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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컴컴 귀갓길에 벽화·조명… ‘그놈’이 사라졌다 [S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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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09 18:00:00 수정 : 2023-12-10 15: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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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1인 가구 ‘300만 시대’ / 주거 침입·성범죄 등 공포 시달려 / 범죄 요인 사전 최소화하는 ‘셉테드’ / 범죄 발생률 확 줄여 도입 확산 / 인적 드문 골목길 곳곳 LED 조명… / 우중충 담벼락엔 화사한 그림 입혀 / 예산 들여놓고 사후관리 ‘뒷짐’ 많아 / “법적 근거 마련해 체계 관리 필요”
‘셉테드’ 사업을 통해 담장에 벽화를 그리고, 폐쇄회로(CC)TV 설치 사실을 알리는 등 지역 환경을 개선한 모습. 인천 계양경찰서 제공

“늦은밤 집에 갈 때면 무서워서 택시 타고 갔었는데, 요즘에는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나와도 전혀 무섭지 않아요.”

 

“늦은 시간 수업이 끝나면 어떻게 집에 가야 하나 두려워 호신용품을 살까 고민도 했는데, 밝은 조명과 예쁜 로고젝터(LED 조명을 비춰 바닥 등에 이미지나 안전문구를 보이게 하는 장치)가 설치돼 마음도 편해지고 기분도 좋아졌어요.”

 

인천 계양구 경인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요즘 학교와 인천 1호선 계산역을 잇는 약 1㎞의 골목길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이 골목은 불과 2년여 전까지만 해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바지 벗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글이 게시될 정도로 공연음란·강제추행 사건이 빈번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학생들이 마음 놓고 활보한다. ‘지역 환경 개선’을 위해 학생과 주민, 경찰과 지방자치단체가 한마음으로 참여한 덕분이다.

인천 계양구 경인여자대학교 인근 골목길 일대에 ‘셉테드’ 사업을 시행하기 전 각종 쓰레기가 방치된 골목의 모습. 인천 계양경찰서 제공

이들은 건물 외벽과 도로 바닥 곳곳에 LED 조명을 설치해 골목을 밝게 만들었고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던 곳에는 대형화분을 옮겨놓았다. 무질서하게 방치돼 있던 불법 주정차 차량을 적극 단속했고 범죄예방을 위해 골목 일대에 폐쇄회로(CC)TV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 모든 과정에 학생과 주민들의 의사가 먼저 반영됐다.

 

지역 환경 개선과 도시·건축설계 등을 통해 범죄 발생 요인을 최소화하는 ‘셉테드(CPTED·범죄예방을 위한 환경설계기법)’가 재조명되고 있다. 홀로 거주하는 여성 1인가구의 증가와 함께 ‘신림동 원룸 사건’ 등 여성의 주거지까지 뒤쫓아 성범죄·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여성 대상 범죄를 막기 위한 셉테드가 ‘반짝 도입’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셉테드 설치·관리를 위한 명확한 법률 마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골목 환경 개선 후 범죄 40% 감소”

 

셉테드란 지역 특성에 맞는 적절한 환경 개선 및 도시계획 등을 통해 잠재적 범행 욕구는 낮추고, 일상 속 안전감은 높이는 다양한 기법들을 말한다. 한장의 깨진 유리창과 같이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문제점이나 무질서한 환경을 방치할 경우, 해당 장소가 ‘관리되지 않는 곳’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 종국엔 주위 환경 모두 망가질 뿐만 아니라 큰 범죄로까지 이어진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예쁜 벽화를 그려 사람들이 해당 장소를 왕래하도록 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투명 유리로 설치해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외부에서 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셉테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생활에 적용돼 왔다.

8일 인천 계양경찰서에 따르면 골목길 환경 개선에도 셉테드가 적용됐다. 경인여대 골목길 환경 개선 효과는 놀라웠다. 골목길 환경 개선이 완료된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의 5대 범죄(살인·강도·강간·절도·폭력) 발생률은 직전 동기 대비 37.5%, 전체 범죄 발생률은 14.2%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일 오후 8시쯤 경인여대 인근에서 만난 A(21·여)씨는 “곳곳에 설치된 여성안심마을 표지판과 CCTV 설치 경고판이 외부인에게는 경각심을 주고 학생들에게는 안전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며 “밝아진 거리 덕분에 마음 편히 귀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 완료 직후인 지난해 10월 경인여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63%가 셉테드 설치물을 통한 지역 환경 개선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허현미 경인여대 학생처장은 “과거 밤길이 무섭다거나 이상한 남성들이 쫓아온다는 학생들의 신고가 학생처로도 들어왔었지만, 사업 이후 (신고가) 접수된 경우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CCTV부터 빅데이터까지…범죄 막는 ‘셉테드’

 

통계청과 여성가족부 자료를 보면 여성 1인가구는 꾸준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 여성 1인가구는 294만2000가구로, 2015년(261만1000가구) 이후 최근 3년간 매년 10만가구 이상씩 증가했다. 통계청은 올해 여성 1인가구가 300만가구에 이르고, 2037년이면 400만가구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처럼 늘어나고 있는 여성 1인가구는 주거침입 및 성범죄 등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7년 발표한 ‘1인가구 밀집지역의 안전실태와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여성 1인가구의 경우 주거침입 범죄를 당한 경우가 남성 1인가구의 두 배가 넘었다. 같은 해 울산대 강지현 교수(경찰학)는 여성 청년 1인가구가 범죄를 당할 가능성은 남성보다 2.276배, 특히 주거침입 범죄를 당할 가능성은 11.226배 높다는 분석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원룸에 거주하는 대학생 김모(23·여)씨는 “요즘에는 집조차 안전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며 “(귀갓길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집이 어디인지 들키지 않기 위해 번화가 쪽으로 되돌아가곤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여성대상범죄를 사전에 막고,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앞선 경인여대의 사례처럼 여성 1인가구 밀집지역 등에 셉테드의 적극적 적용 및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셉테드는 범죄가 발생할 수 있는 요인들을 사전에 최소화해 잠재적 범죄 욕구를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CCTV 및 조명 설치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사람이 이용하지 않는 공간을 산책로 또는 운동시설로 조성하거나,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제거하는 등 지리적·공간적 특성에 맞춰 범죄자에 대한 자연적 감시·통제가 가능하도록 하는 다양한 기법들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빅데이터를 활용한 셉테드 기법 도입도 활발히 진행되는 추세다. 영등포구는 지난해 여성 1인가구 주거지와 야간 여성 유동인구 등의 빅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여성안심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침입 범죄가 예상되는 장소를 뽑아 ‘사물인터넷(IoT) 문 열림 센서’를 보급하는 등 여성대상범죄 예방을 위한 셉테드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보여주기식 말고, 명확한 법률 근거 필요”

 

전문가들은 셉테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실질적 범죄예방 효과를 위해서는 ‘보여주기식’ 설치보다는 명확한 법률적 근거와 이를 통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세종대 정용욱 교수(건축학)팀이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금길’ 일대에 적용된 셉테드 설치물들의 범죄예방 효과를 분석한 결과, 차량이나 쓰레기로 인해 셉테드 설치물이 가려지는 등 적절한 사후관리가 이뤄지지 못한 경우 예방 효과 또한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사후관리가 진행되지 못하는 이유로는 명확하지 않은 법률 규정으로 인한 셉테드 관련 예산 확보의 어려움이 꼽힌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전국 243곳의 지자체 중 셉테드 관련 조례를 제정·시행하고 있는 곳은 214곳에 달하지만, 명확한 법률적 근거가 없는 탓에 예산 확보 및 시행·사후 관리 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하혜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자체가 조례로 시행할 수 있는 건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셉테드는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라 상위법 없이 조례로만 진행할 경우 차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명확한 상위법이 있어야 (셉테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셉테드학회 학회장인 이민식 경기대 교수(경찰행정학)는 “셉테드와 관련된 행정규칙 등은 있지만 통일된 상위법이 없는 상황이라 통일된 규정도 부족하고, 여러 주체가 중구난방식으로 진행하다 보니 예산이 낭비되는 측면도 있다”며 “‘범죄예방기본법’처럼 상위법이 제정되면 관련 부처들과 지자체도 일사불란하게 (셉테드 관련 사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1994년 뉴욕 ‘범죄와의 전쟁’ 셉테드로 범죄율 40% ‘뚝’

 

셉테드(CPTED·범죄예방을 위한 환경설계기법)를 활용한 범죄예방정책은 여러 국가에서 그 효과가 입증돼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영국과 호주 등 일부 국가에서는 관련 법령과 인증제도 등을 통해 셉테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8일 국회입법조사처와 범죄예방디자인연구센터 등에 따르면 셉테드란 용어는 1971년 미국의 도시설계학자인 레이 제프리가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예방’이라는 논문을 통해 최초로 언급됐다.

 

1994년 미국 뉴욕시장으로 취임한 루돌프 줄리아니가 셉테드 기법을 활용해 당시 흉악범죄가 횡행하던 뉴욕의 범죄율을 대폭 낮추면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얻게 됐다. 마피아를 소탕한 검사 출신인 줄리아니는 뉴욕시장 취임 당시 뉴욕을 ‘범죄로부터 안전한 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언했고, 시민들은 당연히 경찰력 등을 동원한 범죄소탕이 시작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예상과 달리 줄리아니는 당시 뉴욕의 길거리와 지하철을 뒤덮고 있던 낙서를 지우는 등 지역 환경 개선에 집중했고, 그 결과 자신의 첫 임기 중 뉴욕의 범죄율을 40%가량 감소시킬 수 있었다.

 

영국은 1998년 ‘범죄와 무질서에 관한 법률’ 제정을 통해 지방정부가 주민의 안전과 범죄예방을 위한 정책 등을 마련하도록 규정했다. 이와 함께 경찰과 내무부 등이 협력해 ‘범죄예방디자인(Secured By Design·SBD)’ 인증제도를 운영하면서 셉테드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도화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의 경우에는 ‘환경계획 및 평가법’을 통해 모든 건축설계 허가권자는 새로운 개발 신청에 대해 범죄 위험성을 평가하도록 했다. 일본은 셉테드 기법으로 범죄예방 효과를 갖춘 공동주택 등에 ‘방범우량맨션 인증제도’를 도입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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