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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의동행] 다시 꽃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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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03 23:37:33 수정 : 2019-09-03 23: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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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하다. 왜 그 꽃이 처연하게만 보이는지. 예전처럼 그렇게 반갑고, 한 계절, 환희의 축포로 보이지 않는지. 붉고 환한 꽃. 가지마다 그 꽃들로 붉다. 평소에는 그 붉음이 수줍음으로 보였고, 미래에 대한 기약으로 보였다. 올해는 아니다. 꽃은 그 꽃인데, 여느 해와 같은데, 왜 올해는 그리 달리 보일까. 내 마음의 풍경이 우울하고 심란한 까닭이다. 정말, 꽃이 피었다. 백일홍, 일명 자미화로 부르는 그 꽃들로 길가가 붉다. 그렇게 꽃들은 한결같게 피고 지는데, 사람 마음은 왜 그렇듯 변덕스러울까.

백일 동안 피어 있다 해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그 나무의 정식 이름은 배롱나무이다. 수피가 반들반들해 더 고아하게 보이는 배롱나무는 만지면 간지럼을 탄다 해서 ‘간지럼 나무’로도 불린다. 따듯한 곳을 좋아하는 나무의 특성상 남도 지방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사생결단의 중앙정치에 염을 느껴 낙향한 선비들이 사랑했던 꽃이 그 꽃이다. 자연 속에 파묻혀 안빈낙도하던 선비들은 그 꽃을 벗 삼아 인생을 노래하곤 했다. 그래서 그 꽃을 선비의 꽃이라고도 부른다. 선비들이 사랑했던 꽃답게 그 꽃은 우리에게 희망을 상징한다. 꽃이 다 지면 햅쌀이 난다 해서 그 꽃을 보며 배고픔을 참던 위로의 꽃이기도 하다. 그 꽃은 어느 양지바른 산비탈의 무덤가에서도 볼 수 있다. 가지가 휘늘어지게 꽃을 매단 그 넉넉함 만큼이나 사람들은 자손 발복과 가문 융성을 기원하며 조상의 산소에 그 나무를 심곤 했다. 옥황상제의 정원을 자미원이라고 부르는데, 자미화가 피어 있는 무덤의 주인은 옥황상제의 복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어쨌거나 그 꽃은 나에게 추억이 서린 꽃이다. 누군들 꽃에 대한 추억이 없을까마는 내게 그 꽃은 애틋하고, 애달픈 꽃이다. 한데 그 꽃이 소리 없이 피었다. 우리의 관심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을 때, 시끄럽고 어수선한 세상일로 복작일 때, 그 꽃은 여름의 열기 속에서 기운을 잃지 않고 한 계절, 생의 에너지를 꽃으로 틔워냈다. 그 꽃은 위악한 세상 속에서도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고 꽃을 피웠던 것이다. 절정의 순간도 지나고, 이제 한 시절을 마무리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그제야 꽃을 보았다. 이 어수선한 세상에서도 나와는 달리 꽃은 묵묵히 제 일을 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먼저 부끄러웠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꽃은 다음해를 기약하며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꽃은 또 계절을 기다려 꽃을 피울 것이다. 그때는 부디 우리를 짓누르는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근심과, 분노와, 질투와, 갈등에서 벗어나 환한 마음으로 그 꽃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의 표정도 그 꽃처럼 환했으면 좋겠다. 불투명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꾸만 멈칫거리는 나를 꽃들이 나무란다. 멈추지 말고 가라고.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고.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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