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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대한 지략가” 이순신에 푹 빠진 메이지 일본

입력 : 2019-04-06 01:00:00 수정 : 2019-04-05 19: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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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日 해군전략가·장성 이순신 연구 / 러시아 해군과 일전 위해 전술 등 분석 / 신출귀몰 작전부터 인격·역량까지 탐구 / “조선 지켜 국운 만회” “넬슨보다 위대” / 이순신 신격화… 그 기록들 모아 출간 / 우리 작가들 전기 집필에도 상당한 영향
세키코세이·사토 데쓰타로·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지음/김해경 옮김/가갸날/2만5000원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세키코세이·사토 데쓰타로·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지음/김해경 옮김/가갸날/2만5000원

 

이순신 장군이 오늘날 널리 알려진 계기는 단재 신채호의 ‘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으로 볼 수 있다. 정조 때 ‘충무공이순신전서’가 간행되기는 했지만, 일부 식자층을 제외하고 이순신이란 이름은 잊혀져 있었다. 단재가 이순신 전기를 집필한 것은 1908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16년 앞선 1892년 메이지 시대 일본 군부에서 최초로 이순신 전기가 출간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 이순신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훗날 우리 작가들의 이순신 전기 집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시대 이순신 전기의 효시는 1892년 세키코세이(惜香生)가 쓴 ‘조선 이순신전’이다. 당시 일본 해군 중장 사토 데쓰타로(佐藤鐵太郞)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도 이순신에 관한 글을 남겼다.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는 이들이 쓴 책을 하나로 묶어낸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축 전함 판옥선을 그린 18세기 후반의 그림으로, 역시 작자 미상이다.

세키코세이의 ‘조선 이순신전’은 일본 육군 장교들의 친목단체인 가이코샤에서 출간(기관지 ‘偕行社記事’의 부록)되었다. 저자 세키 고세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옮긴이 김해경은 이름을 드러내기 곤란한 나머지 ‘세키코세이’라는 필명을 썼을 것으로 풀이했다. 세키코세이는 “영국을 지켜 나폴레옹의 발굽 아래 들지 않게 한 것은 넬슨의 공이요,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만회한 것은 실로 조선의 넬슨, 이순신의 웅대한 지략이었다”고 썼다. 세키코세이는 한반도 남해안 항구의 지정학적 가치를 곁들이면서 임란 당시 일본 해군의 실패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당시 일본해군 내 대표적인 이순신 연구자는 사토 데쓰타로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였다. 해군대학장을 지낸 전략 전문가인 사토는 이순신을 깊이 연구하고 흠모했다. 사토가 중장으로 진급한 이후 1927년 집필한 ‘절세의 명장 이순신’은 이순신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정리한 글이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일본 침략군을 격파할 당시의 명량해전을 묘사한 18세기 후반의 그림으로, 작자는 조선인으로만 알려져 있다. 가갸날 제공

역시 해군 중장으로 예편한 오가사와라는 당시 일본해군 내 유명한 작가였다. 그가 쓴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는 해군대학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인데, 그중 제5장은 이순신 전략을 풀이해놓았다. 1898년 펴낸 ‘제국해군사론’에서도 그는 이순신의 신출귀몰 전술을 소개했다. 오가사와라는 도고 헤이하치로와 가장 가까웠으며 그의 추종자였다. 사토는 당대 명장 도고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파할 당시 참모였다.

사토 중장은 이렇게 이순신을 평가했다.

“이순신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프랑스의 피에르 쉬프랑, 미국의 데이비드 패러거트도 세계적인 명장으로 존경할 만하지만, 결코 넬슨에 미치지 못한다. 로이테르는 인격과 역량 두 가지 모두 나무랄 데 없고, 그의 경력도 어딘지 이순신과 비슷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장군으로서 창의적 천재성에서는 모두 이순신보다 한 수 아래로 보인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이순신은 새삼 이를 것도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원정군의 목적을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제해권 확보가 국방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한 명장이다. 도중에 모함을 당해 백의종군에 처해졌지만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그 같은 대우를 달게 받았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장군의 고매한 인격을 알 수 있다.”

사토는 이순신의 전술을 극찬했다. “지금부터 400년 전에 장갑전함을 만든 것은 세계의 누구라도 놀랄 일이다. 장군은 또한 방어용 무기를 공격 용도를 바꾼 지혜로운 장수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방어용 수뢰를 공격무기로 전용해 러시아의 기함 페트로파블롭스크 호를 폭침해 러시아 장군 마카로프를 죽인 것은 흥미롭고 독창적인 전술이지만, 이순신은 400년 전에 이미 동일한 계책을 사용했다.”

사토나 오가사와라 모두 일본 해군의 중추적 전략가였다. 이순신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비교적 일치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순신이 나오지 않고 일본 수군에 북상의 길을 열어주었더라면 조선은 절망적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다. 다시금 해군 장수로 등장한 이순신은 패잔한 낡은 배 겨우 13척을 가지고 이 위험한 전황 속에서 중책을 수행하였다.” 이들의 글을 통해 임란 당시의 상황이 실로 손에 잡힐 듯이 생생히 전해진다. 옮긴이 김해경은 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자료를 텍스트로 해서 번역했다고 밝혔다.

일본 해군이 이순신을 연구한 이유는 물론 자국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 침략을 엿보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위협을 느낀 대상은 러시아였으며, 러시아 해군을 격파하기 위해 이순신을 연구했다. 연구자들은 임란 당시 그들의 전쟁 실패를 되새기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순신을 연구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퇴색되는 건 아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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