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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습득한 학생증이 바꿔 놓은 인생유전

입력 : 2019-05-17 02:00:00 수정 : 2019-05-16 2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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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천 장편 ‘젠틀맨’ 펴내 / 청량리 조폭서 대학생으로 변신 / 누아르로 시작, 캠퍼스 청춘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을 뿐이다. 누군가는 록펠러의 딸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빌 게이츠의 아들로 태어난다. 누군가는 탤런트 김미숙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동두천 김미숙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런 것이다. 그 어찌할 수 없음을 문장과 문장 간의 결합으로 스케치했을 따름인데 그 대가로 백화점 상품권을 받아서 이렇게 친구들과 샤부샤부를 먹고 있다. 그 정도의 이벤트였다. 문학까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울 사립대 인문학부 학생 김성훈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추리해 써내려간 글로 대학 문학상에서 입선했다. 당선작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칭찬받았다. 사실 김성훈은 청량리 집창촌에서 큰형님을 모시며 ‘아가씨’들을 관리하던 새끼 조폭이었다. 큰형님 생일이 돌아와 ‘큐 당구장’에 식구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는 그중 한 형님이 검은색 피에르가르뎅 양말을 사오라고 시켜 시내를 헤매다 돌아와 보니 쉰 분이 넘는 형님들이 모두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큰형님을 권총으로 쏘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다.

그 세상이란 우연히 습득한 김성훈의 학생증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학생증 얼굴과 닮아 누구도 쉽게 의심하지 않는 배경을 이용해 진짜 김성훈의 하숙집에 들어가 살면서 그가 듣던 강의를 듣고 그가 교유하던 친구들과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2011년 중앙장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심재천(사진)의 장편 ‘젠틀맨’(한겨레출판) 이야기다. 누아르로 시작해 캠퍼스 청춘물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시종 ‘쿨내’가 진동하는 ‘코믹하고 고독한’ 스타일이다. 소설 첫머리에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청량리에서 밥벌이를 하던 남자가 어찌어찌해 서울의 한 사립대에 들어갔다’는 줄거리로 요약할 법하지만, ‘정상적인 삶’의 경계를 어디까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제법 묵직한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집창촌 조폭 ‘똘마니’ 김성훈, 복부에 자상을 입어 꿰맨 자국만 25센티미터에 이르는 그는 나름대로 그 세계의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지갑 속 흑백사진에는 버려진 아기였던 자신이 있는데, 아기를 버린 엄마의 편지나 메모는 없고 눈송이처럼 보이는 흰 자국들이 번져 있을 따름이다. 살해당한 양공주 옆에 잠든 아기 주변에 범행을 저지른 미군이 증거를 지우기 위해 흩뿌린 하이타이 가루가 묻어 있는 사진도 제시한다. 양공주 김미숙 곁에는 이런 메모가 있었다고, 김성훈은 ‘문학’이라는 이름의 ‘이벤트’에 참여해 썼다. ‘건강하게 자랄 것. 젠틀한 남자가 될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 꼭 들어갈 것.’ 그 아기가 김성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그렇게 태어나고 ‘그 어찌할 수 없음’이 인생이라니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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