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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징비록’에 나온 얘기다. 인조·고종과 함께 조선의 3대 무능한 왕으로 꼽히는 선조. 왜군에게 평양성이 함락되자 국경을 넘어 요동으로 피난할 것을 청한다. 대신들이 반대하자 “사방이 왜적인데, 반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오늘날 이 치욕은 그대들의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는 유체이탈 화법은 가히 압권이다.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현상. ‘유체이탈’의 사전적 의미다. 육체와 영혼을 자유자재로 분리할 수 있는 일종의 초능력인데, 여기에 ‘∼화법’이 붙으면 의미는 180도 달라진다. 자기 얘기인 줄 알면서도 자신은 아무 상관없는 듯 발뺌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어법이다. 우리 말의 ‘사돈 남 말 하다’나 한때 유행한 ‘사오정 시리즈’와도 유사하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런 화법의 대가였다.

지금 문재인정부도 오십보백보다.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당부하고 뒤에선 ‘윤석열 찍어내기’에 올인했다. 거대 권력기관 공수처를 만들면서 ‘정치적 중립’을 약속해놓고 ‘자기 사람 심기’에 열중했다. 국토교통부 장관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 재임 시절에 벌어진 LH 직원의 신도시 땅 투기 의혹에 반성은커녕 산하기관장들을 불러 “청렴도를 높여야 한다”며 군기를 잡았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후배 판사의 사표 반려를 두고 거짓말을 하고도 유체이탈식 사과로 비난을 자초했다. ‘거짓 명수’ 별명은 덤이다. 이것뿐인가. 여권은 조국 전 법무장관 딸의 입시 의혹에 대한 학부모·수험생의 분노를 ‘입시제도’ 탓으로 돌렸다. 공정·정의는 온데간데없고 대통령은 ‘마음의 빚’ 운운했다. 부동산값 폭등은 ‘과거 정부’ 문제고, 성추문 보궐선거 출마엔 ‘집권당 책무’만 강조했다. 북한 구애에 몰두하는 통일부 장관은 ‘우주의 기운’까지 끌어모으겠다고 난리다.

유체이탈 화법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일시적으로 책임을 모면하는 데 유용할진 몰라도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국정 책임자의 말은 ‘비수’처럼 꽂힌다. 국민의 정신 건강을 해치고 유권자·지지층에 배신감을 준다. 글이나 말 대신 마음으로 진실을 전할 순 없을까.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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