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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나태주 "인생도 후반부에 변용과 반전 있어야 성공"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입력 : 2021-03-01 07:30:00 수정 : 2021-03-01 15: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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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풀꽃' 전문) 겨우 24자에 불과하지만 강렬한 메시지의 대표시 '풀꽃'을 설명하던 시인 나태주는 ‘너도 그렇다’는 대목의 ‘변용과 반전’을 설명하다가 자신의 인생 쪽으로 급하게 핸들을 틀었다. “시가 좋아지려면 변용과 반전이 있어야 하듯이, 인생도 성공하려면 후반부에 변용과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너도 그렇다’는 부문은 변용과 반전인데, 제 인생도 그렇습니다. 대단한 회심은 아니지만, 60세 이후 시 '풀꽃'을 쓰고 나서 제 인생에 변용과 반전이 있었어요. 60세 이전은 ‘자세히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의 삶이었다면, 60세 이후부터는 ‘너도 그렇다’로 바뀐 삶을 살려고 했어요. 너를 생각하며 살려고 노력한 것이죠.”

 

나 시인은 “그의 얘기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며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회심 이야기를 꺼냈다. “톨스토이도 50세 즈음, 인생의 변용과 반전이 있었어요. 자기만을 위해 살았던 그가 50세 이후부터 남도 위해 살겠다고 생각했지요. 톨스토이는 이때 회심을 하고 『참회록』을 쓰고 이전과 다른 삶을 30년간 살게 된 것이지요.”

 

시 '풀꽃' 이후 그의 시도, 시인의 삶도 바뀌었다. 인터넷에서 인기 있던 시들을 모은 시선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는 2015년 출간 이래 50만부 이상 팔렸다. 2019년 1월 한 달 동안 무려 10만부가 팔렸고, 지난해엔 시집으로 이례적으로 교보문고 종합 순위 2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현재 일본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 해외에서도 속속 번역 출간되고 있다. 시 '풀꽃'이 인기를 끌면서 그의 다른 시집이나 시선집도 불티나게 팔리고 재편집돼 출간된다. 바야흐로 ‘나태주 신드룸’이다.

 

“변용과 반전이 나와야 할 시기는 장년이나 노년기입니다. 지금까지 실수하고 남에게 신세지고 잘못해온 것을 바탕 삼아서 장년기나 노년기에 이전처럼 살아선 안된다고 자각해 변용과 반전이 있어야지요.”

 

“졸렬한 인간인데,” 그는 자신의 커리어를 확인하는 기자에게 일일이 설명해 주면서 쉼 없이 달려온 자신의 삶과 자신을 보듬어준 세상에 감사해 했다. ‘졸렬’이라는 단어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이럴 수가 없어요. 졸렬한 사람인데,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 시인을 지난 1일 공주 ‘풀꽃문학관’에서 만났다. 사진을 몇 컷 찍은 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앉은뱅이 책상이 가운데 놓여 있고 그 주위에 시집이나 책들이 널려 있었다. 그는 손수 차를 꺼내왔다. 찻잔을 두 손으로 받아들자, “와인 잔을 잡고 받으면 포도주이고, 놓고 받으면 와인”이라며 “따르는 사람은 조심해 따르고 받는 사람은 당당하게 대놓고 받는다”고 다도를 수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지구적으로 보면, 그 동안 인간이 막 살아와서 이런 게 오지 않았을까요. 코로나19는 에이즈처럼 처음 짐승과 동물의 바이러스였는데, 이것이 경계를 넘게 한 것 자체가 인간의 잘못 아니었을까요. 지구 환경이 더 나빠졌고, 인간의 삶이 순결하지 못하다는 얘기죠. 그런 측면에서 하나는 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죠.(시간이 지나면 축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는 벌써 축복을 받고 있지요. 우린 눈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어요. 은행에 갈 때 은행 직원들이 우리 눈을 보고 얘기하지요. 경청하는 문화도 생겼어요. 말이 잘 들리지 않으니까 경청하는 태도가 생겼지요. 우울하고 따분하고 실의도 있지만, 사람을 덜 만나면서 자기 인생을 많이 반성하고 좀더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기도 했어요. 결정적인 건, 그 동안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 일상생활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100% 체험하는 우리가 됐지요. 아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상당히 오랫동안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결핍의 축복이 올 거예요. 다만 사람들이 직접 만나지 못하면서 많은 것을 부치기 때문에 택배 회사 사람들이 결딴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인권 침해나 과로로 인해 죽지 않도록 해주는 게 정부의 역할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 얘기로 들어가서, 시 '풀꽃'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1995년부터 풀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한 5, 6년 그렸을까요. 초등학교 교장을 하던 2002년쯤 아이들과 풀꽃을 그렸는데, 아이들이 풀꽃과 닮지 않게 그리더군요. 잔소리를 했어요. ‘풀꽃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그리라’고 가르쳤지요. 그러고 봤더니, 아이들이 풀꽃이더라고요. 제가 그리는 풀꽃도 풀꽃이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도, 풀꽃답지 않게 그리는 아이들도 모두 풀꽃이었어요. 말을 잘 듣지 않고 예쁘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봐야 할까 생각하다가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장미나 튤립, 백합 등 아름다운 꽃을 놔두고 왜 하필 풀꽃을 노래한 겁니까.

 

“풀꽃은 존재감이 분명하지 않는 어떤 존재, 크기나 의미나 돈 등으로 따졌을 때 대단하지 않는, 버려질 수도 있는, 자존감이 매우 떨어진 존재를 의미하지요. 그런 존재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게 됩니다. ‘자세히, 오래’가 중요하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자세히 오래 보지도 않으면서 예쁘고 사랑스런 존재를 바란 것이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예쁘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자세히 오래 보지 않아서 그렇지요.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도 예쁘고 사랑스럽게 됩니다. 모든 존재, 모든 천지만물이 다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그런 취지이죠.”

 

―'풀꽃'에서 ‘너도 그렇다’라는 대목은 놀라운 반전인데요.

 

“변용과 반전이죠. 내가 ‘너도 그렇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도 저에게 ‘너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결국 ‘너도 그렇다’는 건 ‘나도 그렇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뻐지고 사랑스러워지는 건 관계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예쁘고 사랑스런 게 아니라, 네가 볼 때 내가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풀꽃'을 쓰고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제 시가 독자들의 손에 들려지기 시작한 것이죠. 쉽지 않는, 놀라운 일입니다.”

평론가 반경화는 이 대목에서 “풀꽃의 삶을 관찰하고 인식할 때, 시인은 그 풀꽃과 하나가 될 수 있다”며 “만물일여 우아일체(萬物一如 宇我一體)의 ‘시인 정신의 승리’”라고 호평한 바 있다.

 

―또다른 시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도 담겼는데, 사랑은 왜 서툰 것인가요(시는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고 노래한다).

 

“보청기는 소리를 증폭시켜주기에 보청기를 끼면 시끄러워서 못들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소리를 듣는다고 해요. 지금 여기에 소리가 굉장히 많지만, 우리는 서로의 얘기 빼곤 조용하다고 생각하지요. 인간은 원래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데, 여기에 더 특별히 들어간 게 사랑입니다. 서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능숙한 것이 아니죠. 능숙하면 간음입니다. 사랑은 처음이기 때문에 같은 여성을, 남성을 사랑하더라도 서투른 것이지요. 예를 들면, 한 달이나 1주 정도 출장 다녀오면 배우자가 달리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늘 퍼져 있고 침 흘리고 자는 배우자는 사랑이 아니라 그건 그냥 생활일 뿐이죠. 사랑은 늘 서투른 것이고, 짝사랑이며, 늘 첫 사랑이지요.”

 

―시들이 젊은이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습니다(처음에는 반응이 특별하지 않다가 조금씩 알려지며 스테디셀러가 되더니 ‘방탄소년단(BTS)’의 RM, 걸그룹 ‘블랙핑크’의 ‘지수’, 박보검 등 인기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게 알려지면서 폭발적으로 바뀌었다).

 

“인기를 바라고 쓴 게 아니라 제 자신을 건지기 위해서 씁니다. 내 마음이 편하고 내가 좋아지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이죠. 나를 살린 결과가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하면 감사하겠습니다. 덕을 본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 시대에 여전히 책이 나간다는 건 인터넷, 디지털이 있기 때문도 있을 겁니다. (젊은이들에게 왜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누구나 다 아는 일상적인 얘기를 쓰면서도 나태주식으로 단순하게 쉽고 짧게, 명징하게 써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용이나 대상은 굳이 특별하지 않는 것, 다 알고 있는 것을 쉽고 짧게 분명하고 단순하게 써서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시에서 중요한 건 생활과 인생, 삶 등의 발견이지요. ‘아 그렇구나’ 하는, 내 나름의 ‘유레카’를 씁니다. 사람들이 자존감이 떨어지고 불행, 우울, 소외를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반전해주니까 ‘나도 그렇구나’라고 하지 않을까요. 저의 시와 시집 제목에는 ‘너(네)’가 많이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시 '꽃을 보듯 너를 본다'처럼, ‘너는 꽃이다’는 말을 에둘러 하지만 ‘너는 하류가 아니다’ ‘너는 귀하고 아름답다’라고 강력하게 얘기하는 것이지요. ‘나를 꽃이라고 불러주네’ ‘나를 꽃이라고 불러준 사람이 나태주네’, 그래서 사람들이 ‘시집을 사주자’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제 나름의 해석입니다.(웃음)”

 

‘너(네)’를 설명하던 그는 잠시 일어서더니 서재에서 시집을 몇 개 들고 왔다. 『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 속 꽃밭이다』 『지금도 네가 보고 싶다』 『걱정은 내 몫이고 사랑은 네 차지』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등 시집 제목에 모두 ‘너(네)’가 들어가 있었다.

 

“시에 ‘너(네)’가 들어가면 무슨 일어나느냐 하면 책이 잘 팔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제 책은 ‘너(네)’가 들어가서 많이 팔린 것 같아요. 독자인 너를 얘기하기 때문이지요. 부부생활을 잘하기 위해 아내에게 잘해야 하고 우정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선 친구에게 잘해야 하듯이, 인생을 잘 살려면 너한테 잘해야 하는 것이죠.”

 

1945년 충남 서천군 기산면 막동리(幕洞里) 출생한 나 시인은 1963년 공주사범학교 졸업한 뒤 1964년부터 43년간 교단에 섰다가 2007년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문학적으론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라이프 스토리를 들려주시죠.

 

“아버지 어머니가 생존해 있었지만, 어렸을 때 외할머니의 집에 ‘던져져서’ 살았어요. 외할머니가 36세의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됐지만 개가를 할 수 없어 4살의 제가 외할머니와 살아야 했지요. 외할머니는 16세 때 어머니를 낳았고, 어머니는 19세 때 다시 저를 낳은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외할머니의 집에서 자랐어요. 그때 저는 외로움과 가정적인 결핍 같은 것을 알게 됐고,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인생이 불행에 던져졌고, 불행이 나의 일생을 바꿔놓았지요. 12세에 저의 운명이 결정됐고, 시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어요. 시인일 수밖에 없는 유전자랄까 자양분이 뭉쳐져 있었던 것이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시의 세계로 들어온 것인가요.

 

“어느 순간, 시를 써야겠다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각했고 누구의 권유나 문학적인 배경도 전혀 없이 시를 썼어요. 16세 때인 고등학교 1학년 때, 동급생 여자가 예뻐서 연애편지를 썼는데, 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없었지요. 전달할 수 없는 시대였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마음을 전달할까’ 하다가 내 마음이라도 표현해야 살 것 같아서 시를 쓰게 됐어요. 제 평생 하고 싶었던 것은 ‘내 마음을 내 마음같이 표현하는 것’인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표현하면 엉뚱한 것이 되곤 했어요. 어려운 숙제였어요. 내 마음을 내 마음 같이 표현하는 것이 저의 문학적 화두가 됐어요. 60년이 걸렸어요. 지금도 잘 하려고 노력하지만, 잘하지 못합니다.”

 

그는 1973면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펴낸 이후 『막동리 소묘』,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빈손의 노래』 등 40권 이상의 창작시집을 포함해 시선집과 산문집 등 100여권의 책을 펴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주십시오.

 

“저의 전반기 문학은 ‘정(定)의 문학’이었어요. 선배들이나 문학사에서 좋아하던 시인들의 좋은 자산을 받아들이고 수용해 제 것으로 소화하는 단계였지요. 1971년 등단부터 1985, 6년까지의 시기로, 이때 정점에 있던 작품이 바로 『막동리 소묘』입니다. 젊은 시절, 저는 노인네처럼 시를 썼어요. 왜냐하면 시의 원본이 고전에 있었고 김소월, 박목월, 윤동주, 서정주 등 선배 시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음 단계는 ‘파(破)의 문학’이었어요. 시인으로서 망가지고 시도 망가지는 단계였지요. 완전히 혼돈이고 카오스였고, 바닥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이것 역시 한 15, 6년 정도 이어졌지요(이 시기, 그의 대표작은 바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의 ‘시’였다). 한 3, 40년쯤 지나서 이전 단계를 딛고 마침내 ‘이(異)의 문학’으로 나아갔습니다. 시 '풀꽃'부터 이의 단계를 봐야 하겠지요. 듣도 보도 못한 어떤 것, 다른 사람도 다 알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는 것을 쓰는 단계였어요. 다 아는데, 그렇게 안한 것을 끄집어냈지요.”

 

이 대목에서 ‘다 알지만 모르는, 듣도 보도 못한 시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위해 그가 머리를 바짝 붙였다. “어디 볼까요”라고 질문을 던졌다. “시의 제목이 시의 내용에 들어간 시가 보다 나은 시일까요, 제목이 시 안에 없는 시가 진화한 시일까요.” 기자가 “제목이 시의 내용에 없는 시가 아닐까요”라고 답하자, 그는 “바로 그것”이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 이육사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박목월의 시 '나그네' 등을 보면 시의 제목이 시의 본문 안에 직접적으로 표현되거나 반영돼 있지요. 하지만 '풀꽃'은 제목이 시 내용에 들어가 있지 않아요. 보통 시의 제목이 내용에 적시되면 시의 적용 범위가 좁아지는 반면, 제목이 본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보편성, 포괄성이 확장되는 특성이 있지요. ‘풀꽃’을 아내라고 붙이면 안되겠습니까, 애인에게 붙이면 안되겠습니까. 어린이나 노인, 약자 어디다 붙여도 가능하지요. 이것이 바로 ‘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시에선 윤동주의 느낌이 난다는 이들도 있더라고요.

 

“약간 어린이 같이 철없어 보이는 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윤동주와 닮으면 안됩니다. 저는 오롯이 나여야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노인처럼 썼지만, 파의 단계를 거친 뒤 지금은 오히려 어린이처럼 씁니다. 육신은 늙었는데 나의 언어는 단순하고 트릭이 없고 레토릭이 없어요. 단순 명쾌하게 씁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작이나 아끼는 시는 무엇인가요.

 

“제가 가장 정성을 들여 쓴 시이자 보람 있는 시는 '막동리 소묘'입니다. 완성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풀꽃'이고, 제가 가장 아끼는 시는 '멀리서 빈다'와 '시' 2개이고요.”

 

그가 가장 아낀다는 시 '멀리서 빈다'는 모든 가려진 존재에 대한 작은 위로를 담는 작품이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시작에 영향을 미친 시인이나 시를 좀 알려주시죠.

 

“백석이나 김기림, 이용악, 정지용 등의 판금시를 공부하지 못하고 시인이 됐어요. 모범이 됐던 시인은 신석정을 비롯해 청록파 시인이었지요. 때로는 김소월이나 김영랑, 윤동주 그런 시인들도 모범으로 삼았어요. 서정주 시인도 조금 들어갔는데, 좋아하는 면과 거부하는 면 2개의 면이 있어요. 좋아하는 면은 한국어의 감칠맛 같은 것은 좋은데, 그의 시를 읽다보면 제가 자꾸 빠지게 되고 닮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싫어 읽으면서도 자꾸 밀어냈지요. 해외의 시인으론 헤르만 헤세나 릴케 등 독일 시인들을 좋아했고요.”

 

―시를 쓸 때 습관이나 징크스 같은 게 있나요.

 

“저는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시를 써요. 화장실에서도 쓰고 목욕탕에서도 씁니다. 목욕탕에 있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아내를 불러 메모지에 쓰라고 하지요. 자전거를 타다가 떠오를 땐 자전거를 멈추고 핸드폰에 기록합니다. 자다가도 쓰고 심지어 꿈속에서 씁니다.(꿈 속에서도 쓰다니요) 꿈속에서도 시를 쓰는데, 그런 시의 반절은 날라 가지만, 반절 정도는 남아요. 그런 시가 있어요.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갑자기 그가 스마트폰의 메신저 화면을 기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거기에는 ‘나는 겨울나무/…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나는 봄의 나무…’ 등의 구절이 담긴 시가 적혀 있었고, 아래엔 20대 젊은 독자가 보인 반응이 적혀 있었다. “저에게는 소통하는 20대의 아이들이 있어요. 이들에게 시를 많이 써서 보냅니다. 독자와의 교감이고 소통이지요. 될 수 있으면 젊은 독자에게 보내지요. 젊은 친구에게 시를 보내야 시도 젊어집니다. 반응은 당연히 보고요. 젊은 세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래야 시가 늙지 않습니다.”

 

길지 않으면서도 메시지가 분명한, 명징한 시 세계를 구축했던 그는 박용래문학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충남문인협회장, 충남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퇴임 뒤 2년 정도 쉬고 8년간 공주시문화원장을 역임했으며, 1년 쉰 뒤 지난해부터 한국시인협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공주에서 풀빛문학관도 운영 중이다.

 

―16세부터 시를 써왔으니, 시력 60년이 넘습니다.

 

“사실 16세부터 76세까지 60년 동안 시만 썼어요. 지금이 77세인데, 어떻게 60년 동안 시를 썼을까요. 그건 좋아서입니다. 타의나 청탁 때문에 글 쓰는 사람이 있는데, 시가 좋아지려면 청탁과 관계없이 써야 합니다. 청탁이 들어와서 쓰면 이미 늦어요. 현실적인 요구나 청탁, 외부의 필요가 없이 저의 필요에 따라 시를 쓰죠. 써달라고 해서 쓴 것이 아니고 제가 쓰고 싶어서 써요. 그래서 60년 동안 썼습니다. 사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오래 쓰지 않아요. 김연아 선수처럼 진짜로 세계적인 선수는 오래 하지 않잖아요. 누가 끝까지 합니까. 잘 못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끝까지 합니다. 저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직장을 잡더라도 적성에 맞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결국 성공합니다. 돈이나 성공만 바라거나 또는 잘 되는 곳만 쫓아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해요. 앤절라 더크워스는 책 『그릿』에서 ‘스카우트 당하지 마라’고 한 이유죠. 공자 선생도 ‘지자 불여호자(知者不如好者)요, 호자 불여락자(好者不如樂者)라’, ‘잘 아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낫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낫다’고 했어요. 밥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저는 시를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시를 좋아하는 사람, 지자(知者)가 아닌 호자(好者)였어요. 낙자(樂者)까지 이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자인 것만은 분명해요.”

―10년 후의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10년 후에는 죽겠지요. 옛날에는 ‘나이가 들면 산 속에 들어가 숲의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안됐잖아요. 이제 저는 그런 계획이 없어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어요. 젊은 시절에는 ‘10년을 가슴에 안자’며 10년을 바라보며 살았어요. 지금은 10년은 자신이 없고 5년은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해요. 지금 제 목표는 풀꽃문학관에 제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후학들은 있나요) 저는 한양대 출신도 아니고 박목월의 강의를 한 번도 들은 것도 없으며 ‘박목월상’도 받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정통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좋아서 박목월의 제자가 된 것이죠. 저는 후학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제자를 기른 적도 없어요. 진정으로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보지 못하더라도, 제가 죽은 뒤에라도 제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시,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묻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시론을 펼쳐놨다. 그것도 자리를 앉자마자 모두에서. “차를 탈 때마다, 젊은 시절 들은 한의사의 이야기를 생각하곤 합니다. ‘1악(握)이 얼마인가’를 계량하고 깨닫는 것이 한의사로서의 일생이었다고 하더군요. 1악은 한 주먹인데, 이것도 한 주먹이고 요만큼도 한 주먹인데, 도대체 1악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을 깨닫는 것도 한 세월인데,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가 되면 사랑이 끝납니다. 인생도 알 때가 되면 인생 역시 끝나고요. 결국 사람은 사랑이 뭔지, 인생이 뭔지를 모를 때 출발해 그것을 알 때쯤이면 끝나지요. 그 전에는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았는데, 이제 잘 보이기 시작하면 눈이 나빠지고 잘 들을 줄 알면 귀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놓으신 덫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죠. 지혜를 얻고 알만하면 능력을 빼앗고 수명을 가져갑니다. 나쁘게 말하면 신이 잔인해서 그런 것이지요.”

 

한의사의 화두 ‘1악’ 이야기로 시작한 그는 동양 고전의 숲으로 가로질러 나아갔다. 말은 조곤조곤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요즘 한국시와 시인들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노자 『도덕경』을 보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있어요.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는 뜻인데요. 코로나19도 천지불인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하늘과 땅이 가는 길이 따로 있고 인간이 가는 길도 따로 있는데, 인간이 하늘과 땅의 길을 거스르지 않고 맞춰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요즘 시들이 너무 길어지고 어려워지고 있어요. 이는 하늘과 땅이 가는 길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시는 길지 않고 짧았어요. 인터넷 시대에도 맞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독자들이 외면합니다. 독자들은 짧고 쉬운 시를 원합니다. 시가 짧고 쉬워야 하는 건 기본입니다. 한의사의 1악 얘기를 했는데, 시가 어떻게 가야 좋을지 깨닫는 게 시인들이 할 일이죠. 가능하면 일찍 깨달아야 합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마감 전에 은행에 가야 한다고 시인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문학관 입구를 날렵하게 좌회전한 그와 그의 하늘색 자전거는 곧 주차장을 벗어나더니 시내로 스며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공주=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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