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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수필이 쓰이고 읽히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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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01 22:28:24 수정 : 2019-11-01 22: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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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함과 소통성의 문학 / 분노의 시대 속 위안 돼 / 깊은 사유와 문장 통해 / 새로운 자신 발견 인도

여러 지역이나 문학단체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수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인적 규모로나 문단에서의 역할로나 퍽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는 언제나 시, 소설, 희곡이었고,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이 창작과는 다른 부가적 위상을 얻고 있었다. 말하자면 수필은 순수 창작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격 장르에서 배제하는 관행이 있었던 셈이다.

사실 수필은 시, 소설, 희곡처럼 순수한 의미에서의 허구물이 아니다.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고, 특유의 고백적 성격 때문에 사인성(私人性)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에 비해 수필가를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 문학평론가

그러나 최근 수필의 도약과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그 까닭은 먼저 인적 저변의 확대에서 찾을 수 있다. 각종 수필 관련 매체나 신인 등용문 제도의 활성화는 오래전 문청(文靑) 시절을 겪은 중·장년들을 수필 장르로 초대하는 최적의 흡인력을 마련해주었다. 이 연배의 사람들은 시나 소설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수필에 더 깊은 친화력과 선호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만큼 수필은 다양한 형식과 주제와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고, 직접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투명한 전언(傳言)을 지향하는 문학이다.

그렇다면 수필의 미학적 속성은 무엇일까. 그 하나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면, 다른 하나는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려는 계몽의 의지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울리는 명작 수필은 한결같이 이러한 진솔함과 소통성을 가지고 있다. 이때 고백과 소통의 내용이 타자의 삶에 충격과 변형을 주려는 계몽 의지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수필은 자연과 인생을 관조해 그 형상과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도 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새로운 삶의 지향성을 명쾌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수필을 쓰는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하는 일상에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적 감동과 깨달음을 평이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문장으로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필이 아무나 쓸 수 있는 손쉬운 양식은 아니다. 그 안에는 인생에 대한 예리한 비평적 감각도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적정한 해석 과정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문장의 매혹이 있어야 한다. 헝가리 출신의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는 수필을 두고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리는 양식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수필이 이러한 은밀하고 신비로운 운명의 영역에 대해 직접성과 균형성으로 천착한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분노가 일상이 돼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이때 우리는 잘 쓰인 수필을 통해 타인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러한 분노의 일상화 분위기를 부드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절의 피천득, 법정, 장영희 등이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수필가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위상과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수필은 삶에 대한 그리움과 긍정의 미학으로 우리를 위안하고, 치유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의 보편적 감동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타자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보편의 언어를 추구해가는 것을 더한다면, 수필은 매우 충실하고도 고유한 문학 중심부의 역할을 새롭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안정돼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쓸쓸함이 남는 가을에, 좋은 수필의 깊은 사유와 문장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은 단연 매혹적일 것이다. 바야흐로 수필이 쓰이고 읽히는 시대이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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