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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 ‘돼야 한다’는 생사결단 의지 가져야…성공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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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26 10:00:00 수정 : 2018-04-27 10: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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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세계-김민하 피스코리아 총재 인터뷰②] 주요 내용 일문일답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선언적인 것이 하나 나오리라고 본다. 남북 간 분위기가 좋아 역사상 참 파격적인 것이 나올 것 같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단 단장으로 방북했던 김민하 피스코리아(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총재는 25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오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이같이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김 총재는 이날 “한미 공조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대전제는 있어야 하되, 결정적인 시기에 있어서는 양보해서는 안된다”고 문재인 대통령에 조언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지도자들도 굉장히 우수한 사람이고, 정보도 놀라울 정도로 많다. 그들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면 안된다”며 “이것을 전제로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에서 나를 초청한 상황이어서 여건이 되면 방북하고자 매일 건강을 다지고 있다”며 이날도 서울 동작동 현충원을 산책하고 왔다고 귀띔했다. 인터뷰는 이날 오후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김 총재와의 일문일답.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잘 될 것 같은지.

“잘되리라 생각한다. 잘돼야 하지 않겠나. ‘이제는 될 것이다’가 아니고 ‘돼야 한다’고 하는 생사결단의 의지를 문재인 대통령이 가져야 한다. 분단이 몇 년인가. 이런 비극이 어디 있느냐.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선언적인 것이 하나 나오리라고 본다. 남북 간 분위기가 좋아 역사상 참 파격적인 것이 나올 것 같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오찬을 함께 한 민간대표단 3인. 왼쪽부터 김민하 전 수석부의장, 박용길 장로, 김 위원장, 강만길 총장. 통일부 제공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은.

“외세에 대해서도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미국이 노(No)하면 안 되지 않느냐. 이제는 그래서는 안되고, 우리가 미국을 끌고 갈 각오를 해야 한다. 역사를 보라. 북한뿐 아니라 미국도 많이 깼다. 한미 공조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대전제는 있어야 하되, 결정적인 시기에 있어서는 양보해서는 안된다. 어려운 기로에 섰을 때는 생명을 걸고 우리 민족의 편에 서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또 한 가지는 절대 북한의 지도자들을 비정상적으로 보면 안 된다. 그들도 굉장히 우수한 사람들이고, 정보도 놀라울 정도로 많다. 이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미국과 러시아의 지도자와 같은 수준으로 대화할 수 있다.”

김 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정도는 확고한 반전 평화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며,  다음과 같은 비화를 공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여러 부족한 점은 있지만 전쟁 만큼은 반대했었다. (제1차 북핵위기 당시)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미국은 군함 한 30척을 동해안에 배치하고 한국 정부도 모르게 서울에 있는 미국인들 전부 소개시켰다. 김영삼 대통령이 나중에 이를 알고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내가 대한민국의 군 통수권자로서 대한민국 국군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직접 했다. 다행히 김일성 주석이 카터 말을 들었고, 카터가 클린턴한테 전화하면서 전쟁을 피했다. 그 순간을 놓쳤으면 전쟁이 났을 것이다. (1999년) 윌리엄 페리 대북조정관(전 국방장관)이 김대중 대통령과 얘기할 때 (대통령 통일 고문으로서) 옆에서 들었는데, 페리 조정관이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데 소름이 끼쳤다. 미국은 아무도 모르게 (북핵 시설을 폭격)하려고 했다. 시나리오를 검토해보니까 전쟁 초기 남한의 민간인 100만명이 죽는다고 하더라. 페리가 ‘그 때 전쟁했으면 승리는 미국의 것’이라고 하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사람 다 죽고 난 다음에 통일해서 뭐하느냐’고 대답했다.”

―5, 6월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은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보통이 아니다. 김정은은 바보가 아니다. 전쟁하면 체제가 무너진다. 결정적 시기에는 통 큰 결단을 내려서 핵을 포기하거나 폐기하고 말 것이다. 북한 정권의 제1목표는 북미 수교다.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이 한반도 비핵화다. 김정은도 이를 계승해 이번 기회에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큰 업적을 남기고 싶은 인간적 욕망도 있을 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업하는 사람이다. 승부를 잘 놓는 사람이고, 장사를 해야 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남북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이 있을 것이고, 미국 중간선거에도 유리해진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성격을 나는 감지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통 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DNA를 가지고 있다. 잘될 가능성이 있다.”

2002년 금강산에서 이뤄진 남북이산가족 상봉 당시 김민하 민주평통 부의장(가운데)이 2001년 4월에 타계한 모친 사진을 형 성하씨에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특별수행원단으로 방북했는데.

“나는 이산가족이다. 큰 형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누나는 중앙통신사 기자, 또한 형은 과학신문 기자였다. 다 돌아가셨다. (1961년) 황태성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했다. 나는 절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어릴 때부터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내가 정상회담에 간다고 하니까 저쪽에서 특별경호를 해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특사단 오찬에서 나에게 술을 따라주던 순간이었다. 김 위원장은 마치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온 사람을 대하듯이 나에게 덕담을 하며 술을 권했다. 나 또한 친근한 마음으로 잔을 받으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군 고위직들과 술을 많이 먹고 대화를 유도해봤는데 절대 전쟁은 안 된다, 우리 민족 다 죽는다고 얘기하더라. 남침하면 다 망하는 줄 안다. 미군한테 박살나는 줄 안다. 나중에는 그들이 술이 취해 ‘군사훈련 좀 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더라. 비행기를 띄울 휘발유 한 방울이 없다고, 정말 미치겠다고 전쟁 준비를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2005년에도 방북, 김정일 위원장과 많은 대화를 했다고 들었다.

“내가 민간인으로써 아마 김정일 위원장과 가장 술도 먹고 깊이 대화했을 거다. 2005년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특사로 갔을 때 장장 4시간 반을 마셨다. 김 위원장이 오찬을 하고 헤어졌다가 내가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나를 찾았다. 나는 오찬장에 게스트로 참여시켰는데, 다른 간부들은 이야기를 거의 안하더라. 나는 ‘이분들은 모두 월급타는 사람들인데 마음대로 이야기 못할 겁니다, 근데 저는 사립학교 선생을 평생 했습니다’고 말했더니 김 위원장이 ‘알고 말고요 알고 말고요’ 하더라. 나는 ‘하고 싶을 말을 하겠습니다’ 하고서 대화가 시작됐다. 그날 (김 위원장과) 4~5시간 동안 술을 먹느라 비행기가 못 뜨고 그랬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김영남 위원장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참 겸손한 분이라는 생각이 대화 전반에서 느껴졌다. ”


김민하 전 수석부의장은 6.15 남북정상회담에 대통령 특별수행원 단장 으로 참석했다. 사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민하 단장에게 인삼주를 권하는 모습.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나.

“두 차례 김 위원장을 만나본 결과 솔직하고 권위주의가 없더라. 어깨에 힘주는 것 없고 거침없이 자기 얘기 잘하고 속이 시원했다. 유머가 넘치고 잘 웃었다. (2005년) 김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을 많이 만나지만 김 위원장을 만나면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더니 김 위원장은 물론 좌중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를 시종일관 견지했다. 자칫하면 지도자들이 자기 얘기만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경청하더라. 혹 남이 언짢은 이야기를 해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다만 경청하되 확실한 것은 명확히 대답하고 아닌 것은 ‘검토하겠다’고 얘기했다. 예술성도 강했다. 한국 드라마를 녹화까지 해 챙겨봤다. 내가 술에 취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제발 남북관계에 내보내는 대표는 좀 온순한 사람들 보내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이) ‘좋은 말 했다’며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을 보내놓으면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은 것처럼 말하다가 나중에 회담이 결렬됐다’며 ‘이제부터는 선생 말대로 온건한 지도자를 보내겠다’고 하더라. 그 후에 (온건파로 분류되는) 김기남과 김양건이 와서 국군묘지도 가고 평화의 메시지도 보내고 했다. 헤어질 때 (김 위원장이) 나를 껴안으며 ‘선생은 자주 오셔야 한다’고 그랬다.”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페리 미 국방장관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역대 정권의 대북 정책을 평가한다면.

“김대중‧노무현정부는 민족적 진보세력이다. 이데올로기보다 어떤 면에서는 민족이 더 중시했다. 미국의 관료들과 언성을 높이고 싸우기도 했다. 이명박‧박근혜정부 사람들은 우리 초등학교 때 반공교육을 받은 것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7‧4 남북 공동성명, 6‧15 남북 공동성명, 남북 기본합의서 등 민족적 진보세력들이 만든 게 이명박정부 때부터 단절되고 백지화됐다. ”

―특별히 기억나는 인생의 순간을 들려달라.

“6‧25전쟁 때 미국과 중국이 정전을 시도하는데 우익진영이 결사 반대했다. 전국의 학생들을 총동원해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쳤다. 그때 명동 서울 시립공원에서 반공연맹 주최로 웅변대회가 열렸다. 참가자 30여명이 한결같이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쳤다. 나는 이때 간도 크게 원고를 바꿔서 휴전을 지지했다. ‘전쟁을 계속하면 우리 민족 다 죽는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데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웅변이 끝나고 시경 형사에게 붙들려 갔다. 지금도 불가사의하지만, 그날 내가 우승을 했다. 1961년에는 황태성 사건으로 감옥에 다녀왔다. 형을 받고 나오니 친구들도 겁이 나서 집에 안 왔다. 지금까지 국가보안법 전과자로 살았다. 취직이 되나 친구가 있나. 실업자로 외톨이로 돌아다녔다.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 법제 하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총장도 했다. 불가사의다. 왜 그럴까. 중앙대 전임강사를 하게 된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었다. 이 부분은 퀘스천 마크로 남겨두자.”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2014년 북한 개성에서 가진 피스코리아와 회담에서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에서 나에 대한 초청 의향을 표명한 바 있어 여건이 되면 방북하고자 매일 건강을 다지고 있다. 오늘도 동작동 현충원을 산책하고 왔다.”

하정호 기자 southcross@segye.com

김민하 총재는

▲경북 상주 출생(1934) ▲중앙대 정치학 박사 ▲중앙대 총장, 한국교총회장 등 역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6.15 남북 정상회담 남측 특별수행원단 단장,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정부 통일 고문 등 역임 ▲현 피스코리아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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