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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는 언제부터 의자가 놓였을까 [박상현의 일상 속 미술사 - ②]

입력 : 2019-04-30 06:00:00 수정 : 2019-04-29 21: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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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설교가 길어지면서 긴의자 생겨났다 / 신도들에 장시간 교리 설명 위해 필요 / 개신교서 먼저 등장 뒤 가톨릭도 도입 / 15C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보편화 / 700년전에 세워진 佛노트르담성당도 / 처음엔 없었지만 나중에 의자 놓였듯 /공공 장소의 문화 등도 끊임없이 변화

지난 4월 15일에 일어난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다행히 성당 건물 전체를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첨탑과 지붕 구조물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700년 넘은 인류의 유산이 불에 탄 것도 충격이었지만, 마크롱 대통령이 복원될 노트르담 성당에 현대건축적 요소를 넣는 것도 고려한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숭례문 화재 이후 최대한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숭례문 만큼이나 오래된 건축유산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노트르담 성당의 불탄 내부 모습.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은 최초에 지어졌던 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노트르담 성당이 지어진 직후로 돌아가보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른 부분이 무엇일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회 의자의 부재(不在)일 것이다. 과거 성당 건물에는 지금과 같은 긴 나무 의자(이런 의자를 ‘퓨·pew’라고 부른다)가 없었다. 그럼 사람들은 어디에 앉아서 미사를 드렸을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앉아서 미사를 드리지 않았다. 중세시대 성당을 묘사한 그림 속 사람들은 넓은 교회 실내에 그냥 서있거나 가끔씩 무릎을 꿇고 있을 뿐, 의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장소에 앉을 의자가 없었다는 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공공장소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설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유럽의 기독교 역사는 로마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즉 중동지역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유럽에 확산되는 과정에서 로마 문화를 흡수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모임의 장소인 성당이다. 로마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어진 신전 건축양식에 기원을 둔 바실리카(basilica)라는 공공건물 양식이 존재했고, 기독교의 교회는 그 양식을 이어받아 서서히 우리가 아는 교회 양식으로 변형시켰다.

전통적인 미사의 모습. 기욤 카오상 그림(1480년)

그런데 원로원 같은 장소를 제외하면 고대 로마인들은 공공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앉는다는 것 자체를 생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앉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개념이었다. 지중해 문화가 대개 그렇듯, 로마 사람들은 테이블에 똑바로 앉아서 식사하지 않았고, 침대처럼 생긴 소파에 기대어 누워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집에서는 의자를 사용했지만 앉는 것은 오늘날보다 훨씬 친밀하고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들이 공공건물에 모여서 중요한 논의를 할 때는 대개 바실리카 같은 큰 홀에 모여 선 채로 이야기했다. 지금처럼 노트나 필기구를 들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테이블에 둘러 앉았을 가능성도 적다. 성당이라는 공간은 그렇게 공공장소에서는 서있는 문화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중세 유럽의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서서 미사를 드렸고, 성당 내부에 빙 둘러있는 ‘앰뷸러터리’라는 복도를 돌아다니며 묵상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등, 지금의 예배 방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성당에 우리에게 익숙한 교회 의자가 설치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교회사를 연구한 사람들에 따르면 15세기부터 지금과 같은 긴 교회 의자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흥미롭게도 종교개혁이었다. 과거 로마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었지 설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진영에 속한 개신교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왜 로마 교황청과 갈라서게 되었는지를 일반 신도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고, 일반 신자도 사제와 차별되지 않는다는 ‘만인사제론’에 따라 누구나 교리를 알아야 했다. 그 결과 설교가 길어졌고, 사람들은 계속 서있을 수 없었고, 앉을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 의자는 개신교에서 먼저 등장했다.

하지만 구교도 질 수 없었다. 개신교와 프로파간다 전쟁을 벌이다 보니 서로 내부단속을 벌이는 과정에서 가톨릭 진영에 속한 교회들에서도 설교가 길어졌고, 신자들은 교회에서 ‘청중’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와 가톨릭 교회 모두에서 의자를 볼 수 있는 건 그 결과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함께 지금 형태의 의자가 바로 탄생한 것도 아니다. 지금도 영국이나 미국 동부의 오래된 교회를 가보면 의자들이 마치 사무실 파티션 같은 칸막이 속에 ㄷ자 형태로 배치된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함께 교회에 온 가족들이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따로 앉기 위해 마련된 이런 좌석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높은 칸막이와 커튼까지 동원한 완벽한 프라이버시를 제공했다. 최고급 항공사의 퍼스트클래스가 연상된다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런 칸막이석은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한 집안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지정석이었던 경우가 많다.

반면 가톨릭 성당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의자를 놓으면서도 낮은 등받이를 가진 의자를 고집했다. 성당이라는 거대한 시각적 잔치를 해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중세 가톨릭 성당은 건물 안팎이 하나의 거대한 구경거리, 즉 스펙터클이다. 가령, 오래된 성당 바닥에 대개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그걸 만들던 사람들은 훗날 그 모자이크가 긴 의자로 가려질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성당에 와서 벽화와 건물 안팎에 설치된 조각을 구경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돌아다녀야 했고, 앉아있을 수 없었다. 지금의 기독교 신자들이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이라면, 당시의 신자들은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관객에 가까웠다.

하지만 개신교는 달랐다. 종교개혁의 교리에 따라 건물 내 장식을 일절 없앴고, 목사의 설교 즉 ‘말’이 예배의 핵심이 되었다. 거기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높은 칸막이석은 로마가톨릭과 구분되는 개신교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영국의 한 추기경이 교회의 의자를 칸막이가 없는 낮은 의자로 교체하려고 하자 “개신교를 지키는 성벽을 허물고 로마가톨릭의 더러운 때를 묻히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근대 이후 대도시의 성장으로 현대인은 지하철이나 극장 같은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는 일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금도 앉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서있는 것과 달리, 타인과 함께 앉는 순간 거기에는 문화와 전통이 개입하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부딪힌다. 일본에는 전통적인 다다미방이 현대적인 거실과 공존하고, 우리나라의 연안 여객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3등실’이 존재한다. 마치 찜질방처럼 생긴 이곳은 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는 전통적인 공간으로, 비행기나 기차 등 다른 어떤 교통수단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객실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환한 객실에서 벌렁 누워자는 모습을 다른 많은 승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지만, 나이가 많은 승객들일수록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들은 여객선 3등실이 이웃들과 함께 바닥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랑방의 연장선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노트르담 성당을 설계한 사람들은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의자를 놓고 앉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은 없다.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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