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어른도 무서워요?”… “별을 보면 괜찮아지더라고”

입력 : 2021-03-04 20:53:28 수정 : 2021-03-05 10:50:5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영화 ‘밤빛’
산채서 삶의 마지막 기다리던 희태
오래전 헤어진 아내의 편지를 받아
아들 민상과 2박3일간 낯설은 동행

눈 쌓인 겨울산 속살과 장엄함 압도
부자간의 교감이 짙은 여운을 남겨
‘밤빛’은 산속에 홀로 살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던 희태(송재룡)가 아들 민상(지대한)과 처음 만나 2박3일을 동행하면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다.

누군가 잔잔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서정시(詩)에 흠뻑 취한 느낌의 영화다. 대사가 드문 영화는 오로지 배우의 연기만으로 시편들을 뽑아내 여기저기 흩뿌려 놓는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눈 쌓인 겨울산의 속살과 자연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름 산비탈 바람을 울창한 넝쿨에 일렁이는 빛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마다 관광엽서 같은 장면들이 펼쳐진다. 관객들은 장엄하고 청량한 풍광에 빠져들거나 쉽사리 압도당하고 만다.

산채에서 홀로 살아가는 희태(송재룡)는 어느 날, 오래전 헤어진 아내가 보내온 한 통의 편지를 전해 받는다.

흰 눈 덮인 산정과 탁트인 들판을 오가며 얼음을 깨서 물을 떠오고 약초와 버섯을 캐 내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희태가 오늘 하루도 주어진 생을 정리해 나가고 있다. 영화는 27분 동안이나 대사 한마디 없이 희태의 겨우살이를 묵묵히 지켜본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 계절도 이미 여름이다. 시골 기차역 플랫폼에 선 희태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들 민상(지대한)이다. 첫 만남. 하지만 둘은 그저 쳐다만 보다가 간격을 둔 채 역을 걸어 나온다.

(역전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비비던 희태가 불쑥 무심한 경상도사투리로 묻는다.

“지금 방학이가. 학교는 어딘데?”

“영문중학교요.”

“오느라 힘들었제?”

“아니요. 별로.”

두 사람이 도로길을 지나 숲속 길로 들어선다. 오르막길을 한창 걷던 희태는 민상이 잘 따라오는지 가끔 돌아보곤 한다. 어느새 민상의 가방이 희태의 등에 매달려 있다. 정상에 오른 부자 아래로 운무에 가려진 주변 산들이 힐끗 내려다보인다.

“응. 엄마. 잘 왔어. 지금은 산이야. 별로 안 힘들어. 응. 알겠어.”

민상은 희태만큼이나 무뚝뚝해 보인다. 짧게 통화하고 전화를 끊는다. 희태를 바꾸어 주지도 않는다. 희태 또한 통화를 바라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날 밤 둘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한다. 방 안 천장에 야광 별들이 잔뜩 붙어 있다.

“이거 왜 붙이셨어요?”

“무서울 때가 있어.”

“어른도 무서워요?”

“무섭지. 무서울 땐 별을 보면 괜찮아지더라고.”

새벽에 먼저 깬 희태가 잠든 아이의 이불을 여미어 준다. 아침이 되자 민상은 희태를 따라 나선다. 산 속을 돌아다니며 야생 버섯을 따거나 약초를 캔다. 간단히 싸온 주먹밥도 나눠 먹는다.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첫 만남, 그리고 2박3일간의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서로의 인생에 가장 강렬한 기억과 그리움을 남길 아름다운 동행을 담아낸다. 이미 혼자가 익숙해진 아버지 희태, 그런 희태의 일상에 불쑥 찾아온 아들 민상의 미묘한 감정선과 관계가 영화를 끌어 간다. 함께 길을 걷고, 숲속과 산을 다니면서 어색한 관계 사이로 흐르는 아버지와 아들의 교감이 객석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돌아간 민상을 떠올리던 희태는 오밤중에 산정에 올라 아들과 함께 앉았던 자리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을 올려다본다. 죽음을 앞두고 별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까. 새벽이 오면 어느새 겨울 장면이다. 민상이 홀로 정상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장엄한 자연은 그대로인데, 인간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뀌었다. 민상이 희태의 환생처럼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산은 단순히 극 중 배경이 아닌 독립적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초록이 가득한 여름, 눈부시게 빛나는 설산의 극단적 대비와 아름다운 절경을 온전히 담아낸 미장센은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김보람 촬영감독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희태와 민상을 보듬어 주는 다양한 ‘밤빛’들을 오롯이 담아내,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열혈스태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무영 감독은 “국토의 70%가 산인 한국에서 산은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기 이전에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 역할을 해냈다”고 설명한다. 서로 닿을 수 없는 여름과 겨울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산을 삶과 죽음의 중간쯤인 공간으로 설정해 아버지와 아들의 마지막 교감을 관객들이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울러 다양한 시점숏을 효과적으로 연출해 눈과 마음을 동시에 앗아가는 압도적 미장센을 완성했다.

송강호, 문소리, 이성민, 문성근 등이 거쳐 간 극단 차이무 출신의 송재룡은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 ‘바람난 삼대’ 등을 통해 얼굴을 알렸다. 스크린과 TV로 보폭을 넓힌 그는 ‘밤빛’에서 희태 역을 맡아 눈빛, 표정, 몸짓만으로 대부분의 감정과 서사를 전달하며 객석을 흔들어 놓는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