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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단 극찬 속 등장했지만… 흥행 실적 처참 ‘저주 받은 걸작’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12-03 06:00:00 수정 : 2019-12-04 17:2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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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 / 한국영화 ‘웰메이드’ 시대 평가 받는 / 2003년 올드보이·실미도와 함께 개봉 / 가벼운 코미디 기대하던 관객들 외면 / 마니아들 지지 속 ‘팬덤’ 확장은 성과 / 최근 상영관 싹쓸이 등 다시 도마 올라 / 플랫폼 다변화 속 흥행전략은 숙제로
올해 10월20일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지구를 지켜라!’ 4K 디지털 복원 기념 상영회에 참석한 장준환 감독. 장 감독이 입고 있는 옷은 ‘지구를 지켜라!’ 팬들로 꾸려진 ‘지구 수호단’이 만든 지구 수호 티셔츠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웰메이드’ 영화의 시대에 등장한 ‘저주받은 걸작’

한국영화사에서 2003년은 가장 화려한 해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 ‘클래식’(곽재용 감독)과 ‘살인의 추억’(봉준호 감독), ‘장화, 홍련’(김지운 감독), ‘싱글즈’(권칠인 감독),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감독), ‘올드보이’(박찬욱 감독)가 잇달아 개봉했고, ‘실미도’(강우석 감독)가 그해 12월에 개봉하면서 이듬해인 2004년 대한민국 1000만 영화의 탄생을 알렸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한국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의 ‘한국영화 100년 100경’에서 2003년 한국영화의 풍경을 “‘웰메이드’ 영화의 등장”으로 묘사한다. 그는 ‘웰메이드’라는 용어가 “한국영화의 제작 수준이 이제 변방의 단계에서 벗어나 할리우드나 유럽에 뒤지지 않는 종합적인 향상을 이뤘다는 긍정적인 면을 암시한다”고 평가한다. 1998년 ‘퇴마록’(박광춘 감독)에서 시작돼 1999년 ‘쉬리’(강제규 감독) 등으로 이어졌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욕망이 규모에 대한 관심을 넘어 제작 환경과 만듦새를 아우르는 종합적 접근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시기였던 셈이다.

바로 이 해에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렸던 ‘지구를 지켜라!’가 있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인 장준환(49) 감독은 이 작품으로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름이 됐다.

영화 주인공 병구(신하균)는 안드로메다 어느 행성의 외계인들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청년이다. 그는 개기일식에 외계 왕자가 지구를 폭파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외계 왕자의 오른팔인 유제화학 강만식 사장(백윤식)을 납치해 고문하기 시작한다. 개기일식은 점점 다가오고 강만식은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와중에 실종된 강만식을 찾기 위한 경찰의 수사망은 점점 더 병구를 옥죄어 온다. 그리고 영화의 끝, 모든 관객의 예상을 뒤엎으며 강만식이 외계 왕자임이 밝혀진다.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 개봉 당시 메인 포스터. 이런 발랄한 분위기 탓에 관객들은 가벼운 코믹물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극장에서 만나야 했던 영화는 지구를 터트려 버리는 파국 서사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속에서 병구가 휘두르는 폭력은 끔찍하다. 중요한 건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폭력이 병구의 폭력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병구의 폭력은 한국사회의 폭력으로 확장되고, 한국사회의 폭력은 세계적 차원의 폭력으로 확장되며, 세계적 차원의 폭력은 또다시 우주적 차원의 폭력으로 확장된다. 지구를 식민화했던 외계인 아버지는 지구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구인을 억압한다. 결국 영화가 그리는 병구의 폭력은 외계인 아버지로부터 이식된 폭력임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한국 근대성에 대한 날카롭고도 처절한 비평이 된다.

2003년 이후 ‘웰메이드’ 한국영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장르 영화의 외피 안에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녹여 넣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와 함께 ‘지구를 지켜라!’는 이런 경향을 견인했고, ‘지구를 지켜라!’는 이 중에서도 가장 먼저 개봉한 작품이었다. 언론 시사회 뒤 평단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이 괴작(怪作)의 탄생에 열광했다.

반면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평가와 함께 영화의 흥행 스코어는 7만 관객 동원에 그쳤다. 그 원인으로는 아무래도 홍보 전략의 실패가 꼽혔는데, 신하균 주연의 가벼운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을 영화의 전개가 전혀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화는 “한국영화사 최고의 데뷔작”, 그러나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팬덤 문화의 확장과 함께 등장한 ‘지구 수호단’

물론 모든 대중이 이 작품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처참한 흥행 실적으로 ‘지구를 지켜라!’가 극장에서 쫓겨 내려오기 시작할 무렵, 이 영화의 팬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대중의 호응보다 마니아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은 작품”이란 언론의 평가는 이 덕분이었다.

최근 ‘아수라’(2016)의 아수리언,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의 불한당원, ‘허스토리’(〃)의 허스토리안과 같은 영화 팬덤의 시작은 199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터넷과 네티즌의 부상이란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함께 팬덤은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 팬덤을 넘어 드라마 팬덤과 영화 팬덤으로 확장됐다. KBS ‘거짓말’(1998)과 MBC ‘네 멋대로 해라’(2002), ‘다모’(2003) 같은 드라마 팬덤이 주목을 끌었고, 영화 쪽에서는 ‘박하사탕’(1999), ‘번지점프를 하다’(2000), ‘파이란’(2001) 등을 중심으로 팬덤이 등장했다(각각 박사모, 번사모, 파사모 등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런 영화 팬덤은 2001년 네티즌을 중심으로 조직된 ‘작은영화 살리기 운동, 와라나고’와도 만나고 있었다. 이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와 ‘라이방’(〃), ‘나비’(2003), ‘고양이를 부탁해’(2001)의 재상영 운동이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 왕자를 만나게 해달라는 병구(왼쪽)와 그에 저항하는 강만식 사장. 병구는 죽음을 맞이하고 강만식은 경찰에 구조된다. 그렇게 영화가 끝났다고 믿는 관객들의 기대와 달리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팬덤은 국내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02년 개봉한 ‘헤드윅’은 열정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했고, 이들은 단체 관람을 조직하고 코스프레 행사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문화적 토대가 결국 다른 하위문화와 만나면서 ‘왕의 남자’(2005) N차 관람 열풍을 만들어 낸다. 독과점 없이 1000만 관객을 달성한 거의 유일한 영화라 할 수 있는 ‘왕의 남자’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구를 지켜라!’가 대중의 외면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지게 될 위험에 처하자 프리챌 커뮤니티(지.지)와 다음 카페(지구 수호단)에 모여 있던 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단체 관람을 조직하고 다양한 팬클럽 활동을 기획함과 동시에 제작사 싸이더스 측에 재개봉을 요구했다. 극장에서의 흥행이 영화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의 생명을 연장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하기 위해 재개봉은 필수적인 요구였다.

 

◆무너지고 있던 홀드백과 영화 미래에 대한 고민

이 영화의 팬덤이 ‘내 영화의 번영’만을 원한 건 아니었다. 당시는 극장 문화 격변기이기도 했다. 1998년 문을 연 강변CGV를 필두로 한국사회에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고, 2003년이 되면 당시 언론의 표현대로 “멀티플렉스 전성기”가 열린다. 그와 함께 블록버스터 등 소수 영화가 상영관을 싹쓸이하고, 소위 ‘퐁당퐁당’으로 불렸던 극장 파행 상영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무엇보다 케이블, 위성, VOD 서비스 등의 등장으로 부가판권 시장이 다변화하자, 작품의 생명력을 지켜 주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중 하나였던 ‘홀드백’(Hold back·영화 한 편이 극장 개봉 후 부가판권 시장으로 넘어가기까지 유지되는 기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구를 지켜라!’가 극장에서 내리고 홀드백 기간도 없이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자, 팬덤은 유럽과 달리 홀드백에 대한 규정이 없는 한국영화 정책을 비판했다.

영화 플랫폼은 더욱 다변화했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까지 가세한 현실에서 홀드백은 이제 고대 유물이 됐다. 그러나 작은 영화, 대중이 외면하는 영화에 대해 여전히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팬덤이란 사실만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팬덤이 영화의 미래일까? 그건 확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팬덤이 어떤 의미로든 영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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