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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여인과 아바네라, 그리고 하얀 비둘기가 전하는 애틋한 사랑 ‘라 팔로마’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관련이슈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 디지털기획

입력 : 2022-03-12 14:05:59 수정 : 2022-03-12 14: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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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마 메를로 2013

 

쿠바 아바나(habana) 항구를 떠나는 남자. 그를 떠나보내는 아름답고 순박한 쿠바 여자는 애틋한 사랑을 하얀 비둘기에 실어 보내며 슬픈 눈망울로 노래합니다. “당신의 창가에 비둘기 한 마리 날아들면 화관을 씌워주세요. 비둘기는 바로 나에요. 제발 내 곁으로 오세요. 사랑하는 사람아♩♪” 쿠바를 대표하는 춤곡 ‘아바네라(habanera)’를 세상에 알린 노래 ‘라 팔로마(La Paloma)에서 여자는 하얀 비둘기로 날아올라 먼 바다를 건너 사랑하는 이의 곁으로 마구 달려갑니다. 

 

세바스티안 이라디에

 

■쿠바 무곡 ‘아바네라’를 세계에 알린 ‘라 팔로마’

 

아바네라 또는 하바네라는 ‘아바나풍의’라는 뜻으로 19세기 전반 쿠바 수도 아바나를 중심으로 흑인 음악가들이 연주하다 스페인에서 유행한 민속 춤곡입니다. 원래 스페인 등 유럽의 민중 악곡이었는데 쿠바에서 유행한 뒤 다시 유럽으로 역수입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 아바네라를 전 세계 퍼뜨린 이가 라 팔로마를 지은 스페인 국민 작곡가 세바스티안 이라디에르(Sebastian Yradier 1809-1865)입니다. 그는 1830년대 쿠바를 여행하던 중 아바네라 무곡과 아바나 풍경의 매력에 푹 빠져 현지에서 이 곡을 작곡합니다. 라 팔로마는 스페인 선원들을 따라 중남미 섬으로 전파됐는데 스페인보다 멕시코에서 더 유행해 국민가요가 됐을 정도입니다.

 

라 팔로마는 ‘하얀 비둘기’란 뜻. 옛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기원전 499-494년 페르시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함대가 그리스 아토산 인근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될 때 하얀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며 배를 탈출하는 모습을 그리스인들이 목격합니다. 선원들이 데려간 비둘기였는데 그리스인들은 하얀 비둘기가 선원들의 영혼을 담은 메시지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믿었답니다. 하얀 비둘기는 그때부터 사랑과 안부를 전하는 메신저가 된 것이지요.

 

카르멘 아바네라 장면 유튜브 캡처

느린 4분의 2박자가 특징인 아바네라는 나중에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탱고의 모체가 됩니다. 라 팔로마의 리듬은 조르주 비제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카르멘에도 등장합니다. 여주인공인 집시 여인 카르멘이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로, 원제목은 ‘L’amour est un oiseau rebelle(사랑은 길들여지지 않는 새)’이지만 아바네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부터 조수미까지 다양한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라벨의 관현악곡 ‘스페인 광시곡’에서도 하바네라가 차용되면서 라 팔로마의 인기는 전 세계로 퍼져갑니다.

 

내 머리속의 지우개 영화 포스터

스페인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꼽히는 라 팔로마는 나나무 스크리,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플라치도 도밍고 등 전 세계 유명 뮤지션들이 1000가지 이상의 장르와 버전으로 노래하거나 연주해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레코딩된 노래로 기록됐습니다. 특히 2004년 5월 9일 독일 함부르크 연주회에서 합창단 8만8600명이 라 팔로마를 불러 동시에 가장 많은 인원이 부른 노래로 기네스북에 오릅니다. 전주만 들어도 알 정도로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멜로디입니다. 눈물샘을 자극시키며 관객을 끌어 모은 정우성과 손예진 주연의 2004년 개봉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도 두 사람의 애절한 순애보를 자극하는 장치로 라 팔로마가 삽입됩니다. 영화 OST의 보컬은 빅마마 멤버 신연아로 두터운 톤의 감성 짙은 목소리가 묘한 슬픔을 자극합니다. 

 

팔로마 빈야드 와이너리
팔로마 빈야드 와이너리 전경

 

■나파밸리 가장 높은 곳에서 다시 태어난 팔로마

 

미국 와인산지를 대표하는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에도 하얀 비둘기가 훨훨 날아다닙니다. 바로 나파밸리 최고의 메를로 생산자로 꼽히는 팔로마 빈야드(Paloma Vinyards)에서 하얀 비둘기의 전설이 한잔의 와인에 담겨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팔로마 빈야드는 짐 리차드(Jim Richards)와 바바라 리차드(Barbara Richards) 부부가 1983년부터 일군 와이너리입니다. 그들은 나파밸리에서 해발 600~670m로 가장 높은 와인산지인 스프링 마운틴(Spring Mountain) 정상의 척박한 땅 17에이커를 매입해 직접 포도밭을 개간하고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를 심어 1987년 첫 포도를 수확합니다. 와이너리 이름은 자연스럽게 바바라가 평소 가장 좋아하던 노래 라 팔로마에서 빌려 와 팔로마 빈야드로 결정합니다. 힘차게 날개 짓하는 예쁜 하얀 비둘기 한 마리도 와인병 레이블에 크게 그려 넣어 그들의 와이너리가 힘차게 비상하기를 소원합니다.

 

 

 

처음에는 길 건너 프라이드 빈야드 등 나파밸리 와이너리에 그저 포도를 팔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1991년 그들이 수확한 메를로를 사갔던 프라이드 빈야드가 메를로 1991년 빈티지로 엄청난 인기를 끌자 직접 나파밸리 최고의 와인을 빚겠다고 마음먹고 아예 스프링 마운틴에 포도밭 한가운데 집을 지어 삶의 터전까지 옮깁니다. 이때 짐은 나파밸리의 전설적인 와인메이커중 한명인 밥 폴리(Bob Foley)와 손잡고 위대한 도전에 나섭니다. 부부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포도밭에서 보내며 자식처럼 정성으로 포도를 정성으로 재배했고 양조에 몰두한 결과 그들의 첫번째 와인인 메를로 1994 빈티지가 1996년에 처음으로 탄생합니다. 당시는 575 케이스에 불과했고 소비자들에게 정식 판매하는 상업적인 와인은 1998년에야 첫선을 보입니다. 

 

팔로마 빈야드 포도 선별 작업
와인스펙테이트 2003 올해의 와인 수상 트로피

반응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와인스펙테이터가 전설의 프랑스 보르도 포므롤 와인 샤토 페트뤼스(Chateau Petrus) 등 난다 긴다 하는 와인들을 모두 제치고 팔로마 메를로 2001 빈티지를 2003년에 올해의 와인으로 선정하면서 팔로마는 비로소 이름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게 됩니다. 포도밭을 일군지 20년, 첫 포도를 수확한지 16년, 메를로 첫 빈티지를 선보인지 6년만에 이룬 업적이니 매우 놀랍기만 합니다. 2004년과 2006년 메를로가 와인스펙테이터 톱 100에도 계속 이름을 올리면서 팔로마의 명성은 이어집니다.

 

팔로마 빈야드 전경
팔로마 빈야드 메를로

 

■태양, 바람, 그리고 시간의 선물

 

팔로마는 메를로가 주품종이고 카베르네 소비뇽을 그해 포도 품질에 따라 14~16% 정도 블렌딩합니다. 팔로마 메를로 2013을 코에 갖다 대는 순간 나파밸리의 뜨거운 햇살아래 자란 잘 익은 과일향이 거침없이 비강을 뚫고 들어오네요. 검은자두, 블랙베리, 블랙커런트, 플럼 등 검은과일향으로 시작해 모카, 코코아, 커피콩에 이어 다크쵸콜릿과 후추향이 따라오는 피니시의 긴 여운. 그리고 프랑스 보르도 우안을 대표하는 생테밀리옹 그랑크뤼 와인의 향수같은 우아함과 신선한 산도 밸런스까지 두루 지닌 보기 드문 역작입니다. 이런 대단한 와인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한 짐과 바바라의 열정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냅니다. 로버트 파커는 팔로마 메를로 2013이 2022년 현재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상태지만 향후 10년이상 더 발전해 나갈 것으로 평가합니다.

 

팔로마 메를로 2013
팔로마 메를로 2013

 

와이너리는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 2018 빈티지가 역대급 와인으로 탄생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합니다. 메를로가 매우 농염하게 익었는데 글라스에 담긴 와인은 깊은 가넷색을 띠며 코에서는 바이올렛, 검은 과일, 감초를 넣은 사탕, 후추로 시작돼 입에서는 잘 익은 플럼, 블랙 올리브, 아니스 그리고 마무리에서 풍성한 다크쵸콜릿이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그릴에 구운 스테이크, 고기 질감의 포토벨로 버섯, 향이 강한 치즈와 좋은 궁합을 보입니다. 팔로마 빈야드 와인들은 현재 어크로스 더 리버 트레이딩 코리아에서 단독 수입합니다.

 

팔로마 빈야드 위치
스프링스 마운틴 팔로마 빈야드 포도밭

짐과 바바라는 어떻게 짧은 시간에 나파밸리 최고의 메를로 생산자의 반열에 올랐을까요. 아마도 땅을 보는 능력이 탁월한 지질학자 출신인 짐의 선견지명 덕분일 겁니다. 팔로마 빈야드가 소유한 스프링 마운틴의 포도밭은 나파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밭인 오크빌(Oakville)보다 북쪽에 있으며 바닷가인 소노마카운티에서 가깝습니다. 또 6~8 종류의 토양으로 이뤄진 가파른 경사면에 포도를 심었습니다. 덕분에 너무 뜨거운 나파밸리 평지의 포도밭과 달리 포도는 소노마카운티 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늦가을 까지 아주 천천히 익어갑니다. 

 

스프링 마운틴 팔로마 빈야드
팔로마 빈야드
팔로마 빈야드 캐노피 방식 포도재배

 

캘리포니아 와인들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끌어 올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것이 바로 ‘롱 행 타임(lon hang time)’, 즉 포도 송이를 오래동안 가지에 매달린채 둘 수 있는 늦수확인데 스프링 마운틴은 평지 포도밭보다 몇주나 더 늦게 수확하니 탄닌은 강렬하면서도 훨씬 부드러워진답니다. 또 다양한 토양의 미네랄을 끌어 올려 포도는 농축미와 복합미가 매우 뛰어납니다. 더구나 나파밸리에서 가장 높은 고도로 일교차가 커 신선한 산도까지 움켜쥐니 우아하면서도 밸런스가 좋은 포도가 얻어집니다. 여기에 프렌치 오크통에 18개월 동안 숙성한 뒤 다시 24개월 동안 병 숙성을 거쳐 세상에 나올 정도로 양조에 공을 들이는 것도 한몫 합니다.

 

양조작업하는 쉘든
팔로마 카베르네 소비뇽
팔로마 오드 투 바바라 뀌베

 

짐과 바바라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짐은 오랜 암투병 끝에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라 팔로마의 노래 가사처럼 남편을 그리워하던 바바라도 7년뒤인 2016년 짐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들은 떠났지만 위대한 와인은 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손주를 통해 대를 이어 전해집니다. 가족들은 바바라를 기리는 팔로마 오드 투 바바라 뀌베(Paloma Ode to Babara Cuvee) 2018 빈티지를 만들어 바바라에게 헌사합니다.  카베르네 소비뇽 54%, 메를로 44%를 블렌딩했는데 카베르네 소비뇽은 바바라의 강인함과 포도밭에 헌신하던 근면함을 상징하고 메를로는 방문객들을 정중하게 맞이하던 부드러운 음성을 오마주했다고 합니다. 블루베리, 아니스, 잘 익은 자두, 유칼립투스의 이국적인 향으로 시작해 체리, 검은 감초, 검은 후추, 쿠민 향으로 이어지는 풀바디 와인입니다.

 

쉘든 가족
쉘든과 아들 제이스

 

 

현재 와이너리는 아들 쉘든(Sheldon)이 두 아들 제이스(Jace), 캐스턴(Caston)과 함께 이끌고 있는데 쉘든은 아버지 짐에게서 와인메이킹을, 어마니 바바라에게서는 포도재배 노하우를 전수받아 짐과 바바라의 와인 DNA를 지문처럼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바라는 평소 쉘든에게 포도덩굴을 자신의 자식처럼 존중하라고 가르쳤고 짐은 사람의 손길을 최소한으로 개입하면서 저절로 좋은 와인이 만들어지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쉘든은 이런 부모의 철학을 이어받아 떼루아가 그대로 녹아있는 포도를 생산해 이를 한잔의 와인에 고스란히 담는데 역량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셀러 테이스팅하는 쉘든
짐, 바바라와 쉘든   인스타그램 캡처

 

2020년 나파밸리에 큰 화재가 났을때 와이너리 주변과 쉘든 가족들이 재배하던 곡물들은 고스란히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팔로마 빈야드 포도밭은 화마를 피해다고 합니다. 짐과 바바라가 죽어서도 포도밭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기 때문일까요. 이제 짐과 바바라는 와이너리 이름처럼 하얀 비둘기로 다시 태어나 평생을 가꾸던 포도밭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겠죠. 어느 가을날 포도수확철에 하얀 비둘기 두 마리가 사이좋게 와이너리 창문가로 날아와 앉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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