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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국회 앞에서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일상톡톡 플러스]

입력 : 2018-11-22 06:00:00 수정 : 2018-11-21 1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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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주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A씨는 하루 14시간을 일하며 월급 100만원을 받았다. 원래 쉬어야 하는 날 일하면서도 3분 지각했다고 욕설을 들었고, 결국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B씨는 상사가 소주병으로 때리려고 위협했던 1년 전 회식자리를 잊을 수 없다. 최근에는 상사에게 목졸림도 당했다.

여성 C씨는 외투에 민감한 여성용품인 생리대를 넣어뒀는데 상사가 이를 꺼내 동료들 앞에서 흔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의 갑질은 임금 수준이나 기업 규모를 떠나 곳곳에서 직장인들의 원성을 사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비교적 양질의 일자리로 알려진 외국계 기업들에서도 자국에서는 없는 부당한 업무 관행이 자리 잡은 것으로 조사됐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는 지난 1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직장갑질 측정지표'와 이를 바탕으로 한 직장인들의 체감 갑질 지수를 공개했다.

총 10개 영역 68개 지표로 나눠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 내 갑질지수는 100점 만점에 35.0점이었다.

68개 지표는 모두 근로기준법 등 현행법에 어긋나거나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중인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위반하는 내용인 만큼 0점이 정상이어야 하고, 직장 내 갑질이 35점이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직장갑질 119는 설명했다.

지표별로 점수를 보면 한 자리 점수가 나온 지표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낮은 지수를 보인 지표는 '임금을 상품권이나 현물로 지급한다'로 20.1점을 기록했다. 이는 직장 10곳 중 2곳 꼴로 '임금은 통화(通貨)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43조를 위반한 것이다.

임금 수준으로 나눠보면 200만원 미만 저임금 노동자(35.1점)가 그 이상의 월급을 받는 노동자(34.5점)보다 더 심각한 직장갑질 상황에 놓여있었다.

'초대졸'로 불리는 2∼3년제 전문대 졸업 이하의 학력자들이 36.1점으로, 대졸 이상 학력자(35.5점)들보다 더 많은 갑질을 견뎌야 했다.

사업장을 규모별로는 민간 대기업(종사자 300인 이상)과 공공부문이 각각 37.5점, 35.6점으로, 민간 중소 영세기업(28.4점)보다 높았다.

◆저임금 노동자, 고액 연봉자보다 더 심한 직장갑질 당해

취업자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꼽히는 외국계 대기업은 전체 68개 갑질 지표 중 12개가 50점을 넘어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계 대기업의 갑질 실태를 지표별로 나눠보면 '취업 정보 사이트 채용 정보가 실제와 다르다'(59.6점), '부하 직원을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말을 한다'(55.8점), '회사가 폭언·폭행·성희롱 가해자로부터 직원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 '신입이나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회사 행사 때 원치 않는 장기자랑 등을 시킨다', '출산 휴가를 다 사용하지 못한다'(이상 53.8점)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을 포함한 12개 지표는 모두 국내 대기업의 점수보다 훨씬 높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글로벌 스탠더드(규범)를 추구하는 외국계 대기업이 국내 대기업과 공공부문보다 갑질 지수가 높았다"며 "자국에서는 노동인권을 보호하면서도, 한국에 와서는 우리 직장인들에게 다른 대우를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번 조사에 참여한 외국계 대기업 종사자가 13명으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지만, 50점을 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외국계 대기업의 실태를 보려면 따로 추적해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 119는 이처럼 곳곳에 만연한 갑질의 뿌리를 걷어내려면 법적·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아직 법사위에 계류중인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통과돼야만 이런 갑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일부 의원들이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불명확해 해당 법이 시행되면 사업장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법안 의결에 제동을 걸고 있다"며 "이 법안이 빨리 통과돼야 괴롭힘을 당하는 노동자들도 도움을 받고, 회사 입장에서도 인력 손실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아직도 국회 법사위에 계류중

직장인 10명 중 3명이 직장 내 괴롭힘을 6개월 이상 당했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최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8 감정노동자 보호와 직장 괴롭힘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지난달 노르웨이 버겐 대학의 '세계 따돌림 연구소'에서 개발한 '부정적 경험 설문지'를 이용해 1078명의 직장인을 상대로 설문 조사했다.

업무배제, 따돌림 등 22개 항목 중 주 1회 이상의 빈도로 6개월 이상 경험했을 때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로 분류된다. 조사 결과 피해자로 분류될 수 있는 응답자는 1078명 중 300명으로 27.8%에 달했다.

주로 발생하는 양상은 '나에 대한 가십과 루머가 퍼짐', '인격, 태도, 사생활에 대해 모욕 혹은 불쾌한 발언을 들음', '의견 무시당함', '병가, 휴가, 여비교통비 등 합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도록 압력을 받음' 등이었다.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는 "국회에서 직장 괴롭힘 방지법이 개념과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며 "자유한국당은 사업주들의 주장을 대변하지 말고,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양진호 한국미래기술회장 이슈 등 직장 괴롭힘이 이어지고 있다"며 "개정안은 처벌규정이 없어 오히려 추가 보완 입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개정안 통해 구체적인 직장갑질 처벌규정 명시해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는 심장질환이나 뇌졸중 발병 위험이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 연구팀은 18~65세의 스웨덴과 덴마크 직장인 7만9000여 명에 대한 장기간의 자료를 추적 조사했다. 대상자 중 9%가 직장 내 괴롭힘을, 13%가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연구 결과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 질환 발병 위험이 59% 높았다. 폭력이나 위협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질환 위험이 25% 높았다.

발병 위험은 괴롭힘이나 폭력의 강도에 따라 더 증가했다.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최근 1년 안에 자주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들은 심장질환 위험이 120%나 높았다.

폭력이나 위협을 자주 경험했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뇌졸중이나 다른 뇌혈관질환 발병 위험이 36%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뉴욕 롱 아일랜드 쥬이시 메디컬 센터 정신의학과의 커티스 레이싱거 박사는 "직장 내 괴롭힘이나 폭력 등의 문제가 심장질환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질환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日 직장 내 상사 괴롭힘 막을 책임 기업에 부여할 듯

이웃 나라 일본 정부가 직장 내 상사의 괴롭힘을 뜻하는 이른바 '파워하라'를 막을 책임을 기업에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파워하라는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를 괴롭히는 것으로, 힘을 뜻하는 'power'와 괴롭힘이라는 의미의 'harassment'를 합친 조어다.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후생노동성은 지난 6일(현지시각) 자문회의인 노동정책심의회를 열고 파워하라 방지책을 기업이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심의회 위원들 사이에서는 "직장에서 괴롭힘 문제가 심각하게 늘고 있다. 대책을 강화해야 한다", "사회적인 상황을 고려해 법제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등 기업에 대한 파워하라 방지책 의무화에 찬성하는 의견이 많았다.

반면 경영자측 위원 중에서는 "업무상 지도와 파워하라 사이에 선을 명확히 긋는 것은 곤란하다"며 신중론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남녀고용기회균등법, 육아·개호휴직법 등을 통해 성희롱(세쿠하라), 육아 병행 직장 여성에 대한 괴롭힘(마타하라) 등 다른 종류의 직장내 괴롭힘에 대해서는 기업측에 방지책 마련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 사이에서는 상사의 부하 직원 괴롭힘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이미 자체적으로 규제 규정을 마련한 곳이 적지 않다.

'노무행정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조사결과 주요 기업 440곳 중 파워하라를 막기 위한 사내 규정을 둔 곳은 56.4%였다. 이는 5년 전 조사 때보다 23.2%포인트나 높아진 것이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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