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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왜적·오랑캐 막을 힘 기르자"… 호국 염원담은 무예서

입력 : 2018-04-16 20:23:40 수정 : 2018-04-16 20: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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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무예제보번역속집 / 1610년 훈련도감서 최기남 주도 간행/ 조선 최초의 병서인 무예제보 후속편 / 무예제보에 없는 권법 등 5가지 실려 /일본군 통해 습득한 ‘왜검’ 최초 정립/협도곤·구창, 기병에 대항할 때 사용/ 간행 될 무렵 ‘건주여진' 성장에 대비 / 어느 순간 조선서 속집 존재 사라져 / 1999년 계명대 전시회서 다시 빛 봐
역사는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하지 않는다.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이하 ‘속집’)과 이 책에 발문을 남긴 최기남(崔起南·1559∼1619)의 존재도 그렇다. 최기남은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낙인찍힌 최명길의 아버지다. 그리고 역사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으나 이황과 이이만큼이나 학문으로 우뚝 선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속집(보물 제1321호)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무예서다. 1610년(광해 2) 훈련도감에서 간행한 이 무예서는 당시까지 조선군이 습득한 새로운 무예들을 담았으며 ‘왜검’ 무예를 최초로 정립했다는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고 최기남과 함께 한국사에서도 잊혀졌다.
 ◆‘무예제보’에 빠진 무예들을 추가하다

속집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임진왜란 중 만든 무예서 ‘무예제보’(1598년)의 후속편이다. 조선 최초로 접전 무예를 정리한 병서로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조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창적으로 재구성해냈다. 무예제보에 실린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장도의 여섯 가지 무예는 일본군 장기인 창·검에 맞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처음 펴내는 만큼 빠진 무예들도 있었다. 예컨대 명군들로부터 전수받은 권법이나 청룡언월도 등이었다. 이 무예들은 무예제보에 없다 보니 보급이 어려웠고 시간이 더 흐르면 자칫 핵심 기술마저 없어질 우려가 있었다.

1604년(선조 37) 훈련도감 제조로 부임한 노직은 이런 문제점을 인식했다. 그래서 무예제보에 빠진 무예들을 보완하기 시작했다. 마침 무예 도입에 큰 관심을 쏟은 국왕 선조가 내용이 풍부한 새로운 판본의 기효신서를 구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무예제보에 빠진 무예들을 보충했고 그 결과 속집이 만들어졌다. 

계명대 소장의 ‘무예제보번역속집’은 광해군대에 간행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무예서로 당시 조선군이 습득한 새로운 무예들을 담았으며 ‘왜검’ 무예를 최초로 정립했다는 가치가 있다. 사진은 이 책에 실린 왜검 관련 내용과 권법 자세(위에서부터).
속집의 편찬은 순탄하게 진행되었으나 선조가 세상을 뜨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무예제보는 이미 간행되었으나 속집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무예를 익히려는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속집을 사장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최기남은 1610년 10월에 훈련도감 도청으로 있으면서 목판으로 간행했다. 간행해야 무예를 보급하고 후세에도 영원히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집은 1책으로 권법, 청룡언월도, 협도곤, 구창, 왜검의 다섯 가지 무예를 실었다. 이 책 역시 무예제보와 마찬가지로 각 무예마다 그림으로 설명하고 본문 내용을 한글로 다시 풀이한 ‘익히는 보’를 두었다. 이 역시 누구나 쉽게 익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왜검을 익혀야 하는 이유

속집에서 눈길을 끄는 내용이 왜검 무예다. 최기남은 “왜검도 검이요, 우리 검도 검이다. 우리 군사에게 검법의 신묘함을 다 익히게 한다면 굳이 낭선이나 창을 익히지 않아도 저들의 검을 대적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고유의 검술이 있으니 여기에 왜검을 더 익히면 일본 검을 막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일본 검법은 이미 무예제보에 ‘장검’으로 실렸다. 이 장검은 기효신서에 근거한 검법이었다. 그런데 ‘속집’에 왜검이 따로 실린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항복한 일본군을 통해 일본 검술을 익혔다. 그러므로 속집에 실린 왜검은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군들이 직접 습득한 일본 검법일 가능성이 높다.

속집의 왜검보는 “적을 칠 때 반드시 재빨리 칼을 들어 내려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한다”로 시작하며, 두 사람의 교전 방식도 설명하고 있다. 바로 실전 투입을 염두에 둔 내용으로 보인다. 또 손목, 가슴, 머리, 다리, 허리 등 공격 부위를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일본 검술의 특장은 베기 기술이지만 속집의 왜검은 손목 등의 타격을 더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왜검을 소개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일본의 지리와 풍속, 군대 문화, 전선 제조법, 싸우는 법과 부대 운용 방식을 부록으로 자세히 소개한 것도 눈에 띈다. 여전히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 일본을 더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만주지역에서 급부상하는 여진을 막아라


‘협도곤’과 ‘구창’은 속집에 실린 무기의 한 종류다. 협도곤은 자루 위에 칼날을 꽂은 무기로 주로 기병에 대항할 때 사용한다. 구창은 형태가 협도곤과 비슷하며 창날 좌우에 뾰족한 가시 3개를 달았다. 이 가시는 말 탄 기병을 끌어낼 때에 유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무기 모두 기병 대항용인 셈이다.

왜구를 막는 전법을 정리한 기효신서를 펴낸 척계광은 1568년 북경의 서남쪽에 자리한 하북성의 계주 총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척계광이 막아야 할 적은 왜구가 아니라 북방 지역 기마 부대의 기습이었다. 이에 척계광은 보병과 기병의 공조를 중시하는 전법을 담은 ‘연병실기’를 편찬했다. 상황이 바뀌고 적이 달라지면 전법도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속집이 간행될 무렵 중국대륙에서는 백두산의 북서 방면에서 발흥한 건주여진이 급부상했다. 이들은 명나라 동북지방(만주)의 여진들을 통합해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또 임진왜란 중에 누루하치는 조선에 원군 파견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처럼 건주여진이 동북아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르자 조선에서도 방비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최기남은 속집을 간행하기 5개월 전인 1610년 5월에 조선판 연병실기에도 발문을 썼다. 이 글에서 최기남은 기효신서는 일본군이 쳐들어 온 뒤에 받아들였으므로 유비무환이 아니지만, 연병실기는 지금 받아들이면 오랑캐가 쳐들어오기 전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유비무환의 자세라고 역설했다.

그러므로 ‘속집’에 실린 협도곤과 구창은 무예제보에 누락된 무예를 보충한다는 의도를 넘어 원대한 포부가 담겨 있다. 바로 조선에서 새로 도입한 연병실기의 전법을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무예를 포함한 것이다. 아직 위협적이지 않지만 성장하는 여진을 대비하는 자세였다.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발문을 쓴 최기남과 부인 전주 류씨 합장묘. 최기남과 속집은 전쟁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 한 노력을 보여주는 증거다.
◆최기남의 묘소를 찾아서

최기남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서울공항 맞은편의 신촌동 주민센터로 향했다. 주민센터 건너편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거기에 최기남의 묘소가 있다. 문중 노력으로 잘 보존되었으나 문중 사람 외에 찾아주는 이 없는 묘소였다.

속집을 간행할 무렵 최기남은 훈련도감 도청을 맡으면서 홍문관 부응교로도 재직했다. 홍문관은 문과급제자 중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 배속되는 부서였다. 문신 최기남은 무예서를 간행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1612년 함경도의 영흥 부사로 부임한 그는 그곳에서 연병실기의 전법에 따라 기병에 대항할 전차를 만들어 들판에서 군사훈련을 했다.

최기남은 무예제보를 편찬한 한교와 절친했다. 같은 스승 아래서 공부한 동학으로서 한교가 서얼이나 개의치 않았다.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의 후속편을 최기남이 간행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어느 순간 속집은 조선 사회에서 증발해버렸다. 조선 무예서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 ‘무예도보통지’에도 무예제보와 한교의 공로는 자세하지만 속집은 전혀 언급이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999년 계명대학교 고서전시회를 통해서였다. 현전하는 속집은 계명대 도서관 소장본이 국내에서는 유일본이고,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엔칭도서관에 한 권이 더 있다. 속집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는지 자세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기남과 속집의 존재는 전쟁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내려 한 다양한 노력과 참여를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이런 숨은 공로들을 찾아내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에 역사에서 배우는 일이 진정 더 가치 있을 것이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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