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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회사원의 삶 통해 이상·현실의 차이 경쾌하게 묘사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08-20 06:00:00 수정 : 2019-08-19 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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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이봉래 감독의 ‘삼등과장’ / 매 장면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 연속 / 익살스러운 몸짓·맛깔난 대사 이어져 / 가족드라마 포맷 유지 속 脫멜로 표방 / 슬픔·애환 느낄 겨를 안 주는 코미디물 / 착한役 전문 김승호, 비굴·느글느글 연기 / 사보타주·사바사바 등 당시 유행어 압권

◆일상에 근접한 풍속 코미디

1960년대 초의 생활 풍경과 가장 근접해 있는 영화를 꼽으라 할 때 맨 앞에 서는 작품이 이봉래(1922∼1998) 감독의 ‘삼등과장’(1961)이다. 제목처럼 내세울 것 없는 지위의 평범한 회사원의 직장과 집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담아낸 풍속 코미디에 해당한다. 1950년대에 등장한 영화들이 실제 현실보다는 민주주의와 같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향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면, ‘삼등과장’은 보다 구체적인 일상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서민의 삶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낙차까지를 의미 있게 포착한 보기 드문 영화다.

삼천리운수 회사의 동부출장소 소장인 구준택(김승호)은 삼대가 함께 사는 집안의 가장이다. 25년간 성실히 일해 온 샐러리맨이지만 세금을 체납할 정도로 박봉인 데다가 상사의 꾸중은 일상이다. 게다가 막내딸 영희(도금봉)가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가족이 알게 될까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던 차에 송 전무(김희갑)는 자신의 정부인 명옥(윤인자)을 위한 댄스홀을 영업소 2층에 열어 달라는 곤란한 부탁을 하고, 구 소장은 그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그 덕분에 후생과장으로 승진하지만, 댄스홀을 둘러싸고 회사에서 좋지 않은 말들이 나오고 거짓말과 오해가 거듭되면서 아내(황정순)까지 자신과 명옥의 관계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 위기에서 그는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코미디답게 분위기는 시종일관 밝다. 매 장면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익살스러운 몸짓, 맛깔난 대사가 이어지며 웃음을 유발한다. ‘로맨스 빠빠’(1960)나 ‘박서방’(〃), ‘마부’(1961)처럼 선량한 아버지의 아이콘인 배우 김승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삼등과장’은 한결 경쾌하다. 웃음과 눈물을 적절히 섞은 여타의 가족 드라마와 달리 ‘삼등과장’은 가족 드라마의 포맷은 유지하면서도 멜로드라마와 섞이길 거부한다. 슬픔이나 애환을 느낄 겨를을 주지 않고 시종일관 웃게 만드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본격 코미디물이다.

 

영화 ‘삼등과장’의 구준택(김승호·사진 맨 오른쪽)은 자식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멋진 아버지다. 직장에서의 굴욕적인 모습을 가족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소심한 가장이기도 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평범한 이들의 개성과 속물성

가정만이 아니라 직장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까닭에 등장인물들은 그 어느 영화보다 다양하다. 직장 내 위계 관계, 신구 세대의 차이, 남녀의 반목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이 다뤄지는 한편, 가정의 소소한 일상사들이 전개된다. 벌어지는 일들은 대개 너저분하고 범속한 이야기이고 인물들 역시도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인물은 드물다. 심지어 저마다 개성이 부여돼 있다. 그 각각의 개성은 이 영화가 인간 사회 내부의 차이에 대해 열려 있으며, 모든 인물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을 포함해 대부분 인물은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선량하다.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 윤리적으로 옳기만 한 사람도 없다. ‘박서방’이나 ‘마부’에서 더없이 착하기만 한 아버지 역할을 맡은 김승호도 이 영화에서는 마냥 순박하지만은 않다. 집에서는 좋은 아버지이지만, 직장 상사 앞에서 비굴해지고 곤란한 상황이 닥치면 거짓말로 둘러대기도 곧잘 한다. 공무원들은 다 썩었다며 통쾌한 일침을 날리는 그의 아내조차도 세무서 직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막내딸과 사랑에 빠지는 권오철(방수일)처럼 옳은 말을 하는 예외적 인물도 있지만,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그 또한 잘못된 상황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전무 집에 선물을 보내겠다며 분주한 아내를 두고 뭐라 말리는 가족은 없다. 다들 조금씩은 비리에 동조한다.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정부를 챙기고자 하는 송 전무조차도 엄처시하(嚴妻侍下·엄한 아내를 모시는 그 아래)의 공처가란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영화는 다툼이 있어도 어느 한 사람만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입장과 처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 결국 갈등과 다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진심으로 잘못을 빈다면 용서하지 못할 일도 없다. 미래를 향한 낙관적 시선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려운 건강함이 전체적으로 녹아 있다.

 

영화 ‘삼등과장’에서 구준택의 막내딸 영희(도금봉)와 권오철(방수일)은 비슷한 나이의 젊은 세대이면서도 생각과 입장이 서로 다르다.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다 결국 사랑에 빠진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말들의 향연

코믹한 요소는 곳곳에 산재한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과 우스꽝스러운 행동도 그러하지만, 본격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대사들이다. “4·19 혁명도 못 바꾸는 것이 있다”거나 “정치인은 다 도둑놈”이라는 비판적인 말들은 시원한 웃음을 선사한다. 농구를 “망아지 새끼마냥 꽁꽁 뛰기만 하는 것”이란 표현이나, 헛소문을 내는 딸을 “참새 모양으로 잘잘거리고 다녀서 그게 문제”라 하는 아버지의 말은 정겹다. “혀를 뽑아 버리고 싶다”든지, “여우 같은 년의 가죽을 아주 홀딱 벗겨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식의 공격적인 말들도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오버센스’(너무 예민하거나 지나친 생각)나 ‘스타일 구긴다’, ‘사바사바’(뒷거래를 통해 떳떳하지 못하게 은밀히 일을 조작하는 짓), ‘사보타주’, ‘케세라세라’(que sera sera·될 대로 되라)와 같은 당시 유행어들이 영화 전체에 골고루 포진하며 세태 풍자에 복무한다. 리듬을 타듯이 유연하게 연결되는 말들의 향연 덕분에 관객이 지루할 틈이 없다.

‘삼등과장’은 4·19 혁명 직후의 사회나 공직자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풍자로 정평이 나 있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 이 영화가 보여 주는 풍자는 그리 차갑거나 날카롭지 않다. 세상에 만연한 몰윤리에 대한 비판만큼이나 평범한 소시민들의 자기 풍자가 비중 있게 이뤄지는 까닭이다. 등장하는 사람 누구나 예외 없이 풍자의 대상이 되지만, 그것은 서민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관찰하기도 기록하기도 쉽지 않은 것들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따뜻하고 유쾌하다. 비속하게 느껴질 수 있을 말조차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은, 어딘가 부족한 평범한 이들에 대한 공감이 깔려 있는 까닭이다.

 

영화 ‘삼등과장’ 감독과 제작을 맡은 이봉래는 일본 릿쿄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모더니즘 시운동을 전개한 시인이자 영화 평론가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4·19 혁명과 영화윤리위원회

영화 속 위트와 재치는 이봉래 감독의 재능에 빚진 바 크다. 탁월한 언어 감각의 소유자였던 그는 ‘삼등과장’을 비롯해 ‘마이동풍’(1961), ‘월급쟁이’(1962)와 같은 세태 풍자물에서 특히나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영화의 성과를 이봉래 개인의 역량 덕분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는, 4·19 혁명을 계기로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민간 심의기관인 영화윤리위원회가 결성되고 검열이 완화된 탓에 사회 비판적 목소리가 자유롭게 재현될 여건이 만들어지던 때다. 물론 영화윤리위원회는 그 기능에 대한 실험이 채 끝나기도 전에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됐고, 그 이후에는 4·19 이전보다 더 엄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잘 알려진 바다. ‘삼등과장’은 그 1년여의 틈새 기간의 혜택을 받은 작품이다. 불과 몇 달을 사이에 두고 검열로 인해 비판적 대사가 삭제돼야 했던 다른 영화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꽤 행운작이었던 셈이다. ‘삼등과장’의 유머와 익살은, 민주적으로 개방된 사회에서만 코미디가 본격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 주는 한국영화사의 소중한 자산이다.

오영숙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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