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지도자들은 선수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도록 늘 고민해야” [마이 라이프]

입력 : 2019-06-29 10:00:00 수정 : 2019-06-28 21:43:2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엘리트 체육’ 개혁 이끄는 신치용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 / 초등학교 5학년 때 빵 먹는 재미에 배구 / 삼성화재 7시즌 연속 챔프전 우승 지휘 / 12년간 대표팀 감독… 아시아 최강 ‘호령’ / “스포츠 미투는 지도자 인성 결여 때문 / 선수·지도자는 함께 가는 동반자 관계 / 감독은 절대 선수를 존중하고 보듬어야” / “부임후 선수촌내 음주 무조건 퇴촌 조치 / 욕을 먹어도 누군가 끊어야 한다고 생각 / 스포츠 미투로 선수촌 폐지는 말도 안 돼”

“초등학교 5년 때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거제에서 부산으로 내보냈어요. 마침 그 학교에 배구부가 있었는데 강냉이빵을 주더라고요. 너무나 맛있어 그냥 빵 먹는 재미에 운동을 시작했는데 국가대표선수촌장까지 왔네요. 하하”.

감독 시절 넘치는 카리스마와 뛰어난 지략으로 ‘코트 위의 제갈공명’이라 불리던 한국남자배구의 ‘살아있는 전설’ 신치용(64)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 하지만 배구를 시작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활짝 웃는 그의 표정 속에는 빵을 좋아하는 철부지 소년의 순수함이 아직 그대로 묻어난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당시 한국전력배구단 코치이던 그는 그때도 늘 푸근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코치라기보다는 동네 아저씨나 친근한 형처럼. 타고난 성품인가 보다. 그는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선수들을 ‘복종’시키려 하지 않았고 늘 인성을 강조했다. 2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자한 모습은 그대로다. 선수를 ‘성적’이 아닌 ‘인격’으로 바라보는 관점. 바로 이 때문에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 그가 국가대표선수촌장을 맡은 것이 아닐까. 한낮이면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흐르는 26일.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들이 몸을 만들며 구슬땀을 흘리는 진천국가대표선수촌을 찾아갔다.

# 선수, 감독 그리고 선수촌장

신치용 선수촌장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5년 11월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초대감독으로 부임해 무려 20년 동안 한 팀의 감독을 맡았는데, 실업 시절 슈퍼리그 8연패를 포함해 2014~2015시즌까지 19시즌 연속으로 팀을 챔프전에 진출시켰다. 이 중 16차례 우승했다. 특히 2001~2004년 겨울리그에서 77연승을 달성했는데 이는 3년 동안 한 번도 안 져야 작성할 수 있는 대기록이다. 또 프로배구 리그 개막 원년인 2005년에 정상에 올랐고, 2007~2008 정규리그·챔프전 통합우승을 시작으로 2013∼2014시즌까지 7시즌 연속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었다.

“국가대표 감독을 4차례, 모두 12년 동안 맡았죠.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 출전 티켓을 따낸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안타깝게도 남자배구는 그 이후로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는 감독을 맡은 1999년부터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때까지 아시아권에서는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마지막 국가대표 감독이던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을 따냈다.

신치용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이 26일 충북 진천군 선수촌로 진천선수촌 훈련장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 선전을 다짐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진천=남정탁 기자

초등학교 5학년때 배구를 시작했지만 스타플레이어의 명성을 얻지 못했던 선수 시절, 삼성화재 배구단 감독으로 연전연승하며 화려한 명성을 얻던 스타 감독, 뛰어난 행정능력이 필요한 제일기획 스포츠구단 운영담당 부사장, 국가대표선수촌의 수장.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아 보이는데 그는 지금의 선수촌장이 가장 힘들단다. 그도 그럴 것이 ‘스포츠 미투’로 한참 시끄럽던 지난 2월 선수촌을 맡아 개혁을 이끌게 됐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을’이라는 생각으로 선수와 지도자들을 대한다고 한다. “선수촌은 각 종목 최고 엘리트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선수, 지도자 모두 자부심이 대단히 높아요. 선수촌장이랍시고 절대로 지시하면 안 되는 까닭이에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도자와 선수가 훈련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지도자나 선수가 필요할 때는 반드시 달려가서 도와주고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선수촌장이 맡은 가장 큰 역할이라 생각해요.” 다만 코치와 감독으로 두 차례 올림픽 티켓을 따냈고 아시안게임에 세 차례 출전한 경험을 토대로 준비과정을 조언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고 한다.

# 선수와 지도자는 함께 가는 동반자

그는 스포츠 미투 사건이 터진 것은 지도자의 인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선수와 지도자는 같은 목표를 위해 함께 가는 동반자예요. 선수는 지도자의 손발이나 마찬가지죠. 따라서 절대로 선수를 존중해야 하고 보듬고 같이 가야 합니다. 지도자는 선수들이 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기다려야지 절대 가르치려 들면 안 되죠. 그러면 선수들은 아마 속으로 ‘너나 잘하세요’라고 할 겁니다. 지도자들은 선수가 존중하고 신뢰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신 선수촌장은 지도자의 인성이 얼마나 중요하지 한국전력 코치 시절에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감독께서 선수를 인격체로 대하며 존중하는 모습을 보고 지도자의 인성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삼성 감독을 맡아서도 첫째가 인성이라는 점을 늘 가슴에 새겼죠. 둘째가 배구 기술을 전수하는 지도력이고, 그다음은 조직과 팀에 헌신할 줄 아는 자세라고 생각해요. 또 감독의 중요한 덕목은 솔선수범이죠. 선수에게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절대 좋은 감독될 수 없죠.”

# 무시할 수 없는 국제대회 성적

국가대표선수촌 존립의 이유는 한국을 대표해 국제대회에 출전할 엘리트 선수들의 육성이다. 성적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당장 2020년 도쿄올림픽이 코앞에 닥쳤다. “스포츠는 자체가 승부이고 경쟁입니다. 지금 가장 큰 걱정은 내년 도쿄올림픽이죠. 개인 종목은 포인트를 따야 출전권을 확보할 수 있기에 해외 경기에 많이 나가고 있습니다. 단체종목은 예선을 거쳐야 하는데 쉬운 종목이 하나도 없어요. 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생활체육이 강조되고 있지만 도쿄올림픽에서 너무 성적이 저조하면 과연 누가 좋아할까요. 준비를 잘해야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어요.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를 내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노력한 뒤에도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스포츠 미투 사건 이후 지도자들이 꽤나 위축된 상황이라고 신 선수촌장은 전했다. 훈련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신체적 접촉도 선수들이 성추행으로 문제 삼을 수 있어 지도자들은 고민이 많다. 반드시 사전에 “터치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훈련을 할 정도다. 감독들은 “지도자 인권은 없느냐. 왜 우리만 잘못한다고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아야 하느냐”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감독들을 다독거리는 것도 신 선수촌장의 일이다. “선수촌은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곳이에요. 스포츠 미투 때문에 지도자들이 위축돼서 훈련을 안 할 수는 없죠. 감독이 선수들에게 할 말은 해야 합니다. 다만, 국민의 요구는 훈련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훈련 과정을 정정당당하고 투명하게 하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변해야 신뢰를 받을 수 있고, 신뢰가 있으면 훈련과정을 국민과 선수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포츠 미투로 엘리트 선수를 육성하는 선수촌이 지탄을 받고 있고 이는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극복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죠”.

국가대표 선수들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경기력이 향상된다. 따라서 훈련 욕심이 없는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란 것이 신 선수촌장의 생각이다. “선수들이 젊음을 다 바쳐가며 고생하는데, 밖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국제대회 성적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따라서 지도자는 효율적 훈련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늘 철저히 복기해야 합니다. 선수를 이끌고 가는 과정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러지 않으면 훈련의 효율성이 떨어져 헛고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 선수촌장은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종목별로 돌아가면서 지도자들과 매일 점심을 같이하고 저녁에는 소주도 한잔하며 감독들의 애로사항을 귀담아들으면서 30년 현장 경험도 함께 나눈다. 간섭 정도는 아니지만 훈련을 너무 부실하게 하는 감독에게는 스트레스도 약간 준다고 귀띔했다.

# 감독은 선수들을 무서워해야

신 선수촌장이 부임 후 강력하게 내세운 조치가 하나 있다. 선수촌 안에서 지도자는 물론, 선수도 술을 마시면 무조건 퇴촌이다. 그가 오기 전까지 선수촌에서는 암암리에서 술을 먹는 경우가 많았단다. 하지만 성추행 사건도 술을 마시고 벌어진 만큼 이제 음주는 절대 금지다. 또 선수를 자기 부하 직원 처럼 여겨 대리운전까지 시키는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욕을 먹어도 누군가는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틀린 줄 알면서 많은 사람들이 허용해 달라고 하면 내가 선수촌장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어요. 지도자는 정정당당해야 선수를 통솔할 수 있어요. 욕설이나 구타는 이제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 달에 한 차례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여는데, 옳은 것은 다 받아들이지만 당신이 틀렸다면 다 받아들이라고 강하게 얘기하죠. 이제 감독들은 선수촌장을 무서워하지 말고 선수를 무서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스포츠 미투로 선수촌 폐지 주장이 나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촌을 폐지하면 엘리트 스포츠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팀 종목은 반드시 모여서 훈련해야 팀워크가 나옵니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선수촌이 필요한 이유죠. 선수촌 일반인 개방도 불가능합니다. 선수들은 몸이 재산이고 훈련 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죠. 그런데 일반인들이 와 있으면 훈련에 방해되고 위험한 상황도 생길 수 있어요. 최고의 성적을 내기 위해 선수들에게 맞춤형으로 제작된 시설인데 생활체육인들이 이런 시설을 이용한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신 선수촌장은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얼마 전 내놓은 학생선수의 학기 중 주중 대회 참가와 대회 개최 전면 금지 방안에 대해서도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학생선수의 수업권 보장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기초종목은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최고의 선수를 육성할 수 있어요. 김연아와 손흥민이 어릴 때 운동을 시작했듯 적어도 초등학교 4∼5학년에는 시작해야 소질을 개발할 수 있습니다. 소년체전도 굳이 폐지해야 하는지 현장 목소리를 더 들어봐야 해요.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죠”.

신 선수촌장 부부는 선수촌 커플이고 딸과 사위도 농구와 배구 선수로 선수촌 생활을 겪었다. 덕분에 가족들에게서 선수촌 운영과 관련된 조언을 많이 얻는단다. 선수촌장을 맡기 전 고민할 때도 가족들은 “선수촌을 가장 많이 알고 있으니 잘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신 선수촌장은 어려운 상황에서 중책을 맡은 만큼 임기 동안 큰 사건사고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얼마 전 지도자들과 직원들이 잘 도와줘서 큰일 없이 취임 100일을 맞았어요. 그날 사비로 떡을 돌렸죠. 1주년 때도 활짝 웃으며 떡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진천=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신 선수촌장은 △1955년 거제 출생 △성지공고 행정학 △성균관대 △제일기획 스포츠구단 운영담당 부사장 △삼성화재 블루팡스 단장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0 제2회 AVC컵 남자배구대회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배구협회 이사·남자강화위원회 위원장 △2000 시드니올림픽 배구 국가대표팀 임원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총 12년)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1995년 11월∼2015년5월)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코치(1991∼1994년) △한국전력공사 배구단 코치(1980∼1995년)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