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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 볼까 유채꽃 볼까…이청준 문학 향기 따라 떠나는 장흥 여행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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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6-04 10:00:00 수정 : 2022-06-03 17: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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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상금리 작약꽃밭 흰색·분홍색·자주색 그라데이션/탐스러운 꽃송이 바람에 살랑살랑 꽃도 사람도 아름답다/‘서편제’ 작가 이청준 고향 진목마을에선 ‘선학동 나그네’ 되어 유채꽃에 취하다 

장흥 상금리 작약꽃밭

빛바랜 한옥 툇마루에 앉는다. 집 주인은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나 보다. 달랑 세 칸짜리 한옥인 걸 보니. 작은 흙마당이 전부인 소박한 집이지만 쓸쓸하지는 않다. 장독대 한 귀퉁이에 수줍게 고개를 내민 탐스러운 붉은 ‘함박꽃’ 있으니. 멀리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해버릴 정도로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크고 화려한 꽃송이. 집주인은 가고 없지만 장흥 ‘이청준 생가’에는 올해도 붉고 흰 작약 활짝 피어 지친 영혼 잠시 쉬어가라 손짓한다.

장흥 상금리 작약

◆수줍지만 화려한 작약 활짝 피었네

 

오뉴월의 꽃 모란과 작약. 둘 다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크고 색깔도 비슷해 아름다움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오죽하면 절세미인을 두고 ‘앉으면 모란, 서면 작약’이라 불렀을까. 다만 작약은 풀의 줄기에 달리고, 모란은 나뭇가지에서 피는 꽃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모란이 먼저 화려한 자태를 뽐내다 지고 나면 작약이 그 뒤를 잇는다. 올봄에 모란을 제대로 못 봤으니 작약은 놓칠 순 없다. 이맘때면 넓은 들판이 작약으로 뒤덮이는 전남 장흥으로 달려간다.

 

개인이 운영하는 농장이라 여행지 이름이 따로 없다. 내비게이션에 ‘장흥군 용산면 상금리 220-1’을 치고 가면 된다. 농장 주인이 몇해 전 약재용으로 심었는데 봄꽃 마니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맘때면 물어물어 찾아온다. 농장 입구 도로변 거대한 들판은 온통 도라지밭. 이곳도 예전에는 작약밭이었는데 얼마 전 도라지밭으로 바뀌었다. 농장 건물이 가까워지자 거대한 작약밭이 펼쳐지는데 꽃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다. 며칠 전 약재로 쓰는 뿌리를 뽑느라 작약 줄기를 잘라 버렸단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농장 건물 쪽에 여행자들을 위해 꽤 넓은 작약밭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

장흥 상금리 작약

작약꽃밭으로 걸어 들어간다. 목련 닮은 고결한 순백의 꽃에서 여리여리한 분홍, 그리고 팜므파탈 닮은 짙은 자주색까지. 또 같은 색이라도 농도가 조금씩 달라 솜씨 좋은 화가가 그라데이션으로 붓터치 한듯 펼쳐진 수만송이 커다란 꽃송이가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리는 아찔한 풍경이라니. 한순간 짙은 향기가 비강을 모두 채우고 깊은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술에 취한 듯 정신이 혼미해진다. 소문 듣고 찾아온 여인 둘은 “작약도 예쁘지만 아직 우리도 충분히 아름다워”라며 깊은 셀피 삼매경에 빠진다. 그제야 옛날 중국에서 작약을 ‘취서시’로 불렀다는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나라 양귀비, 한나라 초선, 왕소군과 함께 중국의 4대 절세미인으로 꼽히는 월나라 서시. 그때도 작약이 참 예뻤는지, ‘술 취한 서시 같다’고 해서 작약에 취서시란 별명을 달아줬다.

장흥 상금리 작약꽃밭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워 ‘함박꽃’으로도 불리는 작약 뿌리는 약초로 쓰이는데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등장한다. 모란(Paeonia suffruticosa )과 작약(Paeonia lactiflora)의 학명 중 속명 패오니아(Paeonia)는 의술의 신 패온(Paeon)에서 유래됐다. 저승의 왕 플루토는 헤라클라스가 저승에 들어 오려하자 불사신이 들어오면 저승의 질서가 깨진다며 극구 말렸다. 화가 치민 헤라클라스는 화살로 플루토를 저격했고 크게 다친 플루토는 하늘로 도망쳤다. 이를 본 패온이 올림포스 산에서 꽃의 뿌리를 채취해 플루토의 상처에 바르자 곧바로 나았단다. 그 꽃을 페오니(Peony)라고 부르게 됐는데 바로 작약이다. ‘패온’이란 공주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터로 떠난 사랑하는 왕자가 죽어 모란이 되자 공주는 제발 왕자 곁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지금도 작약이 돼 왕자의 곁을 지키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늘 모란이 먼저 피고 작약이 뒤를 따른다.

선학동마을 학 조형물

◆유채꽃 향기 따라가는 이청준 소설문학길

 

‘장흥에 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한승원, ‘녹두장군’의 송기숙, ‘생의 이면’의 이승우 등 한국 현대문학 역사에 길이 남을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곳이 장흥이기 때문이다. 연작소설집 ‘남도사람’의 단편이자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도 장흥 출신. 그의 작품 ‘선학동 나그네’는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으로 날아올랐고, 영화 ‘밀양’도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원작이다.

선학동 마을 유채
선학동마을 유채꽃

이청준 소설문학길을 따라 작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도사람의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태어나는 말’의 배경을 따라 걷는 길은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회령진성∼천년학세트장∼선학동마을∼공지산능선길∼이청준생가∼이청준묘소(이청준 문학자리)의 8km 코스로 걸어서 3시간50분 거리.

선학동마을 유채꽃

득량만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진목리 선학동 마을에 들어서자 서로 입을 맞춘 학 두 마리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병풍처럼 둘러선 공지산 아래 능선은 온통 노란 유채꽃으로 덮여 소설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하다. 공지산 질펀한 자락은 법승의 장삼 자락이 흘러내린 듯 여유로워 관음봉으로 불린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매일 보는 이런 풍경에 반했나 보다. ‘선학동 나그네’에서 “포구에 물이 차오르면 관음봉은 그래 한 마리 학으로 물 위를 떠돌았다. 선학동은 그 날아오르는 학의 품 안에 안겨진 마을인 셈”이라고 신비롭게 묘사한 걸 보니. 문학길을 따라 걷는다. 원두막을 지나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르면 노란 물결 춤추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채밭은 가을이면 새하얀 메밀꽃을 갈아입는다. 9월 말쯤이면 피기 시작해 10월 중순쯤 절정이라니 가을 여행을 기약한다.

이청준 생가 전경
이청준 생가
이청준 생가 작약

선학동 마을에서 차로 4분 거리에 이청준 생가가 남아있다. 흙마당으로 들어서자 장독대 옆에 핀 화사한 작약이 반긴다. 몇 송이뿐인데도 낡은 한옥마저 운치 있게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대단하다. 아주 작은 방에는 작가의 사진과 유물이 놓여 그의 삶을 고스란히 전한다. 애잔한 사연도 전해진다. 어미는 아들을 광주의 고등학교로 보낸 뒤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들 몰래 집을 팔았다. 어느 날 아들이 집에 온다고 하자 새 주인에게 사정해 어미가 그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꾸며 아들을 하룻밤 재웠단다. 2008년 타계한 작가는 진목리 갯나들에 안장됐고 바로 옆엔 이청준문학자리가 조성됐다.

키조개 구이
키조개 무침

◆키조개 먹을까 갑오징어 먹을까

 

미식의 본고장 장흥에 왔으니 먹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한우, 키조개, 표고버섯을 함께 먹는 ‘장흥삼합’이 대표 메뉴인데 키조개만 구워 먹어도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다. 전국 생산량의 84%를 담당할 정도로 장흥은 키조개 원산지. 안양면 수문항의 갯마을횟집에 들어서자 키조개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지만 불판에 구워 먹는 게 가장 맛있다. 너무 익힐 필요 없다. 살짝 구워 그대로 입 안으로 밀어넣자 남도 바다가 통째로 들어온 듯 짭조름한 미네랄이 입 안에서 요동치다 어느새 살살 녹아 사라진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갓 지은 쌀밥에 새콤달콤한 키조개 무침을 얹어 먹는 정식도 숟가락을 멈출 수 없다. 여기에 표고버섯, 콩나물을 넣어 진하게 끓인 맑은 키조개탕을 곁들이면 장흥 미식여행을 완성한다.

갑오징어 회
갑오징어 먹찜

갑오징어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봄철이 한참 맛있을 때. 안양면 사촌리 여다지회마을은 접시에 꽃처럼 펼친 갑오징어 플레이팅이 예술이다. 일반 오징어보다 영양 성분이 풍부한 갑오징어는 식감이 훨씬 탱글탱글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일품. 머리는 오독오독 씹는 맛이 즐겁다. 진한 먹물과 함께 그대로 쪄서 나오는 갑오징어 먹찜은 입 안을 고소함으로 가득 채운다. 먹찜은 조금 남기도록. 밥과 섞어 김 가루를 솔솔 뿌린 뒤 불판에 노릇노릇하게 볶아서 바지락탕을 곁들여 먹으면 색다른 미식에 눈이 번쩍 뜨인다.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

위를 장흥의 맛으로 가득 채웠으니 이제 걸을 시간.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는 100ha에 40년생 이상의 아름드리 편백나무가 빽빽해 걷는 내내 폐를 신선하게 샤워할 수 있다. 미식과 신선한 피톤치드 덕분에 다시 내일을 힘차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장흥=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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