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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병과 상투, 시신 재배치’… 서양사진사가 조선을 왜곡한 방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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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5-13 12:14:00 수정 : 2021-05-13 09: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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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150주년 기념 학술대회 개최
이경민 사진아카이브 대표 당시 사진 분석
“선택적 기록·연출로 왜곡된 동양 표상 만들어”
신미양요 당시 약탈한 ‘수자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미군 병사들. 세계일보 자료사진

1871년, 미군 함대가 조선 강화도를 침략했다.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00여 명. 미군은 통상을 요구했고, 조선정부는 즉시 거절했다. 19세기 본격적인 접촉을 시작한 동서양이 흔히 그랬듯 양측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미군 함대는 40여 일만에 물러났으나 당시 조선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광성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만 조선군 사망자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53명에 달했다. 반면 미군은 3명 전사, 10여 명 부상에 불과했다.

 

제국주의의 압도적 무력과 조선의 무력함은 전리품인 조선의 군기(수자기·帥字旗)를 배경으로 미군 병사들이 찍은 당시 사진으로 명확히 드러난다. 신미양요 당시 미국 콜로라도호에 동승한 이탈리아계 종군사진가 펠리체 베아토가 찍은 것이다. 서양 사진사에서 ‘최초의 전쟁사진가’로 통하는 그는 신미양요의 전 과정을 찍은 50장 정도를 묶어 사진첩을 펴냈다. 사진첩은 ‘콜로라도 함상의 수자기’ 뿐만 아니라 “당시 서양인들이 (동양·동양인을 보며 즐겼던) 이국취미를 자극하는” 사진들로 채워졌다. 심지어 전사자들을 임의로 화면 안에 배치하는 ‘시체놀이’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서양인이 카메라에 담은 최초의 조선 풍경, 조선인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는 베아토의 사진에는 당시 서양이 동양에 대해 가졌던 멸시와 조롱, 우월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기념해 전쟁기념관·어재연장군 추모 및 신미양요 기념사업회가 14일 주최하는 학술회의에서 이경민 사진아카이브 대표가 베아토의 사진을 분석해 쓴 ‘제국의 렌즈로 본 신미양요’는 이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9세기 중·후반 아시아, 아프리카로 진출한 유럽인들은 수많은 사진기록을 남겼다. 서양사진 역사에서 ‘탐험의 시대’, ‘새로운 소통의 시대’로 규정되기도 하지만 “선택적 기록과 연출을 통해 왜곡된 동양에 대한 표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좋았다. 신미양요 이전에 크림전쟁, 세포이항쟁, 아편전쟁, 시모노세키전쟁 등을 기록한 베아토는 당대를 대표하는 사진가 중 한 명이었다.

미군 함대를 찾은 조선인 관리의 모습. 출처=게티뮤지엄

베아토의 조선행도 이런 흐름 중의 하나였다. 일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다 미군과 동행할 기회를 얻은 그는 1871년 5월 26일부터 6월 12일까지 조선대표단 방문, 초지진 전투, 광성보 전투 등 신미양요의 주요 단계를 기록하며 전투 상황과 포로로 잡힌 조선군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대표는 먼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미군 함대를 찾은 조선인 관리 중 한 명인 인천부 아전 김진성의 사진에 주목했다. 사진 속 김진성은 갓과 두루마리를 벗고 맥주병을 한 아름 끌어 안은 채 미소를 짓고 있다. 이 대표는 “아무리 하급 관리라고 해도 관직에 있는 사람이 외국인과의 교섭 자리에서 입을 옷차림은 아니다”며 “베아토가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베아토의 의도’란 미군 병사들이 먹고 버린 맥주병을 끌어안은 조선인을 통해 “문명과 야만, 근대와 전근대의 대비가 일어나면서 (서양인들에게) 인종주의에 입각한 문명화에 대한 사명감을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맥주병 아래로 쥐고 있는 미국 주간지와 담뱃대의 대비도 뚜렷하다. 당시 담뱃대는 “서양인들에게 (동양인이 가진) 게으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굳이 갓을 벗긴 것은 ‘비위생의 코드’로 치부되었던 상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위생관념은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했는데 중국의 변발, 일본식 상투 ‘존마게’, 조선의 상투 등 머리 모양은 동양의 비위생를 대표하는 코드였다. 이 대표는 “상투와 긴 담뱃대는 개항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남성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반복 표상되었다”고 설명했다.  

수습되지 않은 조선군 전사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출처=게티뮤지엄

베아토의 사진에 두드러지는 또 다른 양상은 수습되지 않은 조선군의 시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상품화된 전쟁사진 속에 적극적으로 구현된 ‘구경거리’였다. 사진첩에서 시신은 전투 개시 첫 날인 1871년 6월 10일에 찍은 ‘초지돈대를 점령한 미군’ 사진에서였다. 이튿날 벌어진 광성보 전투를 기록한 사진에는 시신의 모습을 연출한 듯한 흔적도 발견된다. 같은 위치에서 촬영한 사진이 두 장 있는데, 한 장에서는 시신이 모로 누워 있으나 다른 하나에서는 하늘을 보고 누워 있다. 아편전쟁 당시에 베아토가 찍은 ‘함락된 다구포대’ 사진에서도 확인되는 방식이다. “(시신의) 얼굴을 보이게 해 전쟁의 참혹성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패전국에 굴욕감을 배가하기 위한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베아토는 1857년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의 현장을 촬영하며 영국군에 패해 죽은 반란군의 유골들을 마당에 흩뿌려 사진을 찍은 전력이 있다. 

 

이 대표는 “이러한 모습으로 전투 장면이 재현된 것은 베아토의 사업적 욕망과 정벌군으로 한국에 온 미국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며 “전쟁사진가로서 베아토의 이력과 명성은 결국 ‘타자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상품화한 것에 대한 서양인들의 암묵적 동의와 지지 하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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