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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대체 무엇인가" 정성화 절규에 관객들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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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05 06:00:00 수정 : 2019-08-04 20: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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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백색국가'서 韓 제외 이틀 뒤 찾은 뮤지컬 '영웅' 공연장
뮤지컬 ‘영웅’에서 주인공들이 단지 후 혈서로 ‘대한독립’이라고 쓴 태극기를 들어 보이는 장면. 세계일보 자료사진

“조국은 무엇입니까. 조국이란 대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4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뮤지컬 ‘영웅’의 주인공 안중근 의사 역을 맡은 배우 정성화가 사자후를 토할 때 관객들도 마음 속으로 목놓아 울었다. 극중 안중근을 몰래 돕던 중국인 친구가 일본군에 발각돼 목숨을 잃은 직후다.

 

안중근의 절규는 ‘조국을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평범한 민초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가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담고 있다. 조국, 그러니까 당시 대한제국이 굳건히 서 있었다면 굳이 제국주의 일본과의 투쟁에 하나뿐인 목숨을 바칠 것 없이 오직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일하며, 고단할지언정 행복하게 살았을 이들이다.

 

전략물자 수출우대국인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한 일본의 2차 경제보복 이틀 만에 뮤지컬 ‘영웅’을 관람했다. 우리 국민의 반일감정이 최고로 치솟은 만큼 이 뮤지컬을 선택한 관객의 태도에서도 뭔가 변화가 감지될 것이란 예상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최근 극도로 악화한 한·일 관계가 뮤지컬 같은 공연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정황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2000석이 거의 빈 자리 없이 꽉 들어찬 오페라극장은 전과 마찬가지로 공연 내내 흐느낌이 가득했다.

 

뮤지컬 ‘영웅’에서 주인공 안중근 의사 역을 맡은 배우 정성화. 세계일보 자료사진

◆단지 장면에서부터 눈시울 붉힌 관객들 

 

첫 장면부터 그랬다. 자작나무 숲에서 안중근이 동료 항일투사 11명과 왼손 넷째 손가락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쓰는 광경이다. 뜨거운 피로 물든 국기를 힘차게 흔드는 모습에 관객들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갔다.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 기차역에서 일본 정계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김도형 분)를 저격하는 모습이야 모든 한국인이 익숙한 대목이니 오히려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객석의 눈물을 자아낸 것은 그 다음 안중근이 재판을 받는 장면이었다.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대한의 황제를 폭력으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살상한 죄 …  대한제국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한다며/ 세계에 뻔뻔스런 거짓말을 퍼뜨리며 세계인을 농락한 죄/ 현재 대한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일왕을 속이고/ 밖으로는 세계 사람들을 모두 속인 죄/ 동양의 평화를 철저히 파괴한 천인공노의 죄 때문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당시 쓰인 총알.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옆 헌정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비겁하게 삶 구걸하지 않는 게 효도다"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선 안중근이 되레 판사와 기자들 앞에서 제국주의 일본의 죄상을 열거하는 이 노래는 뮤지컬 ‘영웅’의 최고 명곡으로 꼽힌다. 안중근의 논리정연한 추궁에 극중 일본인들은 혼란에 빠져 “누가 죄인인가”, “나라 위해 싸운 이들 벌할 자 누구인가” 등을 외친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누가 뭐래도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임선애 분)의 호소였다. 역사책에 의하면 조마리아는 아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자 되레 항소 포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아들에게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일갈했다고 하니 그녀 또한 희대의 애국자임이 틀림없다.

 

거사 후 뤼순 감옥에 갇혀 평생의 지론인 ‘동양평화론’ 집필에 매진하던 안중근한테 일본인 교도관이 찾아온다. 내심 안중근을 존경하던 이 교도관은 “어머니께서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주셨다”며 흐느낀다.

 

이는 실제 역사와도 일치한다.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사촌동생을 통해 교수형 집행을 앞둔 아들한테 직접 지은 수의를 보내며 “네가 국가를 위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앞에 내걸린 뮤지컬 ‘영웅’의 대형 포스터와 공연을 보러 온 시민들. 김태훈 기자

◆"눈물 참느라 혼났다" 관객들 잇단 호평

 

공연이 끝난 뒤 40대 남성 관객 A씨는 “울음을 참느라 혼났다”며 “안중근 의사 본인은 물론 그 모친의 유해도 아직 찾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어서 위치를 확인해 제발 국내로 모실 수 있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20대 여성 관객 B씨는 “애국이나 뭐 그런 것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한 건 아니다”면서도 “공연 내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공연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 홈페이지에도 ‘중학생 딸과 함께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배우 분들 모두 짱!!! 감사합니다’ ‘괜히 정성화가 아닙니다. 이건 거금 들여서라도 꼭 볼만한 뮤지컬이에요’ ‘최고의 뮤지컬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더욱 와닿는 뮤지컬이었어요. 살면서 꼭 한 번은 봐야 할 뮤지컬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았습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벅찬 감동으로 눈시울을 붉혔네요’ 등 관람 후기가 계속 올라왔다.

 

한편 전날 인터파크가 발표한 7월 5번째 주(7월29일∼8월3일) 뮤지컬 티켓 예매에서 ‘영웅’은 예매율 13.7%로 1위를 차지했다. 2009년 초연 이후 꼭 1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공연은 예술의전당에서 오는 8월21일(수)까지 이어진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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