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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북한 외교, 2차대전 때 루스벨트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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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18 07:00:00 수정 : 2019-08-18 10: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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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앤빌 작전' / 노르망디와 달리 영·미에서는 '잊힌 전투' 돼 / 루스벨트, 처칠의 강한 반대에도 작전 강행 / "미국, 소련과 잘 지내려고 영·미 동맹 훼손"
지난 6월 판문점에서 깜짝 회동을 가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왼쪽부터), 문재인 대통령,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즘 이상하다. 매년 여름에 하는 한·미 연합훈련을 “터무니없고 비싼 훈련”이라며 폄훼하더니 “한국, 일본 같은 동맹국들이 미국에서 더 많이 빼앗아간다”며 아시아 두 동맹국을 싸잡아 비난했다.

 

반면 6·25 전쟁 당시 미군 3만6000여명을 살해한 ‘적수’ 북한에게는 무한정 너그럽다. 북한이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둔 탄도미사일을 쏴도 “나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사이가 좋다. 유엔 결의 위반이 아니다”며 북한을 옹호하는 데 급급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미국의 한 소장 역사학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이었던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현 러시아)의 관계를 들어 ‘트럼프의 행동이 좀 독특하지만 역사상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건 아니다’는 취지의 글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15일(현지시간) 앤빌 작전 75주년 기념식에서 참가자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쟁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앤빌 작전'

 

16일 미국 유력 언론 뉴욕타임스(NYT)에 의하면 미시시피 주립대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카메론 진수(Cameron Zinsou)라는 이름의 소장 학자가 15일(현지시간) ‘앤빌 작전을 둘러싼 잊힌 이야기(The Forgotten Story of Operation Anvil)’라는 제목의 글을 이 신문에 기고했다.

 

앤빌 작전은 2차 대전 도중인 1944년 8월15일부터 미국·영국 그리고 자유프랑스 군대가 독일군 점령 하의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 지역에 약 45만명의 병력을 상륙시킨 작전을 뜻한다. 작전을 실행하기 전 보안 차원에서 작전명이 ‘드라군’으로 바뀌어 공식 명칭은 드라군 작전이 맞는다.

 

프랑스 정부는 15일(현지시간) 앤빌 작전 75주년을 맞아 지중해와 가까운 남부의 한 국립묘지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을 열었다.

 

기고문에 따르면 앤빌 작전은 세계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였다. 연합군의 주력인 미군은 작전 참가자 9만4000여명 중 전사자 95명, 부상자 385명이 발생했다. 약 2개월 전인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작전명 ‘오버로드’) 첫날 해안에 내린 미군 장병 15만6000여명 가운데 2000여명이 전사한 것과 비교하면 피해가 무척 적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5년 8월 앤빌 작전에 참여한 미군 장병들이 프랑스 남부의 해변에 상륙하고 있다. 연합뉴스

◆앤빌 작전, 영·미에선 왜 '잊힌 전쟁'이 됐나

 

남프랑스에 상륙한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자유프랑스 군대는 신속하게 북부로 진격해 독일군을 프랑스 땅에서 몰아냈다. 특히 샤를 드골 장군 휘하에 있던 자유프랑스군은 마르세유·툴롱 같은 남부 대도시들을 예상보다 빨리 점령, 1940년 6월 독일군에 참패하며 겪은 굴욕을 씻어냈다.

 

하지만 앤빌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낮다. 저자는 당시 작전을 놓고 미국과 영국 두 동맹국이 격렬하게 싸운 것에서 이유를 찾는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그리고 미군 지휘부는 앤빌 작전을 강력히 선호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나란히 실시하면 독일군을 남북으로 포위해 섬멸하는 효과가 클 것으로 판단했다. 또다른 동맹국인 소련도 독일이 불가피하게 동부전선의 군대 일부를 서부전선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여겨 앤빌 작전에 찬성했다.

 

반면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그리고 영국군 지휘부는 앤빌 작전에 완강히 반대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도 전선이 형성돼 있었는데 처칠은 그곳에서 영·미 연합군이 북으로 올라가 독일 남부를 공격하는 쪽이 더 낫다고 봤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 등을 영·미 연합군이 먼저 점령함으로써 나중에 소련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만난 연합국 정상들. 왼쪽부터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 연합뉴스

◆"미국, 소련과 잘 지내려고 영·미 동맹 훼손"

 

처칠은 총리직 사퇴까지 거론하며 앤빌 작전 포기를 요구했으나, 루스벨트는 꿈쩍도 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서부전선 독일군의 약화를 위한 앤빌 작전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과 굳게 약속한 일이므로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앤빌 작전은 예정대로 실시됐고 이 일로 처칠은 루스벨트, 그리고 미국에 악감정을 품게 됐다. 영·미의 대서양 동맹이 파산 직전까지 간 순간이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사망했을 때 처칠이 장례식에 불참한 것이 앤빌 작전을 둘러싼 앙금 탓이란 해석도 있다.

 

전후 처칠은 회고록에서 앤빌 작전을 ‘불필요한 군사적 행동’으로 깎아내렸다. 그로 인해 앤빌 작전은 영미권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고 저자는 결론을 내린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위태위태했던 영·미 관계를 저자가 요즘의 한·미 관계와 비교한 점이다.

 

저자는 “동맹이 아무리 강력해도 개별 국가는 결국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며 “앤빌 작전 당시 미국 지도자들이 영·미의 특수 관계를 훼손해가면서까지 소련 스탈린의 편을 든 것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북한에 대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이 한국, 일본 등 기존 동맹국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으나 (루스벨트의 선례에 비춰보면) 트럼프의 그런 행동이 이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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