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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은 고독하건만 / 접속 무대선 실체 없이 번잡 / 때·장소 안 가리고 발생 탓 / 개인은 접속서 휴식 필요해

“마라톤 전투에서 우리가 이겼다.” 그리스의 병사 페이디피데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장거리를 쉼 없이 달려와 그 한마디만 외치고 바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 한 병? 초고속 마차? 아니다. 휴대전화이다. 누군가를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되고, 또 어떤 장소에 몸소 가지 않아도 되며, 길에서 보내는 어마어마한 시간까지 아끼게 해 준 휴대전화는, 새삼 깨닫건대, 위대한 발명품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본격적인 비대면의 시대가 개막했고, 휴대전화를 비롯하여 온라인 연결망에 접속 가능한 각종 디지털 기기들이 생활필수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일부러 구식 기기를 고수하며 어떻게든 접속을 끊고 지내려는 사람은 새로운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돈키호테로 여겨지는 추세다. 모니터 빛에 장시간 노출되는 것이 어린이의 시력보호에 좋지 않다거나, 청소년이 혼자서 가상세계에만 몰입하는 것이 정서적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들마저도 유행에 뒤진 이야기처럼 쑥 들어가 버렸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어제 낮에 커피전문점에 들렀는데, 분위기가 왠지 음료를 마시거나 사람을 만나는 장소 같지 않아 머쓱했다. 차라리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하려고 오는 곳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가 접속 상태였다. 어떤 이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배터리 충전이 필요했는지 다급한 표정으로 콘센트 위치가 있는 자리를 찾느라 몸을 굽혀 두리번거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산소호흡기로 연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절박해 보였다.

‘세상은 하나의 무대’라는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말과는 별반 관계가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무대이다. 그 하나는 실제로 의식주가 이루어지는 무대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접속해서 들어가는 온라인 무대이다. 언론인 출신의 저자 윌리엄 파워스는 10년 전에 쓴 책, ‘속도에서 깊이로’(원제는 ‘햄릿의 블랙베리’)에서 온라인 무대를 ‘거대한 방’이라 묘사했다. 개인은 10억명이나 와글거리는 방 안에 서 있는데, 늘 모르는 누군가가 여기저기서 툭 치고 지나가는 상황이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자기도 모르게 이쪽저쪽으로 쓸려가곤 한다.

길을 걷다가 누구와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몸을 사리는 새침한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이 거대한 방에서는 서로 엉겨 난리도 아니다. 그 안에서는 어디까지가 나만의 영역인지, 또 어떤 것부터 내 생각이었는지 분리해내기 어렵다. 인간의 본질은 고독하건만, 접속한 무대 위에서는 왜 이리 실체도 없이 번잡한 것일까.

저자는 거대한 방에 오래 머물지 말고 그곳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생각할 자신의 권리를 누리라고 지적하는데, 우리에겐 이미 1998년 휴대전화 광고로 익숙한 내용이다. 광고장면은 이렇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정적을 깬다. 근엄한 표정으로 묵언수행을 하는 승려 옆으로 영화배우 한석규가 머리를 숙이며 멋쩍게 웃는다.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스피드011.” 이 광고는 접속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가 명심해야 할 두 가지를 압축해서 전한다. 접속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접속으로부터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4개월간 물리적인 접촉은 줄었지만, 온라인에서는 만나지 않은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분주하다. 재택근무라는 이유로 업무연락을 위해 접속 상태로 지내다 보니 혼자 있어도 쉬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접속이 곧 감시당하는 통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위계 구조 속에서라면 힘을 가지지 못한 피지배자들은 접속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 채 24시간 대기해야 하는 고통을 겪을 수도 있다. 학생들은 1.5배속으로 온라인 강의를 듣자니 생각할 여유가 더 없어지고, 수신확인 기능이 있어 무시해 버릴 수도 없는 온라인 대화창으로 연인들은 설렘과 피로감을 동시에 느낀다.

휴대전화 사용 초기에 광고에서 제기된 ‘탈접속의 매너’는 비대면 시대에는 인간다운 삶을 되찾기 위한 ‘탈접속의 권리’로 강화되면서 향후 더 첨예하게 대두되지 않을까.

 

이주은 건국대 교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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