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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역사가 된 세 남녀

입력 : 2020-02-03 02:00:00 수정 : 2020-02-02 20: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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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재연 / 일제 치하·광복 전후부터 / 6·25로 흐른 격동기 배경 / 이념 넘나드는 삶과 사랑 / 복고바람 탄 명작 드라마 / 최대치·윤여옥 키스신 등 / 명장면 고스란히 되살려
비극적인 근현대사에 휘말린 일본군 위안부 ‘윤여옥’,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 군의관으로 전쟁에 끌려온 ‘장하림’ 세 남녀의 엇갈린 운명을 무대에 올린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연합뉴스
창작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공연이 다시 시작됐다. 재정난 때문에 무대 간소화 등 비상조치를 취하며 배우들의 열정으로 어렵게 꾸려나갔던 지난해 초연 무대가 큰 호응을 얻은 덕분이다. 공연가에선 복고가 유행이다. 역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 영화 ‘영웅본색’과 팀 버튼 감독의 예술영화 ‘빅 피쉬’도 다시 뮤지컬로 만들어져 관객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원작이 차지하는 중량감은 ‘여명의 눈동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여명의 눈동자’ 원작은 우리나라 추리소설 대가 김성종의 대하소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6년간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후 10권으로 발매됐다. 일제치하에서부터 광복 전·후 혼란기를 거쳐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일본군 위안부 ‘윤여옥’,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 군의관으로 전쟁에 끌려온 ‘장하림’의 엇갈린 삶과 사랑의 비극을 다뤘다.

 

스포츠신문 연재소설이었던 ‘여명의 눈동자’가 한국 사회에 폭발적 반향을 일으킨 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다. 1991∼1992년 무려 36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진 MBC ‘여명의 눈동자’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여러모로 파격적이다. 한국 드라마 역사상 10대 드라마 선두에 꼽힐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모래시계’로 또 한 번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김종학 PD-송지나 작가의 ‘김종학 사단’이 만들어진 작품이다. 두 달이 넘는 중국·필리핀 현지 촬영을 포함해 드라마 방영 분량의 30% 정도를 사전제작하며 한국 드라마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최재성·박상원·채시라 등의 열연에 힘입어 시청률은 50%를 넘나들었다. 최불암·이정길·박근형·박인환·장항선 등 화려한 출연진을 자랑했는데 소련군 통역으로 등장한 고현정, 조선인 위안부 오연수도 조연으로 등장한다. 주제곡을 담은 음반은 드라마OST로는 이례적으로 50만장이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내용면에서도 ‘여명의 눈동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제주 4·3을 대중문화에서 한꺼번에 정면으로 다룬 첫 작품으로서 의의가 크다. 위안부 문제는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선생이 위안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기 이전까지는 제대로 된 역사적 조명조차 받지 못했다. 김학순 선생의 증언에 이어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가 일제 만행을 고발하며 관련 역사 대중 논의에 기폭제가 됐다. 1999년 말에야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4·3 역시 이 프로그램 방영 당시에는 ‘공산폭동’으로만 여겨지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이를 새롭게 조명한 ‘여명의 눈동자’는 용기 있는 드라마였다.

드라마 종영 28년 만에 뮤지컬로 되돌아온 ‘여명의 눈동자’는 여옥의 간첩죄를 따지는 법정을 뼈대 삼아 동남아 일본군 주둔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중국 상하이와 서울, 제주, 그리고 ‘빨치산 소탕작전’이 벌어졌던 지리산 등을 오가며 격동의 현대사에 휘말린 주인공 세 남녀의 비극적 삶을 보여준다. 최대치와 여옥의 철조망 키스신 등 드라마 속 명장면도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자칫 공백이 생길 수 있는 세종문화회관 큰 무대를 제작진은 대규모 앙상블 등을 동원해 충분히 채웠다. 경사진 무대를 설치해 입체감을 더했으며 무대 앞쪽에는 계단을 설치해 이곳으로 배우들이 등장·퇴장하고 연기하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다양한 장면과 사건 설명은 무대 좌측과 후면에 관련 영상과 자막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를 통해 관객은 조직화한 전쟁 성범죄였던 위안부 문제의 참혹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다만 드라마로 36회 분량인 원작을 두 시간 남짓한 무대에 올리다 보니 굵직한 사건 위주로 재구성된 줄거리의 빈 부분은 관객이 알아서 채워야 한다. 원작을 읽었거나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문제없겠지만 아니라면 사건 전개를 따라가기 벅찰 수 있다. 그나마 전쟁 발발 등에서 배경영상이 빠른 전개를 따라갈 수 있는 이정표 역할을 하는데 3층 관객의 경우 공연장 특성 때문에 이를 볼 수 없는 상태다. 별도 화면 등을 통한 3층 관객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출연진은 여옥 역 김지현·최우리·박정아, 최대치 역 테이·온주완·오창석, 장하림 역 마이클리·이경수 등이다. 지난달 24일 공연에선 초연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김지현이 열연으로 1막을 혼자 이끌어가다시피 했다. 뮤지컬 ‘그날들’, ‘윤동주 달을 쏘다’ 등에서 역량을 쌓아온 온주완도 성숙한 연기와 열정적인 노래로 제 몫을 했다. 다만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헤드윅’ 등에서 정확한 음정에 실린 폭발적 가창력을 뽐내온 마이클리에게 ‘장하림’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어색한 배역이었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빛났지만, 미국 태생으로서 여전히 어눌한 우리말 연기는 극 몰입을 힘들게 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27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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