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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진수 호두까기 인형 무대 뒤에서 완성한다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예술감독·지도위원]

입력 : 2019-11-27 05:50:00 수정 : 2019-12-04 17: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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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통 마린스키서 15년 / 발레리나로서 최고의 나날 / 그래도 돌아올 곳은 한국 / 1991년 혈혈단신 혼란의 러시아로… 두루마리 휴지까지 싸가야 했던 시절 / 마린스키서 첫 배역 맞은 작품 호두까기 인형 이젠 직접 단원 지도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지젤 등과 함께 클래식 발레의 정수입니다. 클래식 발레는 ‘크리스털’ 같아야 해요. 춤이 굉장히 맑고 깨끗하고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어야 합니다. 아라베스크를 해도 교과서처럼 깔끔한 라인이 나와야만 하는 무대라 무용수들에게도 어려운 작품입니다.”

유지연(사진) 유니버설발레단 부예술감독 겸 지도위원은 발레를 좋아하는 이에겐 한 해를 보내는 연례행사인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준비 중이다. 전체적인 안무를 점검하고 무용수들이 더욱 정교하게 안무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공연 전반을 챙기는 게 그의 역할이다.

여섯살부터 발레를 시작한 유 부감독은 후배 무용수들에게는 늘 배역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주문한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을 맡으면 책도 찾아서 읽어보고 영화도 보면서 나만의 줄리엣을 확실히 이해하고 만드는 노력이 중요해요. 안 그러면 춤의 깊이가 얇아지는 거죠. 그래서 ‘네가 누구를 표현하려는지, 네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자꾸 강조합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유 부감독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첫 배역을 맡았던 작품이어서 아직도 각별하다. 1783년 제정 러시아 황실이 창설한 마린스키는 세계 최고 발레단 중 하나다. 마리우스 프티파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와 함께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을 만들었고 안나 파블로바, 바츨라프 니진스키 같은 전설적 무용가가 그 명성을 세계에 알렸다. 유 부감독은 이 같은 마린스키와 발레단 부설 바가노바발레아카데미의 전통을 우리나라에 가져와 후진에게 전하고 있는 무용인이다.

서울 예원학교 3학년 때인 1991년 러시아 유학길에 올라 바가노바 5학년에 편입했다. 바가노바 250여년 역사상 첫 외국인 정규 유학생이었다. 4년 후 바가노바를 모든 과목 만점으로 수석졸업한 데 이어 유일한 외국인 단원으로서 마린스키 입단 등 한국 발레 역사의 한 장을 쓴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후진을 양성 중이다.

유 부감독이 러시아로 간 1991년은 격동의 시기. 개방정책에 반발한 옛 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를 다시 옐친이 무산시킨 후 구체제를 해체한 해다. 유 부감독은 “빵도 하루 두 개씩 배급받던 시절이었고 대혼란기였다. 대한항공편으로 모스크바까지 간 후 기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데 하다못해 두루마리 휴지까지 들고 가느라 어머니랑 저랑 큰 트렁크 네 개에 짐 200㎏을 나눠 들고 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난세에 유 부감독이 사상 최초 첫 바가노바 유학생이 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키워가던 예원학교 시절 바가노바에서 특강하러 온 두 명의 무용교사가 재능에 홀딱 반해 귀국 후 바가노바 교장에게 적극 추천한 게 전례없는 외국학생 입학 허가로 이어졌다.

마린스키발레단 무대에 서던 시절의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부예술감독

바가노바 최대 이벤트는 졸업시험이다. 한 학년에 20명이 채 안 되는 남녀 각 2개반이 졸업작품으로 무대에 서는데 마린스키는 물론 볼쇼이발레단 등 러시아 주요 발레단장이 총출동한다. 차세대 스타를 영입하기 위해서다. 물론 최고는 마린스키 몫이다. 유 부감독은 “바가노바 졸업식이 6월인데 그 전 연말·연초에 마린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서 바가노바 졸업생 한두 명이 배역을 맡습니다. 저도 신년공연에서 ‘마샤(마리)’역을 맡게 됐는데 그때 비로소 ‘아, 내가 마린스키에 들어가겠구나’하고 짐작할 수 있었죠.”

마린스키에서 유 부감독은 우즈베키스탄계 혼혈 남자 무용수를 빼면 유일한 외국인 단원이었다. 경쟁은 치열했지만 최고의 무대에 설 수 있는 나날들이었다. 유 부감독은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많은 국가 여러 극장 무대에 올랐다. 세계 최고 무용수들과 한 연습실에서 땀 흘리고 내로라 할 극장에서 이런저런 역할을 맡아 계속 춤추면서 갈채를 받는 생활이 너무너무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도 유 부감독은 2010년 34세 때 귀국을 결심하고 마린스키 내한 공연에서 마지막으로 무대에 선다. 바가노바 동기인 디아나 비쉬네바가 아직도 마린스키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인 것에 비하면 빠른 은퇴였다. 아예 서울보다 익숙해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끝까지 마린스키에서 춤추다 바가노바에서 교사로 일할 수도 있으나 퍼뜩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김치와 찌개가 그리워지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기초를 강조하는 마린스키는 특히 군무가 탄탄하고 그만큼 승급도 까다로운 발레단. 바가노바에서 마린스키로 이어진 경력은 수석무용수와 군무 사이인 솔리스트에서 끝났다. 이 때문에 마린스키 시절 유 부감독에게는 “차라리 국내나 다른 해외 발레단으로 옮겨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는 게 낫지 않겠나”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실제 볼쇼이발레단조차 수석무용수 중에는 율리아 스테파노바, 올가 스미르노바 등 마린스키에서 군무나 코리페(군무 리더)에 머물렀던 무용수들이 많다. 그러나 유 부감독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워낙 마린스키와 다른 단체 규모가 너무 달랐다. 제 자존심이 허락을 못했다. 세계 최고 발레단에서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주역에 못 가더라도 여기서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귀국 후 유 부감독은 예원학교, 선화예고 강사와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등을 거쳐 유니버설발레단에 안착했다. “제 삶이 좀 더 화려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너무 감사합니다. 뭔가 반짝하고 화려하게 터지고 난 뒤였다면 지금의 나와 내 가족이 없을 수 있겠죠. 건강하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겠기에….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아이, 가족과 함께하는 게 너무 감사합니다.”

 

글 박성준, 사진 이제원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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