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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그림처럼… 지나온 시간·인연 그리다

입력 : 2020-05-30 03:20:00 수정 : 2020-05-30 02: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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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세 때 늦깎이 등단 박미산 시인 / 6년 만에 세 번째 시집 선보여 / 불우했던 우리 근대사 겪으며 / 서로 떨어져 있지만 연결된 삶 / 그 속의 기억, 시적 사유로 형상화
박미산/채문사/9000원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박미산/채문사/9000원

 

‘흰 당나귀를 만나보셨나요’는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에 이어 6년 만에 나온 내놓은 ‘늦깎이 시인’ 박미산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54세 때인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돼 등단했다. 젊은 작가들이 주로 지원하던 신춘문예에서 그의 당선은 당시 신선한 화제가 됐다. 이후 2014년에는 조지훈 창작지원상을 수상하면서 꾸준히 시 세계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시인은 시집에서 맺은 인연을 한 장의 그림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리고 있다. 인천의 가족에 대해, 결혼해서 만난 최정희 소설가와 그의 딸인 채원·지원 자매에 대해, 지금은 성인이 된 그의 자녀에 대해, 늦은 나이에 배움을 얻은 그의 늦깎이 학생에 대해, 그리고 지금 시인의 삶의 터전인 누하동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사람들의 역사 기록’으로 만든 시가 모두 36편 담겨있다.

 

시집 속 인물들의 삶은 각기 떨어져 있지만 모두 연결돼 있다. ‘나’도 시인도 이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모두 그들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은 이처럼 서로 떨어진 존재들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불우했던 우리의 근대사에 주목한다. 

 

한국전쟁과 분단, 아버지·남편과의 이별, 바람 앞에서 꿋꿋했던 모성, 바람막이였던 오빠의 죽음, 탈북자, 가난 앞에서 식구들을 건사할 수 없는 가장인 아버지 등….

박미산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시를 통해 스스로도 힘든 상황이지만 주변인의 삶은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 안음으로써 더욱 깊은 사유와 통찰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오빠는 보병이 되어 걷고 또 걸었어/ 무장공비는 사정없이 총을 쏘아댔지/ 오빠는 다리 하나를 잃었어/ 우울증과 불면증이 오빠의 어깨를 짓눌렀어 지팡이를 마구 흔들며 걸었지/ 아이들에게 꿈에게 하느님에게 올케에게 닥치는 대로 지팡이를 휘둘렀어 //눈이 온다 바람이 뛰어온다/ 소나무랑 산뽕나무가 눈을 털어 산자락에 글자를 쓴다 /나는 불편한 다리를 끌고 걷고 또 걷는다 /하늘에서 뛰어오는 오빠가 글을 쓰라 한다/ 까막눈이인 내가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다. ” ‘오늘도 이명옥 씨가 글 위를 걷는 이유’의 한 부분.  

 

‘오늘도 이명옥 씨가 글 위를 걷는 이유’에서도 시인은 불행한 근대사의 한 장면 속에 무력한 어린 누이와 오빠를 등장시킨다.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폭력적인 역사인 불행한 시대를 묵묵히 걷고 또 걸으면서 가파르게 매달려 살다간 ‘오빠’. 오빠와 어린 누이가 온몸으로 부딪힌 길과 강과 산의 시간들. 그 세상은 이제 홀로 남은 ‘나’에게 의미를 보내고 나는 그 언어를 온몸으로 느끼고 또 온몸으로 시를 쓴다. 따라서 이명옥 씨가 글 위를 걷는 일은 오빠와 내가 끝없이 ‘걸었던’ 그 소중한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며, 불우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인은 이들 삶의 작은 역사의 시간을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의 시간을 전한다.

 

“시간이란 사람마다 다른 기억과 경험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박미산의 시는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시간’ 경험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면서,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론적 기원 혹은 삶의 궁극적 본원을 상상하는 목소리를 아름답고 눈물겹고 쓸쓸하고 따뜻하게 발하고 있다. 그 안에서 박미산의 ‘시적 시간’은 지금도 고요하고 힘차게 흐르고 있다”고 유성호 평론가는 말한다. 박미산 시인은 시적 시간을 새로운 서정으로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엮어가고 있다. 생명줄을 서로 잡아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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