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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살자’는 사회변혁 영화 운동의 이정표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10-28 22:00:00 수정 : 2019-10-28 21: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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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영화제작집단 장산곶매 ‘파업전야’ / 서울 소재 대학의 영화패들 뜻 모아 / 예술 활동의 민주적 실천 표방 나서 / 집단 창작 방식으로 전 과정 만들어 / 노동자 대투쟁 전국 휩쓸던 1987년 / 핍박받는 공장 노조 결성 과정 담아 / 사측 분열 탄압에 연대 투쟁 맞대응 / 노동자 다양한 삶의 결 놓치지 않아 / 노태우 정권 상영 자체 불법 규정 / 게릴라 상영으로 대응 30만명 관람
영화 ‘파업전야’에서 고학생 동생을 둔 한수(오른쪽)는 가장 역할을 하면서 인근 공장에 다니는 여자친구 미자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한다. 미자는 파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면서 노측과 사측 사이에서 번민하는 한수를 정의로운 길로 이끌려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파업전야’(1990)는 중앙대와 한양대, 서울예전 등 서울 소재 대학 영화패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영화 제작 집단 ‘장산곶매’가 제작한 두 번째 장편영화(첫 장편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1989))다.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과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격변은 민주화의 길로 한국 사회를 이끌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정치적 과제와 노동자의 권리 수호가 화두가 되자 대학 내 영화 동아리, 문화 운동 단체들도 사회변혁의 대의에 동참한다. 이러한 흐름의 정점을 보여 주는 영화가 ‘파업전야’다.

‘파업전야’는 예술 활동의 민주적 실천을 표방하면서 시나리오 집필부터 촬영, 편집, 상영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집단 창작 방식으로 수행했다. 제작에 참여한 공동 창작자들은 이후 한국영화계의 유력 영화인으로 진화했는데, 공동 제작자로 이은 명필름랩 대표와 이용배 계원예술대 교수가, 공동 연출자로는 ‘접속’(1997)과 ‘텔미썸딩’(1999)의 장윤현 감독,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1998)과 ‘이웃집 남자’(2009)의 장동홍 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알포인트’(2004)와 ‘GP506’(2007)의 공수창 감독 등이 참여했다.

올해 5월1일 노동절에 30년 만에 재개봉한 ‘파업전야’ 포스터. 디지털 복원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4K 디지털 복원으로 화질과 음질을 개선했다.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변혁의 시대, 노동자의 현실을 그리다

때는 노동자 대투쟁이 전국을 휩쓸던 1987년 가을. TV에서는 “법질서 문란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엄혹한 시국에도 금속 공구를 제작하는 동성금속 단조반은 바쁘게 돌아간다. 과중한 장시간 노동, 회사의 비인간적 처우에 시달리던 단조반의 리더 원기와 석구, 대학생 출신 완익은 반원들과 함께 노조 결성을 모의한다. 단조반을 중심으로 절단반, 포장반 등이 가담하며 판이 커지자 이를 눈치챈 회사 관리자들은 어용 노조를 만들어 분열을 획책하고, 회유와 겁박, 폭력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의지를 꺾으려 한다. 동생 학비를 대면서 인근 공장에 다니는 여공 미자와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한수는 회사 측에 동향 정보를 흘리고 구사대에 가담하면서 단조반 식구들과 멀어진다. 급기야 사측은 노조 설립 주동자들을 해고하고, 해고 노동자들이 회사 사무실을 점거하자 경비 용역들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의(不義)한 요구에 굴복했던 한수는 처절하게 저항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연대투쟁에 나선다.

‘파업전야’는 발표 당시 민족 영화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동 대중의 삶과 지향에 대한 진솔한 스토리, 캐릭터의 전형성과 집단성, 치열한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다양한 의식과 행동 양식을 가진 노동자 유형을 대변한다. 수십 년의 현장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최고참 동업, 단조반 리더이자 해고 노동자 출신인 원기, 원기와 함께 노조 결성을 주도하는 강직한 성품의 석구, 근면하고 성실하게 돈을 모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한수, 대학생 출신으로 위장 취업한 완익, 기계를 만지다 손가락을 잃은 춘섭, 놀기 좋아하는 뺀질이 재만, 해병대 출신의 반공주의자이지만 속 깊은 의리파 재필 등이 군상형 인물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노조 결성을 막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사측 관리자로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전무, 노조 탄압을 기획하는 송 부장과 주임, 행동대장 격인 작업반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장산곶매는 위장 폐업으로 직장 폐쇄에 들어간 스패너 제작 공장을 섭외해 촬영했고, 노동 현장 취재를 통해 형상화된 인물과 에피소드로 직조한 시나리오에는 생생한 리얼리티가 담겼다.

민주노조 결성 과정이 스토리의 중심 줄기로 전개되는 ‘파업전야’는 그저 열심히 살아 보려 했던 순박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고양되는 양상을 치밀한 스토리 안에 녹인다. 저마다 의식수준이 다른 극 중 인물들은 점진적으로 알을 깨고 나온다. “노조 좋은 거 알지. 그게 마음대로 돼?”라며 노조 결성에 의문을 품었다가 노조 집회에 다녀온 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춘섭, 뿌리 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동요하다 강인한 행동주의자로 변화하는 재필,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하던 유약함에서 깨어나 계급적 각성을 이루는 한수는 노동자의 진화하는 계급의식을 형상화한다. 단조반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과정 역시 월급을 올리고 잔업이나 줄여 보자는 소극적 투쟁에서 “노동자는 세상의 주인, 인간답게 살아 보자”는 정체성에 대한 자각으로 상승한다.

영화 ‘파업전야’에서 동료들이 노동조합 설립을 관철하기 위해 점거농성을 하다 용역 깡패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쓰러지고 끌려가는 모습을 본 한수(가운데)와 동업(오른쪽), 노동자들은 저열한 노조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기계를 멈추고 행동에 나선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30년의 시간을 이긴 노동 영화의 전설

노동 현장의 역동성과 함께 ‘파업전야’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미학적인 차별성이다. ‘노동자 의식의 성장’이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부 장면들은 선동적인 장면 연출과 편집을 사용한다. 일례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후반부 장면들을 들 수 있다. 용역 깡패들에 의해 노동자들이 참혹하게 쓰러져 가는 진압 장면의 연출은 분노 게이지를 비등점까지 올린다. 이를 보고 마음을 돌리는 한수의 각성과 노동자들 연대를 형상화하는 몽타주 장면은 함축적 묘사의 결정체다. 회사가 제시한 달콤한 대가가 기만과 술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한수의 내면에서는 모닥불처럼 분노가 타오른다(실제로 타오르는 모닥불 뒤의 한수를 위압적인 로 앵글(Low angle)로 찍었다). 돌아가는 기계를 멈추고 스패너를 치켜올리는 한수, 불끈 쥐어지는 주먹, 다시 멈추는 기계, 움켜쥐는 연장들에서 카메라는 회전하기 시작하고, 작업을 멈추고 뛰쳐나오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잡힌다. 이 선동적인 편집의 몽타주로부터 실제 노동자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다소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교조적인 문법이지만, 계산된 편집으로 영화와 현실이 합일되는 이상적 결말을 겨냥한다.

‘파업전야’는 영화 상영을 두고 벌어진 대대적인 공권력 탄압으로도 한국영화사에 기록돼 있다. 노태우 정권이 영화 상영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자 관련자들은 게릴라식 상영으로 대응했다. 상영 첫날인 1990년 4월6일, 수원과 광주에서 경찰이 상영관에 난입해 필름과 영사기를 압수한 것을 필두로 제작자 이용배에게 지명수배가 떨어졌고, 순회 상영을 계획했던 대학가엔 최루탄과 헬기까지 동원돼 상영을 막았다. 공권력의 강압에도 ‘파업전야’는 101주년 노동절을 기념해 대학과 노동 현장, 파업 중이던 KBS, 현대중공업 등 전국 동시 상영에 돌입해 약 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파란을 일으킨다.

‘파업전야’는 치열한 현실 인식에 기초한 리얼리즘 영화다. 이 영화가 공개될 당시 한국영화계에는 하층민들의 일상을 제재로 한 리얼리즘 영화가 더러 있었지만, 그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체제의 모순을 묘파한 경우는 없었다.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실감 어린 묘사를 보여 주는 ‘파업전야’는 노동자들의 삶 속에 스며 있는 다양한 결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폭넓은 공감을 끌어냈다.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인물이 따로 없고, 보조 인물이 주 인물에 종속되는 여느 드라마와 달리 허투루 버려지는 인물도 없다. 계급의식 각성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주된 갈등을 형성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양상이 제대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을 ‘파업전야’ 제작진은 잊지 않았다. 사회변혁에 복무하는 영화 운동의 이정표로 남은 이 영화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복원된 판본이 올해 노동절에 30년 만에 재개봉되기도 했다. 현실을 자각하고 변혁하려는 예술 실천의 전형적 샘플을 보여 주는 최초의 노동 영화로서, 이 작품의 가치는 30년이 지난 현재도 결코 가볍지 않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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