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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아, 왜 이제 왔어"… 美 6·25 참전용사 누나의 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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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4-24 09:32:04 수정 : 2022-04-24 09: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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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의 아들, 장진호에 뜨거운 피 쏟아
"제발 죽기 전에 동생 찾아달라고 기도했죠"
주미 대사관 "한국, 고인에 큰 빚 지고 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헤이거스타운의 한 장례식장에서 6·25전쟁 참전용사 로이 찰스 델라우터의 누나 에블린 에카드가 최근 신원이 확인돼 가족 품으로 돌아온 남동생의 관을 부여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현지 언론 ‘더 프레드릭 뉴스포스트’(The Frederick Newspost) 홈페이지

“해마다 현충일(Memorial Day·매년 5월 네 번째 월요일)이 되면 아버지 존함이 새겨진 마을의 6·25전쟁 참전기념비 앞에 꽃을 바쳤습니다. 올해 현충일에는 아버지가 실제로 그곳 묘지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으니 마음가짐이 조금 다를 것 같아요.”

 

미국 메릴랜드주(州) 스미스버그에 사는 수 델라우터(74)의 말이다. 그의 아버지 로이 찰스 델라우터(1929∼1950)는 6·25전쟁 참전용사로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 당시 21세 나이로 실종됐다. 최근 하와이에서 유해의 신원이 확인돼 지난 19일(현지시간) 가족 곁으로 돌아간 데 이어 22일에는 스미스버그의 추모공원에서 장례식이 엄수됐다.

 

◆메릴랜드의 아들, 장진호에 뜨거운 피 쏟아

 

스미스버그에서 태어난 로이는 고교 졸업 직후인 1948년 미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였고 훈련을 마친 로이는 패전국 일본 점령 임무에 투입됐다. 그런데 로이가 제7보병사단 32연대 소속 상병으로 복무하던 1950년 6월 25일 인근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7사단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일 먼저 파병됐으며 6·25전쟁 내내 큰 인명피해를 입는다.

 

로이의 부대는 미 해병대와 육군이 38선을 넘어 함경도 깊숙이 진격한 1950년 11월 개마고원 부근 장진호 일대에 있었다. 미군 등 유엔군의 눈을 피해 몰래 참전한 중공군의 기습으로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고, 밤이면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는 혹한의 추위 속에 미군은 절체절명의 위기로 내몰린다. 결국 상부 명령으로 후퇴하던 로이의 부대는 1950년 12월 2일 매복해 있던 중공군과 맞닥뜨렸고, 그날 이후 로이는 동료 장병들은 물론 미국의 가족과도 더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미군은 일단 로이를 ‘실종자’로 처리했다. 하지만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사들, 그리고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혔다가 1953년 휴전 이후 풀려난 병사들은 “로이가 중공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 모습을 곁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결국 로이는 ‘전사한 것이 확실하나 아직 시신은 수습하지 못한’ 장병으로 분류돼왔다. 미군은 로이에게 전사 당시 계급인 상병에서 병장으로의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6·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21세 나이로 전사한 미 육군 로이 찰스 델라우터 병장. 미 국방부 제공

◆"제발 죽기 전에 동생 찾아달라고 기도했죠"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장진호 일대 등에서 전사한 미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를 55개 상자에 담아 미국에 돌려줬다. 이 유해를 하와이에 임시로 안치하고 신원확인 작업을 벌여온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올해 1월 “로이 찰스 델라우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로이의 부모과 아내는 진작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누나인 에블린 에카드(93), 여동생 마거릿 카(90), 그리고 어느덧 70대 할머니가 된 두 딸 샤를린(75)과 수(74) 델라우터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 에블린은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라 꿈에도 그리던 남동생의 ‘귀환’이 생애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졌다.

 

“로이는 장난꾸러기였죠.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하모니카 연주를 아주 잘했다오. 나를 위해 네 잎 클로버를 찾아주기도 했고요. 군대에 있는 동안 편지를 보냈는데…. 참 오랫동안 ‘제발 내가 죽기 전에 동생이 발견되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지요.”(에블린)

 

로이가 전사했을 때 언니 샤를린은 3살, 동생 수는 고작 2살이었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헤이거스타운에서 6·25전쟁 참전용사 로이 찰스 델라우터의 유해를 실은 운구 차량 행렬을 향해 지역 소방관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현지 언론 ‘더 프레드릭 뉴스포스트’(The Frederick Newspost) 홈페이지

“저는 (6·25전쟁 등을 다룬) 오래된 전쟁영화를 보면서 자랐죠. 그저 그런 영화 장면에서나 ‘아, 아버지도 저렇게 사셨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10대 소녀 시절 또래들이 ‘아버지의 날’(매년 6월 세 번째 일요일)에 무슨 이벤트를 할까 의논하는 것을 보며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기억납니다.”(샤를린)

 

◆주미 대사관 "한국, 고인에 큰 빚 지고 있다"

 

로이의 유해가 스미스버그 인근 헤이거스타운의 한 장례식장으로 운구된 지난 19일 에블린은 동생의 관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현지 언론은 ‘다시 집으로’(Home again)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6·25전쟁 참전용사의 유해가 헤이거스타운으로 말없이 귀환했다”고 대서특필했다. 지역에 거주하는 참전용사 및 퇴역 군인, 그리고 경찰관·소방관들이 도로변에 모여 로이를 실은 운구 차량을 향해 거수경례를 보냈다.

 

마을 추모공원에서 장례식이 열린 22일은 마침 1929년 태어난 로이의 93번째 생일이었다. 여동생 마거릿은 “하와이에서 고향 마을까지 오느라 오빠도 많이 힘드셨을 것”이라며 “오늘부터는 동네에서 안식을 취하게 됐으니 내 마음도 한결 더 평온해졌다”고 말했다.

 

로이의 이름은 올 여름 수도 워싱턴에서 봉헌될 ‘6·25전쟁 기념의 벽’ 명비에도 새겨진다.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부를 대표해 장례식에 참석한 이호주 육군 대령은 추모사에서 “저의 조국은 로이 찰스 델라우터 병장님과 당신의 가족에 큰 빚을 지고 있다”며 “고인의 거룩한 희생, 그리고 불굴의 용기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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