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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딛고… 우리, 서로의 전부가 되자

입력 : 2018-04-13 03:00:00 수정 : 2018-04-12 21: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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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그로스만 ‘나의 칼이 되어줘’
“내 눈은 당신의 눈을 바라보았고, 한 여인의 진정한 무게를 난 온몸으로 느꼈죠. 이질적인 한 영혼이 내 영혼 속으로 자유롭게 날아들어왔지만, 표정을 찡그리지도 않고 목에 걸린 씨앗인 양 얼른 내뱉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숨을 들이쉬며 그 영혼을 내 안으로 더 깊이 빨아들였죠.”

“몇 주 전에 당신은 당신 ‘육신의 세 곳’에서 나를 느낀다고 말했죠. 지금 난 더 많은 곳에서 당신을 느껴요. 놀라운 점은 당신을 느끼는 그곳들이 상처로 막혀 내 안에서 완전히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곳이라는 사실이에요.”

‘야이르’라는 남자가 우연히 동창회에서 낯선 ‘미리엄’이라는 여자를 본 뒤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사랑은 내가 자신을 깊숙이 찌를 수 있도록 당신이 나의 칼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썼던 카프카를 인용하면서 남자는 간절하게 편지로 청한다. 나의 칼이 되어달라고,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주겠다고.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여인도 반응하기 시작해 둘은 소소한 일상을 포함해 내밀한 상처까지도 모두 드러내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각각 배우자와 아이가 하나씩 딸려 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범속한 불륜소설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64)의 ‘나의 칼이 되어줘’(김진석 옮김, 웅진지식하우스)는 완전한 소통과 사랑에 대한 격렬한 갈망과 연민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서사시에 가깝다. 1부는 남자의 편지를, 2부는 여자의 일기를, 3부는 두 사람의 생각이 짧게 교차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평화를 외쳐 온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 그는 장편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 완전한 소통을 이루는 사랑에 대한 갈망을 그려냈다.
웅진지식하우스 제공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뿐 아니라 지난해에는 한강이 받았던 맨부커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군에 보낸 아들을 헤즈볼라의 미사일 공격으로 잃기도 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대결 국면에서 그는 일방적인 애국주의가 아닌 평화의 편에 서는 ‘외줄 타는’ 작가로 명성이 높다.

국내에는 이번에 홀로코스트를 다룬 초기 대표작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와 함께 나란히 소개된 이 장편은 현대사의 상처보다는 인간 내면의 상처와 소통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격정적인 작품이다. 남자는 여자의 영혼의 뿌리에 접속하고 싶고 여자는 남자의 실체를 보고 싶어 한다.

“오직 글로만 나를 어루만져줘요. 내가 편지를 쓸 수 있게요. 난 우리가 현실의 신랄한 유혹을 조금 더 오래 물리칠 수 있기를 희망해요. 종교가 아니라 섹스야말로 대중의 아편이죠. 우리가 만난다면 결국, 우리도 항복하게 될 테니까요.”

“당신의 문장, 그 문장의 조각들이 마치 오랜 기차 여행을 마치고 난 뒤의 여음처럼 머릿속에서 윙윙거려요. 외워서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 정도로요. …그저 단순히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어쨌든 실제로 만나서요. 당신을 만져보고, 당신의 땀 냄새를 들이마시고, 당신의 모든 행동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만나지 않고 단지 편지로만 교류하자는 남자의 원칙에 비해 여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열망을 강렬하게 내비치지만 남자는 끝내 거부한다. 여자는 말한다. “내 눈에는 남자가 아닌 남자가 보여요. 소년이 아닌 소년이요. 내가 보는 남자의 성숙함과 남성다움은 소년의 상처를 덮은 굳어진 딱지에 불과해요.” 이들은 결국 3부에 내리는 빗속에서 마지막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2017년 맨부커인터내셔널 상을 수상한 다비드 그로스만(오른쪽).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소통하는 건 어디까지 가능한 일일까. 다비드 그로스만은 남녀의 결합을 넘어서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강렬한 바람을 담아 편지글을 이어간다.

이 소설의 미덕은 극적인 서사보다는 깊은 사랑과 치유를 갈망하는 솔직하고 흥미로운 문장들에 있다.

편지 바깥에서 만나기를 갈망하는 여자는 ‘에덴동산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우리가 함께 있을 만한 장소가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서 ‘그 속에서 당신은 당신이자 당신의 모든 것일 수 있다’고 호소한다. ‘현실에는 발끝 하나 대어도 안 된다’고, 그리하면 ‘모든 게 케케묵은 진부함 속에 녹아버리고 증발해버릴 것’이라고 믿는 남자의 편지는 뜨겁고 쓸쓸하다.

“직장에서든 길에서든 누군가가 나를 화나게 할 때, 주로 당신을 떠올렸어요. 소리 없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화가 즉시 가라앉았으니까요. 이렇게 내 영혼을 누군가의 손에 건네주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난 당신에게 괴물 그림 조각을 주었죠. 그러자 당신은 사람을 만들어냈어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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