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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개천용’,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

입력 : 2021-09-18 22:33:39 수정 : 2021-09-18 22: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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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에 거주하는 시그런 시시씨(오른쪽)와 그의 아들 카이씨가 거실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시시씨 가족과는 스웨덴인이 생각하는 ‘사회 이동성’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지난 7월 말부터 약 두 달 동안 ‘공정한 나라의 계층사다리’ 시리즈를 진행했다. 최근 들어 한국의 ‘개천용 담론’, ‘계층 사다리 붕괴론’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더욱 높아진 상황. 계층이동의 학술적 용어인 ‘사회 이동성’이 높은 나라의 특성을 살펴보고, 우리 사회가 벤치마킹할 지점을 찾아보고자 했다.

 

마침 지난해 최초로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전 세계 사회 이동성 지수(Global Social Mobility Index)에 따르면 조사 대상 82개국 중 최상위 4개국은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이었다. 북유럽 국가가 휩쓸었다. 한국은 25위, 미국은 27위에 그쳤다. 북유럽 4개국을 한 그룹, 한국과 미국을 다른 한 그룹으로 묶어 비교했을 때 무엇이 가장 큰 차이점일까. 그 키워드를 찾아 우리 사회에 접목한다면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계층사다리를 다시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 이동성이 높은 국가들의 공통점은 ‘공정하고 신뢰도가 높은 사회’였다.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높다는 건 우리가 어떤 배경을 갖고 있든 노력과 의지만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즉 공정하다는 체감이 잘 되는 사회인 것이다.

 

스웨덴 현지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느낀 또 다른 점은 ‘사회 이동성이 높은 나라일수록 오히려 계층 상승의 열망이 덜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설은 어떤 진실을 내포할까.

 

스웨덴 하면 빠질 수 없는 단어 ‘라곰’(Lagom)이 떠올랐다. 소박하고 균형 잡힌 생활과 공동체와의 조화를 중시하는 삶의 경향성을 말한다.

 

이들에게 삶의 포커스는 경쟁에서 승리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함으로써 남들보다 많은 것을 누리는 데 있지 않았다. 승부욕이 강하고 사회적 성공을 강하게 원하는 일부 사람을 제외하면 많은 이들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집중한다. 타인과의 비교보다는 자신의 기호대로 온전히 살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확실히 선택지가 넓어진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경쟁사회, 승자독식의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서는 행복하게 사는 선택지가 훨씬 제한적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이기에 그만큼 빠른 성장을 이뤄냈지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소모되고 피폐해졌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행 과제는 일단 ‘공정사회’의 회복이다. 사회 이동성이 높은 공정한 국가들은 ‘내가 원한다면’ 노력과 의지를 발휘해 계층 상승이 가능한데, 공정함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이 선택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후엔 계층 상승을 꼭 하지 않아도 모두가 마음의 여유를 갖고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사회로 점차 나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층 상승 누구든 가능한 사회…다만 굳이 원하지 않는다?

 

스톡홀름에서 만난 시그런 시시씨 가족은 스웨덴에서 중산층에 속한다. 시시씨 부부는 둘 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하며, 스톡홀름 시내에 정원이 딸린 꽤 넓은 집도 소유하고 있다. 올해 28세인 아들 카이씨는 스톡홀름의 유명 경영 전문 대학인 스톡홀름 경제학교(Stockholm School of Economics)에 들어갔다.

 

시그런씨의 남편인 피터씨는 스웨덴의 계층 이동에 대해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시골 출신인 그 역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 세대보다 계층 상승을 한 사례다. 상류층 자제들도 들어가기 쉽지 않다는 스톡홀름 경제학교에 합격한 카이씨 이야기를 하며 피터씨는 아들의 계층 상승 가능성을 은근히 기대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계층 상승을 꿈꾸는 이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에 가깝다. 굳이 온 힘을 다해 사다리를 오르지 않아도 기본적인 삶의 질이 보장되는 데다, 애초에 삶의 목적 자체도 ‘적당히, 균형 있게 사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서열화 되어 남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나의 취향과 적성을 살리며 살고 있는지를 더 중요시한다. 전자보다 후자는 더 다양한 선택지를 보장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어떤 계층에 내가 속해 있든 결과적인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씨는 “스웨덴에서는 상류층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그다지 높지 않다. 별로 실익이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이런 삶을 원하는 이들 자체가 적기 때문에 자연히 가치가 덜 부여된다. 또한 “가진 것이 많다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문화도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우러러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시그런씨는 “여기서는 누군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한다면 굉장히 천박하다고 인식된다”고 설명했다. 

 

레나 벵나루드 예테보리대 교수(젠더학)도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그는 “어떤 계층에 있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계층이동보다 ‘어떤 일이 나에게 가장 흥미 있고 좋을까’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벵나루드 교수는 “스웨덴에도 사교육, 비싼 사립 학교 등이 있긴 하지만 정말 흔하지 않고 보통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며 “어느 위치까지 올라가느냐보다는 진정한 자아 실현에 무게를 둔다”고 설명했다.

 

지위가 올라가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스웨덴식 피카(FIKA·바쁜 하루 중 시간을 내어 갖는 커피 타임) 문화는 무한경쟁보다 적절한 쉼표를 강조하는 이곳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Susanne Walström(imagebank.sweden.se)

 

◆최근 벌어지고 있는 계층 간 격차엔 ‘경고등’

 

린다 릴 말뫼대 교수(사회학)는 스웨덴의 높은 사회 이동성의 비결로 교육 기회가 평등한 것, 정부가 개인의 기업가 정신을 장려한 것 등을 꼽았다. 릴 교수는 “개인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벌 수 있고, 계층 이동도 가능하다고 정부가 독려한다”며 “이러한 믿음을 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개인과 사회, 국가 모두의 발전에 이득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그는 “최근엔 스웨덴에서도 계층 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자녀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최대한 지원해주고 앞서갈 수 있도록 하려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역시 계층 이동의 바람이 생겨나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이는 계층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최근 스웨덴 사회의 흐름과도 무관치 않아 보였다.

 

릴 교수에 따르면 계층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1980년대에 정부가 교육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다. 당시 목표는 절반 이상의 국민이 대학에 진학하도록 하는 것. 그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는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2021년 현재 상황으로 보면 스웨덴 내에서 계층 간 격차가 다시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릴 교수는 “1980년대 이전 상황으로 오히려 좀 후퇴한 것 같다”며 “자본주의에 익숙해지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된 이들이 점점 더 독자적인 길을 가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사회·경제적 청년 단체 헬라말뫼의 니콜라스 루나바 대표의 생각도 비슷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불평등 지수가 가장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시점이란 것이다. 루나바 대표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이곳이 상대적으로 계층 간 더 평등하겠지만 불평등 정도가 상승하는 속도로는 스웨덴이 더 빠른 것 같다”고 밝혔다.


스톡홀름·말뫼=글·사진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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