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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도움 다시 돌려주니 행복” 베푸는 기쁨에 푹 빠진 ‘키다리 아저씨’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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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2-26 12:00:00 수정 : 2020-12-26 10: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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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범희망나눔 복지재단’ 한기범 회장
207㎝ 키에도 속공 플레이
1990년대 한국 농구 이끌며
인생 최고의 전성기 누려

은퇴 후 손댄 사업마다 안돼
집마저 넘어가 빈털터리 신세
‘마르판 증후군’ 유전병도 발목

두 번째 심장수술비조차 없어
심장재단 도움으로 고비 넘겨
‘반드시 마음의 빚 갚자’ 결심

심장병 어린이 수술 지원 위해
10년째 자선 농구대회 이어와
코로나 이후 후원 줄어 속상해

향후 해외서도 나눔 확장 꿈
최근 고미술품 수집에 취미
이 또한 나눔에 큰 몫 할 것

“제 인생은 의외로 굴곡이 있어요. 가족들이 유전병 때문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거든요. ‘마르판 증후군’은 저처럼 마르고 키가 크며 몸에 비해 팔다리가 긴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대요. 1981년 아버지(190㎝), 2000년 남동생(197㎝)이 세상을 떠났어요. 겁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저도 100%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대동맥이 풍선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른대요.”

서울 장충동 사단법인 한기범희망나눔 복지재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1990년대 농구대잔치 시절 기아자동차 장신센터 한기범(56)을 만났다. ‘대들보 센터’로 한국 농구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수놓았던 그는 ‘나눔’을 행하는 복지재단 회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프로출범을 한 해 앞둔 1996년 은퇴까지 중앙대와 기아자동차에서 활약하며 고공농구의 ‘핵’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선뜻 물어보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부터 먼저 불쑥 꺼내놓았다. 인터뷰에 자주 응해본 경험에서 나온 배려일 듯싶다. 대개 농구에 얽힌 추억담부터 인사처럼 나눈 뒤 재단을 만들게 된 계기나 활약 등을 소개하고 아픈 사연 등을 들려주기 마련인데, 207㎝ 큰 키에도 속공 플레이가 가능했던 그답게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얼굴에 주름은 늘었지만 여전히 아이같이 환한 특유의 미소를 띠면서.

시골에서 보내왔다며 내놓은 따뜻한 유자차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다시 그와 마주 앉았다.

은퇴 후 한 회장은 한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다. 구로고와 중앙대 농구팀에서 코치로 활약하던 그의 발목을 잡은 건 역시 유전병이었다.

“2000년에 이어 2008년 두 번째 심장수술을 받아야 했어요. 기아차 선수 시절, 과장 월급을 받았는데 우승하면 보너스 정도가 나왔었죠. 프로농구 출범 직전에 은퇴해서 몇 가지 사업을 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집이 넘어가고 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죠. 두 번째 수술비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국심장재단의 도움을 받았어요. 수술이 잘 되어 지금은 시니어 농구대회에서 8쿼터를 뛸 만큼 건강합니다. 먼저 하늘나라로 돌아간 가족과 저를 도와준 사회에 빚을 졌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빚이 된 겁니다. 열 배, 백 배로 꼭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주변에서 야구의 박찬호 자선재단, 축구 홍명보 자선재단, 골프 최경주 자선재단이 있으니 농구인도 나서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한기범희망나눔재단의 출발 배경입니다.”

2012년 9월 사단법인 ‘한기범희망나눔’을 설립한 한 회장은 이후 생명나눔과 희망나눔, 건강나눔, 웃음나눔, 스타나눔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자신과 같은 심장병을 가진 어린이와 다문화 가정 어린이, 농구 꿈나무 후원 사업 등에 열중한다. 앞서 특기인 농구를 살려 무료 농구교실을 세운 뒤 2011년부터 10년째 희망 농구 자선대회를 열어왔다. 심장병 어린이에게 수술비 등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지난 9월19일 경기 의정부시 체육관에서 ‘2020 스타와 함께하는 랜선 희망농구 자선경기’라는 주제를 내걸고 무관중 대회를 진행했다. 서지석, 박재민, 강경준, 김영준, 권성민, 쇼리, 상추 등 평소 농구를 즐기는 연예인들과 김민섭, 박광재, 방성윤, 신기성, 전태풍, 김승현, 김동우, 박성진, 석종태, 이현승, 이항범, 하승진 등 현역 또는 은퇴 선수들이 대거 참여해 코트를 달궜다.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주제가 ‘크레이지 포 유’를 불렀던 가수 박상민과 걸그룹 써드아이, 레이디돌 등은 축하무대를 꾸몄다.

“지난 10년 동안 서울과 의정부에서 한 해 두 번씩 열어온 행사입니다. 사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행사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해마다 꾸준히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빼먹지 않고 이어가게 됐습니다. 또 한 가지 고마운 일은 그동안 경기를 치르면서 다친 선수가 없다는 거예요. 바쁜 일정에도 꼬박꼬박 참여해 경기를 펼쳐준 선수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날 기업은행과 SK 등이 도와준 후원금은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한국심장재단, 어린이재단 등에 전달했다.

저소득층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마음도 각별하다.

“필리핀인 엄마를 둔 아이들을 데리고 두 번 필리핀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부모님 나라 방문‘을 주제로 현지 학교와 연계해서 엄마의 고향을 둘러보고 온 거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현지 라디오 방송과 인터뷰도 가졌습니다.”

어느새 ‘아낌없이 주는 나무’ ‘키다리 아저씨‘가 된 한 회장은 더 큰 목표를 세우지만 걱정 또한 숨기지 않는다.

“한기범희망나눔재단이 나눔을 더 많이 더 널리 실천하는 단체가 되길 바랍니다. 의욕을 갖고 시작한 일이지만 후원금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죠. 코로나19 유행이 확산되자 정기 후원자 수가 700여 명에서 반으로 줄었어요. 후원금액 역시 반 토막이 났죠. 우선 목표는 법인의 경제적 안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후원 ARS 한 통이 3000원인데,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나아가 국내를 넘어 국외에서의 자선나눔에 대한 열망도 들려준다. “코로나19가 사그라들면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으로 나눔 활동을 넓혀가고 싶습니다.”

“나눔은 스스로 선택받은 자가 베푸는 선행”이라고 강조하는 한기범 회장이 본인의 사인볼을 들고 미소 짓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회장은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주위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이라는 감사의 말을 여러 번 쏟아냈다.

“처음 재단 일을 시작할 때는 어디 가서 아쉬운 말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성격이 내성적인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래도 내가 한기범인데‘라는 오기나 자만이 있었던 거죠. 말이 좋아 후원이지 구걸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2008년 두 번째 받은 심장수술이 강력한 동력이 됐어요. 반드시 보답해야겠다는 각오로 제 자신을 바꾼 거죠. 마음을 내려놓자 편해졌습니다. 지금은 얼굴이 제법 두꺼워져서 많은 분들께 부탁, 당부, 요청 형식을 빌려 후원을 맡깁니다. 하하.”

가장 강력한 후원자 ‘베스트 5‘를 꼽을 수 있냐는 짓궂은 질문을 건네자 “생사를 같이 하는 분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답하면서도 “베스트 5와는 상관없이, 우선 항상 조언해주면서도 묵묵히 따라주는 아내가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재단 살림꾼인 사무총장을 비롯한 재단 식구들을 챙긴다. 평소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못하고 지내기 때문이란다.

“나눔은 스스로 선택받은 자가 베푸는 선행”이라고 강조하는 한 회장은 “사실 나눔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제게는 농구가 나눔의 출발입니다. 농구로 베풂을 시작했어요. 굳이 농구가 아니더라도 누구는 경제적으로, 누구는 예술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베풀 수 있을 겁니다. 제게 농구는 인생이고 나눔은 희망이에요.”

한 회장은 은퇴 후 종종 TV에 모습을 나타냈다. 스포테이너 1세대이기도 한 그는 탤런트 김태희가 나온 시트콤에도 출연했다. ‘런닝맨’에서는 이광수와 닮은꼴로 나왔다. ‘개그콘서트’의 ‘봉숭아 학당’ 코너에선 여장을 하고 등장해 웃음을 샀다. 후배들인 ‘농구 대통령’ 허재, ‘국보급 센터’ 서장훈, ‘매직 히포’ 현주엽 등에게 방송의 길을 열어 준 셈이다. 이들이 맹활약 중이다. 한 회장은 ‘예능인’으로 변신한 후배들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농구 실력만큼 TV에서 존재감도 남달라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얻은 인기가 농구계에 분명 플러스로 작용할 겁니다.” 특히 중앙대와 기아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허재의 변신에 놀라워한다. “선수 시절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후배였는데, 예능감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최근 농구 관련 책을 낸 그는 유튜브 채널(한기범의 뻔한농구)도 운영 중이다.

한 회장은 하승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장훈과 함께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장신 선수였다. 서장훈과 농구화 벗고 맨발로 잰 실제 신장이 205㎝로 똑같다. 시합용 공식 신장은 207㎝.

중앙대 진학 이듬해 명지고 1년 후배인 김유택마저 합류했다. 둘은 대한민국 농구 최초의 장신 더블 포스트를 구축하며 중앙대 전성시대를 열었다. “허재가 너무 유명해서 잘 못 알려졌는데, 입학하기 전에 이미 둘만으로도 대학 5관왕을 차지했었죠.”

졸업 후 새로 창단된 기아산업에 입단, 유재학과 1년 늦게 들어온 김유택, 셋이서 신생 팀을 실업 3강에 올려놓았다. 이후 허재까지 가세하자 기아자동차 불패 신화를 써나갔다. 한 회장은 1989-1990 농구대잔치 MVP를 차지했다. 리바운드 1위 역시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장신인 탓에 무릎에 부담이 가는 상태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국내외 대회를 치르느라 ‘대포주사‘를 맞아 가며 출전한 끝에 결국 부상을 달고 살며 전성기의 위력을 잃게 되었다.

“데포메드롤을 대포주사라고 별명처럼 불렀죠. 통증을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 약품인데 경기 직전에 주사하면 마치 부상이 나은 듯한 착각을 일으켜요. 과도한 남용에 의한 피해가 심각해서 현재는 금지약물로 분류됐어요.”

그는 “원 없이 많은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은퇴 후 미련이나 후회는 남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가 요즘 새로운 취미를 찾았다. 중국 도자기와 고미술품 수집이다.

“좋아했던 과목이 국사였어요. 항상 90점 이상 받았죠. 우리 역사와 연관된 중국미술품을 모으고 있어요. 이 또한 언젠가 ‘나눔’에 큰 몫을 할 겁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한기범 회장은… ●1963년 천안생 ●명지고 ●중앙대 ●기아자동차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은메달 ●1990년 농구대잔치 MVP ●농구대잔치 ‘베스트 5’ 4회 선정 ●FIBA 아시아선수권 ABC 준우승 3회 ●한기범농구교실 단장 ●(사)한기범희망나눔 회장 ●2020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저서 ‘키다리아저씨 한기범의 희망콘서트’ ‘한기범의 재미있는 농구 코칭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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