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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맛 본 거리’… 상권 뜨는 게 슬픈 문화예술인 [젠트리피케이션 넘어 상생으로]

입력 : 2018-08-30 18:37:11 수정 : 2018-08-30 18: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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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성 잃어가는 홍대·서촌/사람 몰리자 임대료 턱없이 올려/건물주 등쌀에 싼 곳으로 전전/아마추어 무대, 프로들이 점령/거대 자본 공격에 개성 사라져
허름한 동네에 주머니 가벼운 예술가들이 모여든다. 고치고, 칠하고, 만들고 ‘뚝딱뚝딱’ 독특한 문화공간이 형성된다. 찾는 발길이 하나둘 늘더니 미디어의 관심을 끌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소위 ‘성지’로 알려진다. ‘뜨는 동네’가 돼 상권이 형성되자 자본의 공략이 본격화한다. 외부 자본에 밀려난 예술가와 주민들은 한숨을 쉬며 짐을 싸게 된다. 결국 남는 것은 프랜차이즈 카페와 음식점이 대부분이다. 자생적으로 발달한 지역의 문화·예술 생태계가 파괴되는 ‘문화백화(文化白化)’ 현상이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자본에 무기력해지는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반복되는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려 지자체 등이 나서고 있지만 묘수 찾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세계일보는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가 무너지는 현장의 모습과 국내외에서 주민과 지자체 등이 이를 방지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취재했다.



카페 한 구석에 놓여 있던 작업대를 바라보는 박우현(가명·49)씨의 눈빛이 흔들렸다. 작업대에는 가위와 칼, 자 등이 아무렇게 놓여 있다. 1년 또는 그 이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했다. 10분여 작업대를 말없이 바라보던 박씨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 작업대가 뭔지 아나?” 질문으로 첫말을 건넨 그는 “이 작업대는 내 인생의 처음과 끝을 같이할 물건”이라며 그간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박씨는 가죽공예가 좋았다. 대학 전공은 경영학이지만, 그는 자신의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대학생 때 우연히 접한 가죽공예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동안 가죽공방에서 살았다. 30살이 되던 2000년에 독립해 가죽공방을 차렸다. 서울 서교동 ‘홍대걷고싶은거리’ 근처에 문을 열었다. 당시 홍대 일대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아니었다. 신촌과 이화여대 인근이 더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신촌·이화여대 주변보다 임대료가 싸면서 다양한 문화가 싹트고 있는 홍대 일대가 더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터를 잡았다.

가죽공방에서 가방, 지갑 등을 직접 만들어 팔고, 가죽공예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방교실을 운영했다. 공방은 말 그대로 잘나갔다. 사람들이 홍대로 몰리기 시작했고, 단골 손님도 늘었다. 주변에는 비슷한 업종의 가게도 없었다. 오히려 박씨와 같이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가죽공방, 라이브카페, 액세서리 전문점 등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어요. 옷 가게도 지금과 같지 않았죠. 구제나 우리나라에서 접하기 힘든 스타일의 옷을 팔았어요. 홍대에 오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문화 선구자’, ‘문화 이탈자’라고 할 만큼 독특한 문화가 가득했어요.”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몰려 상권이 형성되자, 돈을 쫓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건물주는 더 많은 임대료를 원했고,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곳은 방을 빼야 했다. 그 자리에는 대형 커피숍, 휴대전화 판매점, 음식점, 노래방과 유흥업소 등이 들어섰다.

박씨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올라간 임대료 탓에 2005년 가죽공방을 합정역 인근으로 옮겨야 했다. 과거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단골손님들을 위해 운영을 계속했다.

이 또한 길지 않았다. 소규모 공방과 가게들이 박씨처럼 합정역으로 피난을 왔다. 이들을 따라 소비자들도 합정역으로 밀려들었고, 임대료는 다시 올랐다. 5년 뒤 박씨는 망원역 인근으로 이사했다. 현재 망리단길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둥지를 튼 그는 2년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이 또한 ‘임대료’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중 하나가 ‘돈맛을 본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돈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된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는 말이죠. 그 당시 사람들이 그랬어요. 홍대에 상권이 형성되자, 너도나도 홍대로 와서 가게를 차렸죠. 건물주는 당연한 것처럼 임대료를 올렸고요.”

박우현씨는 2000∼2005년 홍대 중심가에서 가죽공방을 운영했다.(①) 하지만 임대료가 상승하자 박씨는 2005년 합정역 인근으로 옮겼다.(②) 이후 합정동도 ‘핫’해지자 2010년 망원동으로 이사했다.(③) 이곳 또한 임대료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공방을 접었다.
그는 그 당시 건물주를 ‘날강도’라고 표현했다. 박씨는 “말도 안 되는 임대료를 요구하고, 감당할 수 없으면 나가라고 했다”며 “어차피 가게를 차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니 기존 세입자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과거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많이 오지 않았지만, 돈 걱정 않고 하고 싶은 공방 활동을 하면서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정이 있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높아진 임대료를 마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돈으로만 봤어요. 망원동으로 가서도 마찬가지였죠. 그런 제가 싫어서 결국 떠났어요.”
박씨는 현재 경기 안양에서 카페를 운영 중이다. 가죽공방은 더 이상 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홍대를 떠나온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전혀! 홍대를 떠나니 사람들을 더 이상 돈으로 바라보지 않게 됐습니다. 가게나 거리, 지역이 많이 알려진다는 게 마냥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행이 될 수 있죠.”

◆문화예술인 사라진 홍대

‘젊음의 상징’이라는 서울 홍대 일대(서교동)의 현주소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2000년대 초반과는 딴판이다.

홍대 중심 상권은 홍대역 9번 출구에서 시작해 홍대걷고싶은거리를 지나 KT&G 상상마당까지 이어지는 거리 일대다. 과거 이곳은 소규모 공방과 라이브카페, 특색 있는 소품을 파는 가게 등이 자리했었다. 인도 커리를 비롯해 일식, 중식, 양식 등 다양한 식당들도 운영됐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상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홍대 문화의 다양성을 이끌었던 문화예술인들은 중심 상권에서 밀려났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대형 커피숍과 휴대전화 판매점, 프랜차이즈 식당과 화장품가게, 옷가게 등이 들어섰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해 실시한 홍대지역 개·폐업 식품위생업소 실태조사 결과, 2013년을 기점으로 폐업 식품위생업소가 200곳을 넘어선다. 2000년 91곳, 2001년 108곳, 2002년 133곳 등 2000년대 초반에는 100곳 안팎이 폐업했다. 반면 2009년 132곳, 2010년 154곳 등 2000년대 후반이 되면서 폐업하는 식품위생업소는 늘어난다. 2013년에는 292곳이 폐업을 신청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이후 매년 200여곳이 문을 닫았다.
새롭게 문을 연 업소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2000년에 111곳이 개업 허가를 받았지만, 2009년에는 262곳, 2010년 283곳 등 2000년대 후반에는 200여곳이 새롭게 들어섰다. 특히 폐업이 가장 많았던 2013년의 이듬해인 2014년에 388곳이 개업 신고를 했다.

경실련 관계자는 “2013년의 폐업 수와 2014년의 개업 수는 그 당시 홍대지역에 젠트리피케이션이 가장 심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며 “특히 홍대의 경우 업소들의 평균 영업기간이 5.02년인 것을 감안하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서 보장하는 5년이 지나자마자 임대료 등의 문제로 둥지내몰림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예술인들의 내몰림은 비단 건물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 홍대걷고싶은거리와 홍대문화공원(옛 놀이터)은 가수 지망생, 인디 가수들의 버스킹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프리카TV 등 개인방송 유명 BJ의 방송이나 아이돌 가수들의 버스킹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아마추어(비전문가)들의 다양한 문화를 볼 수 있었던 홍대 일대가 프로(전문가)들의 상업적인 무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홍대 일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합정동과 망원동, 연남동, 상수동까지 ‘거대 자본의 공격’으로 ‘문화 획일화’가 진행 중이다.
◆옛 정취가 사라진 서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일명 ‘뜨는 동네’들은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거주민이 쫓겨나고 독특한 매력을 잃고 있다. 서울 종로 체부동과 누하동, 통인동 등 한옥이 즐비하게 들어선 지역, 경복궁 서쪽마을 ‘서촌’도 마찬가지다. 서촌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한옥이 밀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 도심부 내 도시조직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마을이다.

당초 서촌은 2000년 초반부터 옥인, 체부, 누하, 필운지역을 중심으로 재개발사업이 추진됐다. 하지만 건물주와 세입자 등 이해주체 간 갈등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2008년 서울시가 한옥선언을 한 이후 한옥을 활용한 용도변경 등 다양한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2010년부터는 전통시장 시설현대화 등 지역활성화 및 관광자원화를 위한 공공 사업이 추진됐다.

그 결과 서촌은 역사를 간직한 고즈넉한 골목길과 한옥 등 다양한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토박이들에게는 반가운 현상이 아니었다. 카페·음식점 등 자본이 밀려들고 관광지로 바뀌면서 젠트리피케이션(둥지내몰림)이 일어났다.

특히 최근 3∼4년간 대중매체들이 통인시장, 골목길 베이커리, 한옥 풍경 등을 앞다퉈 소개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경실련에 따르면 서촌의 임대료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됐던 2013∼2015년 3배나 상승했다. 33㎡ 기준 2013년 임대료는 45만원이었으나 2015년에는 135만원으로 훌쩍 뛰었다. 연평균 150%씩 올랐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홍대(49%), 연남동(40%), 한남동(50%), 경리단길(40%) 등과 비교해도 월등히 높다.

경실련 관계자는 “서촌은 2014년부터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심화되기 시작했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지역 주민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않고 지역활성화 사업을 진행한 결과 결국 임대료만 상승해 건물주나 토지주에게만 이득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복진 기자 b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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