식을 좀 달리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분신과의 조우 또는 대면이라는 구체적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요.

“호르헤 보르헤스의 단편 ‘타인’을 읽고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아이디어를 착안했습니다. ‘타인’을 읽으면서 진짜 재미있다,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논리적으로는 약간 오류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편 ‘아노말리’에서 3개월이라는 시차,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106일간의 시차를 뒀습니다. 106일이라는 시간은 자기가 자신과 대면을 했을 때 물리적으로 겉모습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시간임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 삶 속에선 본질적이고 커다란 변화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울러 제가 어렸을 때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와 가까운 소설이기도 합니다.”

―소설에선 자신의 분신과 조우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과학적 설명이 나오는데요.

“저는 소설이 실질적인 변화나 교훈을 주는 우화 성격을 띠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분신 출현에 사실적인 설명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해 선택한 것이 ‘시뮬레이션 가설’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생각해낸 건 아니고, 몇 년 전 콘퍼런스에서 스웨덴 닉 보스트롬 교수가 제기한 이른바 ‘보스트롬 가설’입니다.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 또는 가상공간이라고 하는 가설은 문학적으로 멋진 은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신을 대면한다면 그에게 어떤 삶을 부여하고 싶으신지요.

“저는, 예를 들면, 누가 길을 가다가 저를 확 밀면, 제가 밀렸어도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는 스타일의 사람입니다. 소설을 써가면서 느낀 것은, 제 의지로 결정하고 저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관과, 존재를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사랑하는 존재들은 우리가 나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1957년 파리에서 태어난 르 텔리에는 1991년 단편소설집 ‘소나테스 드 바’와 이듬해 장편소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설(Le Voleur de nostalgie)’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사랑에 대해 실컷 말한’(2009), ‘액체로 된 이야기’(2012), ‘모든 행복한 가족’(2017), ‘나와 프랑수아 미테랑’(2016) 등의 작품을 펴냈다. 블랙 유머 대상 수상, 공쿠르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1992년 국제적인 실험 문학창작 집단 ‘울리포(OuLiPo)’에 참여했고, 2019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궁금하군요.

“유럽인으로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습니다. 몇 해 전 프랑스 작가 보리스 비앙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의 저서 가운데 6·25전쟁과 관련한 내용이 있어서 6·25전쟁을 조금 알고 있고요. 과학 전문기자로 일했기에 지난 50, 60년간 한국 산업의 발전이나 대기업도 좀 알고 있죠. 제가 한국 지식을 쌓거나 배우는 것은 주로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입니다.”

프랑스어 통역이 더해지면서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는 길게 이어졌지만, 작가 르 텔리에의 답변은 짧고 단선적인 어떤 지식이나 대답이 아닌, 스토리와 유머뿐 아니라 어떤 웅대한 사유를 품은 장편 소설 같았다. 어떤 대가적인 느낌이나 인상을 숨길 수 없었던 그의 경험과 사유에 비해, 여전히 깊지 못하고 표피나 둘레에 머무른 기자의 문학적 경험과 사유가 속상했다.

그런데, 외모뿐 아니라 경험과 기억을 기자와 똑같이 공유한 ‘나’를 만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말없이 안아주고 가볍게 등도 토닥거려줄 수 있을까, 그리하여 가벼운 미소와 함께 친절하게 말해줄 수 있을까. 고생했다고, 잘 견뎌냈다고, 앞으로도 잘 될 거라고, 그냥 이 순간을 감각하라고, 즐겁게 자신답게 걸어가라고.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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