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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전한 사회 위해 면허증 반납하고 운전서 은퇴했지요”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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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4-14 06:00:00 수정 : 2019-04-12 20: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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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자 교통안전 홍보대사’ 배우 양택조 / 여든살이 되니까 운전 그만 생각 들어 / 20년 넘게 타던 차 친구에 무상으로 줘 / 고령 운전자 사고 증가에 솔선수범 해 / 불편도 많아… 쉬운 자전거 대여 필요 / 영화 조감독·배우·성우 등 다양한 활동 / 6·25때 대구로 피난 가 연기 간접 체험 / 배우 문희 캐스팅… 잘 나갈땐 섭외 밀물 / 최불암·장동휘·허장강 등 기억 남는 배우 / 규칙적 식습관·꾸준한 운동이 건강 비결 / 간 이식 수술 후 좋아했던 술·담배 끊어 / 젊었을때 좀 더 잘할 걸… 때늦은 후회도 / 이웃·나라 사랑 하는 마음이 중요한 가치
“억지로 운전할 필요가 있나요? 인명피해와 사회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운전에서 먼저 ‘은퇴’하는 건 어떨까요.” 최근 운전면허증을 스스로 반납한 배우 양택조(80)씨. 팔순의 나이에도 왕성하게 연기활동을 펼치는 그는 운전에서만큼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11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만난 양씨는 “여든살이 되니까 이제 운전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을 꺼냈다. 그래서 20년 넘게 타면서 정이 든 차를 친구한테 거저 줘버렸다고 한다. 그는 “그 차가 구형 볼보 세단으로 단종된 모델이라 소장 가치가 있었다. 자동차를 수집하는 친구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길래…”라며 웃었다.

 

말은 쉽게 했지만 면허증과 함께 손에 놓아버린 자동차는 그에게 무척 소중한 것이었다. 한창 바쁠 때 매일같이 그 차와 함께 지방을 오갔다. 그는 차 안에서 노래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큰 사고 없이 20년 동안 그의 발이 되어 달려준 믿음직한 친구였다.

그는 “지금도 건강하지만 그래도 장거리 운전을 한 번 하면 옛날 같지가 않다”며 “고령운전자 사고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솔선수범해서 운전을 ‘은퇴’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60·70대 청춘’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 시대, 운전면허증 반납을 ‘연령 차별’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국가에서 주는, 사실상 유일한 ‘자격증’을 뺏길 때 늙음의 상실감을 안길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양씨는 과감한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로 훌륭한 국내 교통 인프라를 꼽았다. 일산에 사는 그는 서울을 오갈 때 콜택시를 자주 이용한다. 일정에 맞춰 택시가 와서 ‘모닝콜’까지 해주니 굳이 직접 운전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와 지하철, 자전거도 자주 이용한다. 그는 “운전을 포기하니 오히려 얻는 게 많다. 풍경을 천천히 감상하며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사람을 더 자주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물론 약간의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택시 잡기가 어렵다. 그럴 때면 은근히 아쉽기도 하다.

자전거 대여 시스템을 이용하기 힘든 점도 불편하다. 고령자로서는 스마트폰으로 자전거를 빌리기가 쉽지 않다. 그는 “교통카드처럼 편하게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운전면허 반납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로교통공단이 ‘고령자 교통안전 홍보대사’ 역할을 제안했다. 그는 보수도 따로 없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스스로를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소개한다. 즐겁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다. 연기활동과 방송생활이 그에게 삶을 확인시켜 준다.

 

그는 노년의 삶을 “항상 개척해 나가고 스스로 즐겁게, 그리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서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강은 노년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기본이다. 그는 건강관리 비결로 규칙적인 식습관과 꾸준한 운동을 꼽았다. 매일 헬스를 통해 몸을 관리한다. 과거 간 이식수술을 받아서 더욱 신경을 쓴다. 좋아했던 술과 담배도 끊었다.

그는 50년 이상 쌓은 연기 경험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에는 첫 연기생활을 시작한 연극판으로 돌아가 젊은 후배들과 소통하면서 후배 연기자를 양성한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자체가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다.

 

그는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하다가 본격적으로 후배 교육의 길에 들어섰다. 양씨는 “노년의 욕심이라고 하면, 물욕은 전혀 없고 그저 건강하고 즐겁게 후배 연기자를 양성하는 게 욕심”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연기에 대한 욕심도 놓지 않고 있다. 올해 목표는 꾸준히 TV와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기와 방송활동을 하는 것이다. 팬들이 항상 자신을 기억하고 찾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2년 전 모 방송국의 가요 프로그램 ‘복면가왕’에 출연한 건 낯선 경험이었다. 당시 ‘얼굴되지 노래되지 꽃돼지’라는 예명으로 출연해 ‘빈대떡 신사’를 멋지게 불러 시청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가면을 벗기 전까지 누구도 여든이 넘은 양씨가 주인공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복면가왕 제작진이 배우 최불암씨를 섭외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니깐 나한테 요청한 모양이더라. 처음에 싫다고 했는데 재밌어 보여 참가했다. 수락하고 나니 서울 강남의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더라. 강사를 붙여 노래 연습까지 시키고. 정말 힘들었다.”

그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애창곡은 ‘빈대떡 신사’와 ‘서울구경’이다.

그러고 보면 그를 ‘멀티 엔터테이너’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영화 조감독, 연극·영화배우, 성우 등 다양한 활동을 한 그다.

그래도 그는 항상 연기자로 남기를 희망한다.

 

그가 연기활동을 처음 시작하고 한평생 몸담게 된 건 어쩌면 필연에 가깝다. 그의 부모님은 일제강점기 부부 예술인으로 유명했던 양백명·문정복씨다. 연출 겸 배우를 했던 아버지와 배우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이미 연기의 길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어릴 적 수난의 아픔이 남아 있다. 어머니가 해방 직후 월북해 인민배우로 활동하면서 부모님이 갈라섰다. 11살 때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구로 피란 가 3년 동안 집 없이 살았다.

“대구의 한 연극장 무대 위에서 전쟁 3년 내내 살았다. 아버지와 친분 있던 극장 사장이 무대공간 한쪽에 방을 만들어줘 거기서 숙식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3년간 무대에서 숙식한 경험이 그에게 평생 연기의 밑천이 될 줄 몰랐다. 전국에서 피란 온 연극배우들이 양씨가 묵던 극장에서 연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전국 배우의 연기활동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서 방 문을 열면 배우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봤다. 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공간이라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배우들 대사를 들으면서 연극 장면을 상상해 봤다.”

그는 1963년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이듬해 영화배우로도 얼굴을 알렸다. 1965년에는 영화 조감독으로, 1966년에는 동양방송 라디오 성우로 데뷔했다. 진정한 연기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 기간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지금도 살면서 가장 잘한 행동이라고 회상한다.

“가장 먼저 조감독으로 활동할 때 ‘흑맥’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때 여배우는 엄앵란씨가 대세였다. 나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문희씨를 캐스팅했다. 그런 훌륭한 배우를 발굴한 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

문희씨 발굴 말고 라디오 성우 데뷔도 인생에서 했던 중요한 결정이었다. 성우 데뷔 이전까지 그는 연출에 집중했으나, 성우 활동 이후 연기에 몰입하게 됐다. 당시 충무로 영화인들 사이에서 그는 유명인이었다. 그에게 한 해 100편에 가까운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면 살면서 후회되는 순간은 없었을까. 의외로 그는 “젊었을 때 했던 것들이 모두 후회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고 묻자 그는 “조감독을 했을 때 왜 좀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며 “그때 좀 더 잘했으면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회상하니 그때 보이지 않았던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고 털어놨다.

당시 열악했던 영화 제작환경 탓도 있다.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하다 보니 대중에게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촬영비를 아끼려고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을 직접 찾아 전쟁영화를 찍었다. 세트장을 만들 돈이 없어 진짜 전쟁터를 촬영지로 택한 것이다.

“그때 미군의 시레이션(C-ration·전투식량)을 받는 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감독들도 배우 출연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약속어음으로 끊어줬다. 영화사가 부도나면 감독과 배우 할 것 없이 모두 돈을 받지 못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작으로 1998년 방영된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를 꼽았다. 시청률만 무려 60% 이상을 자랑한 드라마다. 그는 최불암씨의 친구 역할로 웃기면서도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다. 양씨는 “그 드라마에 출연하고 나서 세계 각국에서 초청이 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며 “당시 촬영할 때 최불암씨한테 밀리지 않으려고 배역 연구를 많이 했다. 모두가 웃게끔 코믹한 면을 잘 살려 사랑받은 것도 그 덕분”이라고 회상했다.

양씨는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배우로 최불암씨와 자신이 직접 발굴한 문희씨, 그리고 원로배우 장동휘씨와 허장강씨를 꼽았다. 신들린 연기로 양씨가 항상 존경한 선배 배우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감독은 그가 조감독으로서 자주 호흡을 맞춘 이만희 감독이다.

그는 연기에서 주연과 조연을 구분 짓는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절대로 조연이 주연만 못한 게 아니다.

“고전작품 ‘춘향전’을 보자. 주연인 이몽룡과 성춘향은 평면적인 캐릭터다. 하지만 조연인 변학도와 방자는 입체적인 역할을 한다. 조연인 그들이 있어 춘향전이 완성된다. 만약 내가 춘향전 출연 제안이 온다면 주저 없이 방자나 변학도를 선택할 것이다.”

해방과 6·25전쟁을 경험한 원로세대로서 그는 후배들에게 ‘타인과 나라를 사랑해 줄 것’을 당부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회와 나라를 사랑해 달라고 했다. 과거에 비해 사회 구성원의 애국심이 부족해진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자신만 생각하는 마음은 나이가 들고 죽음과 가까워지면 부질없게 느껴진다. 이웃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이처럼 중요한 가치가 있을까요?”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양택조 배우는… ●1939년 3월23일 서울 출생 ●1963년 연극 ‘화랑도’로 배우 데뷔 ●1964년 영화 ‘석가모니’로 영화 데뷔 ●1965년 영화 ‘협박자’로 조감독 데뷔 ●1966년 동양방송 라디오 성우 데뷔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 조연 ●1996년 영화 ‘투캅스2’ 조연 ●1998년 드라마 MBC ‘그대 그리고 나’ 조연 ●1998년 MBC 연기대상 남자우수상 ●2003년 MBC 방송연예대상 탤런트부문 특별상 ●2007년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주연 ●도로교통공단 고령자 교통안전 홍보대사(2019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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