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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로 ‘천인갱’에 묻힌 조선인들… 죽어서도 못 돌아왔다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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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20 06:00:00 수정 : 2019-09-19 19: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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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숙제 던진 하이난과 하와이 <끝> / 강제동원 피해자 恨 서린 하이난 / 휴양지에 숨겨진 아픈 역사 / 일제, 태평양전쟁 보급기지로 활용 / 조선 각지 수형자들 강제로 끌고 와 / 철광석 채취·비행장 건설 등에 동원 / 불령선인 2000명 ‘지옥의 삶’ / 해방 사실도 안 알리고 끝까지 학대 / 군수물자 은닉 시킨 뒤 죽이고 묻어 / 1300명 매장 추정… 130구 발굴 그쳐 / 한인 사업가 덕분에 훼손 면해 / 문용수씨, 유골 발굴·추모사업 병행 / 해마다 토지 사용료 등 수억원 지출 / 70여년 지났지만 국내 봉환 유해 ‘0’

중국 최남단의 섬, 하이난(海南).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이 섬은 중국에서 우리의 제주도와 비슷하게 인식되는 곳이다. 면적은 제주도보다 20배 정도 넓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품은 하이난은 화려한 휴양시설들이 들어서며 ‘천국 같은 휴양지’로 변모하고 있다. ‘천국’ 같은 현재 겉모습의 역사지층 아래에는 ‘지옥’ 같은 과거의 삶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덮으려는 듯 맹렬히 탈바꿈하고 있다.

현재의 하이난에선 떠올리기 힘든 ‘지옥’ 같은 삶을 겪은 이들은 76년 전인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에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다. 일제에 의해 하이난으로 강제동원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강제노동을 한 이들은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한 채 현지에서 눈을 감았다. 7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을 품은 채 땅 아래 묻혀 있다. 갈수록 그들을 기억하는 피붙이도 줄어드는 등 점차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하이난에서조차 그들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시간이 더 늦어지면 그들은 영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2001년 천인갱 발굴 당시 나온 유해. 하이난천인갱희생자추모회 제공

◆잔인한 일제의 학살 현장 ‘천인갱’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인 7월 하이난 남부에 있는 싼야(三亞)공항에 내리는 순간 동남아시아에서 접하던 습함이 그대로 전해왔다. 하이난은 위도상 베트남 하노이보다 아래다. 하이난 남쪽 바다 건너편이 베트남의 다낭이다. 무더위와 높은 습도로 가만히 있어도 온몸은 땀범벅이 된다.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싼야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면 열대림 주변의 농촌 마을 ‘난딩촌’에 이른다. 단층 가옥들이 모여 있는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조선촌’이었다.

조상 대대로 이 마을에 산 마을 주민 린관차이(54)씨는 “딱히 마을 이름이 있던 곳이 아니었는데, 일본군이 끌고 온 조선인들이 모여 살았다”며 “그때부터 조선촌으로 불리게 됐다”고 말했다. 한여름 무더위에 상의조차 입지 않고 그늘에 앉아 있던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들었던 당시의 얘기를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조선인을 나무에 매달아 막대기로 머리, 몸, 다리 등 온몸을 사정없이 때리는 일이 매일 벌어졌대요. 말라리아나 콜레라 등 병에 걸린 사람들은 어딘가로 끌고 갔는데, 돌아온 이들이 없었고요. 다 불에 태워 죽였다고 하더군요.”

현지인의 얘기는 일제 만행의 일부에 불과했다. 마을 초입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벽돌로 둘러싸인 공터에 이른다. 바로 하이난을 조선인에게 ‘지옥’으로 만든 ‘천인갱’이다.

잡초로 뒤덮여 있는 공터 가운데 있는 기념비, 추모비 등 4개의 비석과 현지인들이 몰래 갖다 놓은 관들이 눈에 들어온다. 추모비엔 조선인이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끝내 집단학살된 후 이곳 천인갱에 묻혔고, 현재 130여구의 유골이 발굴됐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천인갱이란 것을 알리는 유일한 존재가 이 비석들이다.

중국 하이난 천인갱에 세운 추모비. 추모비 주변이 잡초로 뒤덮여 있다. 하이난천인갱희생자추모회 제공

공터 한편의 ‘영락제’(영원히 편안하고 즐거운 곳에 모시겠다는 의미)란 이름을 단 허름한 건물엔 이곳에서 발굴된 130여구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130여구의 유골보다 더 많은 유해가 공터 땅 아래에 묻혀 있다.

땅 아래 묻혀 있는 이들은 일제강점기 때인 1943년부터 ‘남방파견보국대’란 명목으로 조선 땅에서 하이난으로 강제동원된 이들이다. 일제는 1939년 하이난을 침공해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원료 보급 기지로 활용했다. 철광석 광산, 철로, 항구, 비행장 등을 건설할 노동력 충원을 위해 조선 각지 형무소에서 징발된 ‘수형자’ 2000여명을 하이난으로 강제로 보냈다. 이들 상당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에 저항한 조선인을 부정적으로 이르던 말)이었다.

 

천인갱에 묻힌 이들은 강제노역 도중 숨진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는 패망 후에도 조선인에게 해방 소식을 알리지 않은 채 학대하고 살해한 후 천인갱에 묻었는데, 전체 매장된 조선인이 1200∼1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의 일제침략 기록자료인 ‘일군해남성침공실록(日軍海南省侵攻實錄)’에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한 뒤 고립된 일본군 부대가 조선인 징용 1000여명을 동원, 싼야시 난딩촌 부근의 산기슭에 굴을 파고 무기와 군수물자를 은닉하면서 이 작업에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은닉장소 옆에 굴을 파게 한 뒤 총알을 아끼기 위해 이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매장했다’고 기록돼 있다.

◆사업가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천인갱’

천인갱이 그나마 현재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이난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인 문용수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이난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아무 연관이 없던 그였지만, 하이난을 찾아온 천인갱 생존자와 만나 사연을 접한 뒤 1990년대에 관련 부지 3만3000㎡에 대한 토지사용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기업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토지 사용료 등을 제때 내지 못해 중국 정부가 일부 토지의 사용 허가를 취소해 현재는 약 1600㎡로 줄었다.

문씨는 매년 수억원의 비용을 쓰며 천인갱 부지 매입 및 유지뿐 아니라 유골 발굴, 추모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하이난 천인갱 희생자 추모회’ 등을 설립해 단 한 구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천인갱 유해를 봉환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문용수 하이난천인갱희생자추모회 이사가 천인갱에서 발굴한 유골을 모아놓은 추모관 영락제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하이난천인갱희생자추모회 제공

최근엔 하이난이 빠르게 개발되면서 마을 주민들이 천인갱을 개발을 가로막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 개발 열풍이 이 마을까지 미치면, 천인갱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고국에 오지 못한 천인갱 유해 봉환을 추진하고 있지만, 중국 정부와 협의 등 난관이 많아 조속한 시일 안에 봉환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문씨는 “강제동원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내가 하지 않으면 이곳을 지킬 사람이 없지 않냐”며 “우리 정부가 빨리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해가야 이 일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난=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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