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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떨어지니 가뭄과 같네 [명욱의 술 인문학]

입력 : 2020-05-30 18:00:00 수정 : 2020-05-30 1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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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분홍빛으로 수놓던 꽃들은 어느새 다 떨어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열매가 영글어가는 여름이 다가온다. 때 맞춰 비 소식도 들리는데,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맞춰 술을 비유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역사, 문학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동국이상국집’ 등을 집필한 이규보(李奎報)라는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애주가로도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남긴 다양한 술에 대한 시와 소설에서 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술을 보내준 친구에게 고맙다고 하는 답장은 8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술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술이 없는 날을 가뭄, 술이 온 날을 단비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근래엔 술마저 말라버려 온 집 안에 가뭄이 든 것 같았네. 고맙네. 그대 좋은 술을 보내주니 때 맞춰 내리는 비처럼 상쾌하네.” 그가 얼마나 해학적인가는 술병이 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알 수 있다. “나는 노련한 의원이라 병을 잘 진단하지. 지금 술병이 누구 때문인가 하면 틀림없이 누룩 귀신일 걸세. 새벽에 아황주(鴉黃酒) 닷 말을 단숨에 마셔야 해. 이 약이 유백륜이 알려준 비방일세.”

고려시대부터 빚어왔다는 아황주를 복원한 술. 농촌진흥청 제공

아황주는 고려시대의 유명한 술로, 진한 황색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이렇게 불렸다. 유백륜이란 인물은 중국의 유명 시인으로, 병을 술로 다스리라는 대주가이다. 결국 술병을 술로 다스리라는 친구를 놀리는 글이며, 저때부터 누룩이 술맛을 좌우한다는 것을 이규보는 알고 있었다. 양조의 이치도 이규보는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문호가들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두 편 썼다는 부분이다. 그래서 하나는 친구에게 보내고, 하나는 자신이 소장했다. 친구에게 보내주면 그 글이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규보는 인생에서도 술을 자주 논했다. 그의 시 ‘꽃샘바람’에서도 알 수 있는데, 시기하고 질투하는 인간사를 초봄에 불어오는 차가운 꽃샘추위와 비유했다.

“꽃 필 땐 광풍도 바람도 많으니 사람들 이것을 꽃샘바람이라 한다. (중략) 어찌 그 고움을 시기하여, 광풍을 남겨 보냈을까. 꽃 피어 감상하기 좋으나 꽃 지는 것을 슬퍼할 게 뭐 있나. 꽃 피고 꽃 지는 것 모두가 자연이니 열매가 생기면 반드시 꽃 피어 대신한다. 묻지 말게나, 오묘한 이치 자연의 이치 술잔 잡고 소리 높여 노래나 불러보자꾸나.”

결국, 아무리 주위에서 시샘하고 시기하여 꽃은 떨어질 수 있으나 열매는 맺어진다는 자연철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애주가였지만 마냥 술을 많이 마시자는 예찬론자는 아니었다. 그의 아들이 과음하는 것을 걱정하는 글이 남아있으며, 그가 쓴 최초의 가전체 소설 ‘국선생전’에서는 술은 집안을 살릴 수도 있으나 망하게 할 수 도 있다는 ‘양날의 검’의 모습으로 비유했다.

결국, 애주가는 무작정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가진 무서움도 잘 안다는 것. 이규보가 남겨놓은 진정한 술의 가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

 

●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는…

 

숙명여대 미식문화최고위 과정, 세종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객원교수. SBS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의 ‘불금의 교양학’에 출연 중.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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