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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난해한 한문 의학서, 한글로 쉽게 풀어 백성을 살리다

입력 : 2018-04-23 21:04:40 수정 : 2018-04-23 21: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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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조선의 애민의학 ‘언해동의보감’ / 아픈 민초를 돌본 ‘언해본’ / 허준, 선조 명령으로 의학서 3종 집필 / 모두가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출간해 / 질병 치유와 전염병 퇴치에 크게 기여 / 최고의 의학서 ‘동의보감’/ 한의학 집대성… 18세기 中·日서도 유통 / “병을 치료하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 질병과 생명 이해 ‘철학적 세계관’ 담겨
허준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는 원칙을 제시했다. 마음을 다스리는 원칙은 허망한 욕심을 버리고 겸허하게 사는 것이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하였다. 나라를 세우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고려 말기에 유교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대부 선비였다. 이 사람들이 고려 왕조에서 군인으로 신망이 높았던 이성계 세력과 결탁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가 조선이다. 비록 이성계 장군의 군부세력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세운 나라이지만, 국가 경영의 기본 이념은 유교였다.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형식상 문반, 무반으로 나누었지만, 사대부 선비들로 임명하는 문반 위주로 운영되었다. 군인보다는 선비가 더 대접받았다. 문반의 관료가 되려면 반드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의 경전을 암송하고 숙지해야만 합격할 수 있는 과거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 재상들, 행정권을 가진 육조의 판서들,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승지들, 언론 기관인 삼사의 관리 등 중앙 정부의 중요기관은 유교의 이념에 충실한 사대부 선비들이었다. 조선은 개국하는 날부터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되는 1910년까지 518년간 지속했던 유교의 나라였다.

◆“훌륭한 신하를 뽑아 정사를 돌보다”

유교의 정치사상은 임금에게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개인적 수양과 실천을 요구한다. 요순(堯舜) 임금과 공자 같은 성인의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경지라도 갈 정도의 엄청난 공부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임금에게는 거의 무한한 권력과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임금의 자리는 모든 백성이 받들어 모시는 어버이와 같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삼권분립에 해당하는 입법과 행정 그리고 사법의 모든 권한이 임금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임금은 신하들을 뽑아서 그 일을 대신하도록 시키지만, 원칙상 최종의 결정은 임금이 가진다.

유교는 국가를 가족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가족에게 가장이 있듯이, 국가에는 임금이 있다. 가장은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헌신한다. 임금은 백성의 안전한 삶과 행복의 실현을 위해서 어진 정치를 베푼다. 가족을 대표하는 가장과 국가를 대표하는 임금은 가족과 백성 위에 군림하는 폭력의 정복자가 아니라, 험한 세상의 자비로운 보호자이며 슬기로운 안내자이다. 가장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무한책임을 지듯이, 임금은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임금의 책임은 먼저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 수 있는 개인적 수양을 치열하게 하는 것이다. 임금이 되기 전에 각고의 수양 노력을 통하여 스스로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되어서 백성을 훌륭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화시킨다. 교화의 기준은 유교가 내세우는 효제(孝悌), 충신(忠信)과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이뿐만 아니라 태풍, 지진, 홍수, 가뭄 등의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도 임금이 진다. 전염병이 발생하여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임금의 책임이다. 재해 극복을 위해 힘쓰고 질병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와 임금의 중요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임금은 과로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임금은 유교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어진 신하를 뽑아서 일을 시키면서 국정을 이끌어가지만, 언제나 솔선수범하는 최고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훌륭한 군주는 과로를 면할 길이 없었다. 경복궁 정전의 이름인 근정전(勤政殿)의 뜻이 바로 “훌륭한 신하를 뽑아서 함께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조력자를 뽑아서 관료로 임명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언해본 의학서, 아픈 백성을 돌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는 격동기에 선조는 많은 조력자를 신하로 두었다. 그에게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는 유성룡 등의 문신과 이순신 같은 무신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과 기아의 아수라장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질병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는 과업을 성스럽게 수행하던 허준이 있었다.
한글 의학서
한글로 출판된 의학서는 백성들도 읽기가 쉬워 질병을 치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조는 백성의 교화와 보호라는 차원에서 수많은 의학서를 간행하여 배포하고자 했다. 백성을 위한 국가의 의료서비스 제공은 당연한 의무였다. 조선초기부터 국가 주도로 중국의 의학서적을 수입하고 우리 문화의 생활방식에 맞는 체제로 편집하여 출간, 보급하였다.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구황촬요’ 등은 오늘날까지 전해진 의학서들이다. 그리고 과거시험에서 국가고시인 의과(醫科)를 시행하면서 의료서비스를 담당할 의사를 양성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다. 허준은 의과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허준은 선조의 명령을 받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에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 3종의 의학서적을 언해본으로 출간하였다. 언해(諺解)란 조선시대에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로 한문으로 된 원전(原典)을 한글로 풀어서 쓴 글을 말한다. 한문은 10년을 배워도 읽고 이해하기가 용이하지 않아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인 한글은 하루이틀 조금만 노력하면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글이다. 그러므로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 의학서의 발간은 백성들의 질병을 치유하고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명한 허준의 ‘동의보감’은 1610년(광해군 10)에 25권에 이르는 전집 분량으로 완성되었다. 이 책의 언해본은 19세기에 ‘동의보감내경편언해’로 간행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유일본으로 1권과 2권 두 책이다.

◆마음을 다스려 질병을 치료하다

동의보감은 조선의 땅에서 한의학의 내용을 집대성한 책으로 전국에 배포되어 애용되었다. 18세기 이후로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출간되어 대량으로 유통되었을 만큼 훌륭한 의학서이다. 기본적으로는 중국과 한국의 한의학 유산을 핵심적으로 정리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편집하여 의학백과사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편찬하였다.
동의보감 지금도 최고의 의학서로 꼽히는 동의보감은 질병의 치료는 물론 예방, 건강을 위한 양생의 정신 등을 강조한다.

이 책이 지닌 특이한 점은 질병과 생명을 이해하는 철학적 세계관을 앞에서 먼저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의학철학을 천명하고 있다. 본래 한의철학에서 생명현상을 이해할 때 정상과 병리는 존재론적으로 갈라져 구분되는 두 가지 존재가 아니다. 생명의 정상 상태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것이 병리 현상이며, 병리 현상이 다시 생명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정상의 상태이다. 이것은 마치 양약과 독약이 이질적인 두 가지로 나누어지지 않는 하나의 물질인 것과 같다. 인삼이 좋다고 해도 과도하게 복용하면 배탈 설사와 같이 평소에 없던 질병이 생긴다. 모르핀은 일종의 마약이지만 필요한 병리 현상에 투여하면 진통을 다스릴 수 있다. 한의학은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상과 병리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둔다.

동의보감은 질병이 나타났을 때 그 병리 현상의 원인을 해결함으로써 정상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한다. 질병의 치료보다 병을 예방하거나 건강을 추구하는 양생(養生)의 정신 또는 마음을 강조하였다. 이 책의 처음 ‘신형’(身形)편에서, “도로써 질병을 치료한다”고 명시하였다. 허준은 자연법칙인 도(道)에 순응하는 양생법을 지키면 질병이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는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欲治其疾, 先治其心)”라고 선언한다. 신형편의 문장은 마치 잘 쓰인 철학적 논문을 읽는 것처럼 신선한 감동을 준다. 마음을 다스리는 원칙은 허망한 욕심을 버리고 겸허하게 사는 것이다.

◆뜬구름 같은 탐욕을 버려야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탐욕이 쉴 새 없이 파도처럼 요동치며 고통을 일으킨다. 문명사회에 살고자 한다면 돈, 명예, 권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허영심과 탐욕을 충족하고자 하는 수준으로 치달으면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서 질병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하면 마음의 평화는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진다.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탐욕과 분노는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허상으로서 실체가 없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욕의 감정 현상을 잘 살펴보고 인식, 관조하는 순간, 집착과 고통이 사라진다.
김백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동의보감의 처방 원리는 뜬구름같이 곧 사라질 생각들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과 질병이 생기므로, 마음의 탐욕을 가라앉히고 집착을 버리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라는 원칙이다.

김백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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