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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겪은 주변인들, 삶과 죽음에 대한 시선

입력 : 2019-04-26 03:00:00 수정 : 2019-04-25 21: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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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경장편 소설 ‘레몬’/ 아름답던 여고생의 비참한 죽음 / 끔찍한 기억에 포박당한 동생 삶 / 살인혐의자의 기구한 운명 / “신의 존재·삶이란… 묵직한 질문”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망루가 불타고 배가 침몰해도, 이 모두가 신의 섭리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섭리가 아니라 무지예요! 이 모두가 신의 무지다, 그렇게 말해야 해요! 모르는 건 신이다, 그렇게…….”

언니가 살해당한 끔찍한 기억에 포박당해 있는 ‘다언’의 외침이다. 소설가 권여선(54)이 최근 펴낸 경장편 ‘레몬’(창비)에 등장하는 이 인물은 열여섯 고1 여름에 고3이던 열아홉 살 언니 ‘해언’의 죽음을 겪는다. 언니는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그해 공원 한구석에서 두부(頭部)가 깨진 채 죽어 있었다. 살인 혐의자들은 있지만 살인자는 밝혀지지 않은 채 17년이 흘렀다. 이 소설은 이 세월을 살아낸 다언과 주변 인물들의 고백과 시선으로 전개된다.

네 번째 장편을 선보인 소설가 권여선. 그는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세상에 어떤 생명 하나가, 그게 날파리 한 마리라 하더라도,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은 적이 있기를 기도한다”고 썼다.

언니 ‘해언’은 ‘누구나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언니의 아름다움은 압도적이어서 그 앞에서 다른 존재들은 ‘나머지’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 언니는 정작 자신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진주와 자갈의 차이를 모르는 어린애처럼 무심하고 무욕한’ 스타일이었다. ‘몸의 물질성에 대한 자의식이 느슨하고 희박’해서 속옷도 입지 않고 무릎을 벌려 세운 방심한 자세로도 천연덕스러웠다. 그런 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근심스러웠다. 그 언니는 ‘간섭받지 않고 무위한 상태로 있을 때 제일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존재’였다.

다언은 이 ‘아름다운 형식’을 파괴한 자를 밝히기 위해 고뇌하고 마침내 그 자를 찾아내 복수를 하는데 소설 속에서 이 같은 행위는 날것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복선과 암시를 통해 조금씩 보여주는 형식이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어떤 정서와 성찰을 독자와 교감하려 했던 걸까. 어렵게 성장해 난장이 엄마와 여동생을 건사하다 ‘육종’에 걸려 한쪽 다리마저 잘라내고 살인자의 누명까지 덮어써야 했던 남자, 아직 젊은 나이에 끝내 폐암으로 생을 마친 한 많은 그 사내 ‘한만우’의 기구한 사연을 상징적인 서사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신의 무지’를 질타한다. 나아가 대체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종교에 기대지 않고는 풀 수 없는 그 의미의 막장을 새삼스럽게 채굴한다.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권여선이 생의 깊은 막장에서 간신히 발굴한 일차 해답은 저러하다. 이 생은 공포와 평온과 위험 속에, 신의 여전한 무지 아래 방치돼 있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존재의 핵심일 수밖에 없다고. ‘다언’은 파괴된 언니의 아름다움을 복원하기 위해 성형을 거듭하지만 그녀가 결국 깨달은 건 ‘한만우의 삶과 마찬가지로 언니의 삶 또한 고통스럽게 파괴되었다는 것’이고 ‘완벽한 미의 형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내용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어떤 금지도 모른 채 소파나 자동차 시트 위에 발을 올리고 무릎을 약간 벌려 세우고 앉아 있던 우리 언니 해언도 곧 날아가버릴 새처럼 그렇게 따스하고 향기롭게 살아 있지 않았던가.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 밖의 것은 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권여선은 ‘신은 믿지 못하지만 시(詩)는 믿을 수 있다’고 작중인물들이 말하게 한다. 살아있는 인간들이 빚어낸 시는 적어도 소녀를 ‘자전거의 종처럼 당당당당’ 웃게 만들었고, 비록 죄책감과 기나긴 고독이 기다리고 있어도 ‘노란 복수’를 결행하게 만들었다. ‘죽음’으로부터 아직 방기된 존재들은 오늘도 ‘희열과 공포의 교차로’를 살아서 건너갈 따름이다. 권여선은 2016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발표한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개작해 선보인 이 장편의 말미에 “덜 아프기를, 조금 더 견딜 만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삶 한가운데 곱고 단단하게 심어놓으면 어떨까”라고 적었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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