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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에 배신당한 채 벼랑끝 내몰린 남자… ‘제주도의 시린 밤’

입력 : 2021-04-08 20:29:50 수정 : 2021-04-09 16: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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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훈정표 누아르 새 영화 ‘낙원의 밤’
‘수레에 맞선 사마귀’ 행동대장 태구
결말 암시하는 시작… 맘 편히 몰입
“태구야. 이제 그만 계산 끝내자”
재밌지만 잔혹한 마 이사 차승원
어눅하고 슬퍼보이는 섬의 풍광
배경이 된 제주도는 배수진 상징
조직의 타깃이 된 남자와 삶의 끝에 서 있는 여자의 이야기를 담은 ‘낙원의 밤’은 박훈정 감독이 작심하고 펼쳐낸 감성 누아르다. 뚜렷한 색깔과 분위기로 서정과 낭만을 담아내는 ‘박훈정표 누아르’를 스크린 가득 풀어놓는다. 딜라이트 제공

‘이게 박훈정표 누아르야!’

새 영화 ‘낙원의 밤’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이렇다.

사실 한국에서 누아르를 찍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할리우드와 홍콩 영화가 이미 많은 것을 보여준 데다 승부수로 띄우는 총기사용은 종종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훈정 감독은 이를 잘 수행해낸다.

그의 대표작 ‘신세계’(2012)가 범죄조직 내부 이야기라면, ‘낙원의 밤’은 조직에 배신당한 채 목숨을 위협받는 자의 처절한 상황을 깊이 있게 그려낸 감성 누아르다.

“당랑거철이라고…, 수레바퀴 막겠다고 나선 사마귀…. 하긴, 그 사마귀가 파이팅은 있지.”

초반부 범죄조직의 행동대장 태구(엄태구)가 듣게 되는 경고다. 태구 역시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걸 암시한다. 박 감독의 자신감이다. 결과의 일부를 미리 짐작하게 하고 시작해도 종반까지 극을 끌어가는 연출의 힘은 어느 한순간도 줄지 않는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사전 풀이는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힘은 헤아리지 않고 강자에게 함부로 덤빔’이다.

빠져나가거나 돌아갈 길이 없다. 영화의 배경으로 제주도를 택한 것은 배수진을 친 거나 마찬가지다. 큰 장을 열었다가 흔적 없이 싹 치워버리듯, 이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속편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전부 소진하면서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를 쓴 작가 출신답게 이야기를 잘 짜놓았지만,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보다는 박훈정 누아르의 색깔과 분위기를 즐겨야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거듭 ‘이것이 바로 박훈정 누아르야’라고 곳곳에서 일깨우고 나선다. 그런 만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눈과 감정을 맡겨놓은 채 맘 편히 그냥 보면 된다.

태구는 하루아침에 사랑하던 조카와 누나를 잃는다. 사우나에서 만난 상대 조직 북성파 두목(손병호)에게 복수한 뒤 홀로 운전하며 밤인지 새벽인지 모를 빈 도로를 달리는 장면부터 당장 고독하고 외로워 보인다.

전반에 깔린 슬픈 분위기, 능숙한 운전과 거친 카체이싱, 담배를 뻑뻑 빨아대거나 후우 길게 내뱉는 모습 등 누아르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온다.

해외여행을 떠날 때 비행기 타러 가는 길과 공항에서 수속 밟는 과정이 더 신나는 것처럼 영화는 시작에서 딱 반이 흐를 때까지 이 같은 기분을 유지한다. 누아르 영화답게 후반부 기대감을 꾸준히 키워나간다.

태구는 러시아로 밀항하기 위해 잠시 제주도에 몸을 숨긴다. 제주도에는 무기상을 하는 삼촌과 함께 사는 재연(전여빈)이 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재연은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행동에 거침이 없지만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태구를 쫓아 제주도에 내려온 북성파 2인자 마 이사(차승원)는 재밌지만 무서운 인물이다. 의리를 중시하면서도 잔혹하고 현실적이다. 태구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태구야. 이제 그만 계산 끝내자. 저 양아치 너 죽을 때 데려가게 하고 싶었는데, 저 새끼가 죽으면 우리가 좀 귀찮아져.”

영화의 재미는 강단과 근성을 앞세운 차승원이 배가시킨다. 그의 등장 이후 극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절제된 유머로 두 얼굴의 마 이사가 지닌 섬뜩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아도 상황을 긴장시키는 아우라가 위기를 고조시킨다.

마 이사 캐릭터에 대해 차승원은 “직접 피묻히는 일은 피하려 하고 치졸하게 보이는 것은 싫어하는 자신만의 원칙을 고집하면서 본인의 컨트롤 아래 모든 것을 두려는 인물로 콘셉트를 잡았다”고 귀띔했다.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지닌 제주도 배경 또한 한 명의 주인공 역할을 거뜬히 해냈다. 절경의 섬에서 세상의 끝에 내몰린 두 사람, 비극의 대비가 극대화된다. 김영호 촬영감독은 제주의 풍광을 슬퍼보이도록 찍었다. 아름다운 장면인데 거칠다거나 차분하다가 갑자기 격렬해지는 식으로 상황을 묘사했다. 해가 뜬 직후나 해가 지기 시작하는 ‘매직 아워’와 흐린 날만을 골라, 자연의 어눅하고 서글픈 분위기에 캐릭터의 상황을 대입시켰다.

울창한 푸른 숲길을 달리는 자동차를 상공에서 내리 찍은, 마치 자동차 광고(CF)를 보는 듯한 기시감 높은 장면도 나온다.

후반부 감정을 배제한 채 휘몰아치는 액션은 압권이다. 박 감독은 이들의 싸움을 개싸움처럼 포착해, ‘형님세계’를 그다지 폼나게 그리지 않고, 오히려 덧씌워져 있던 환상을 벗겨버린다.

쇳소리에 가까운 엄태구의 낮은 목소리는 영화의 무게를 잡는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거물’로 성장했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 9일 넷플릭스 개봉.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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