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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 머금고… 샛노오란 꽃비 내리다

입력 : 2018-03-22 10:00:00 수정 : 2018-03-21 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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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터진 구례 산수유 마을
전남 구례 현천마을 전망대에서는 마을 곳곳에 핀 산수유꽃과 지붕들이 어우러져 마음속에 그리던 한적한 시골마을 풍광을 볼 수 있다.
고개를 돌려 집을 돌아본다. 집부터 장독, 마당의 돌멩이까지 사소한 것 하나도 잊지 않겠다며 찬찬히 훑어본다. 집을 둘러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도 추억이 서려 있다. 눈에 담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것이다. 시야가 뿌예지며 흐릿해진다. 그래도 하나라도 놓친 기억이 있을까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마지막으로 ‘엄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엄니’ 걱정이 마음속 한가득이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그나마 입에 풀칠할 수 있게 해주는 산수유 열매가 익는 때다. 한창 일을 해야 하는 때다. 입술만큼 붉은 산수유 열매 하나하나를 입으로 까서 씨를 뺀 후 이를 말려야 한다. 열매를 수확할 때면 모두 입이 퉁퉁 부었다. 힘들었지만 ‘엄니’와 함께 오손도손 얘기를 나누며 웃으며 일하던 그때가 가장 그리울 테다. 이리 떠나면 ‘엄니’가 그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이 기억도 마지막이다. 왜 끌려가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대를 잇기 위해 마지막 남은 오빠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꽃다운 19살 나이의 처녀는 그렇게 마지막 길을 떠났다.

70년 전 얘기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의 여파는 전남 구례까지 영향을 미쳤다. 밤과 낮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지리산 자락 구례 산동마을은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했다. 결국 피해는 아무 힘도 없는 민간인들이 받았다. 이 마을에 살던 백순례라는 오남매 집안의 막내딸은 좌익 혐의로 총살을 당하게 될 셋째 오빠를 대신해 죽으러 처형장으로 향했다. 백순례는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노래 한 편을 남겼는데 ‘산동애가’란 이름으로 전해온다.
산동면 마을엔 산수유가 없는 곳이 없다. 노란 봄 소식을 전해온 산수유꽃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을을 따라 걷는 것이다. 꽃놀이에 정답은 없다. 마음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즐기면 그게 최고다.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 갈 길마다 눈물 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백순례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 당시 그곳에 살았단 이유만으로 선량한 주민들이 이렇다 할 잘못도 없이 눈을 감았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고, 누구에게 제대로 원망조차 하지 못한 그들의 삶을 위로하려는 듯 구례 산동마을은 이맘때 어떤 색보다 눈에 띄는 노란빛으로 뒤덮인다. 푸른 신록이 들기 앞서 무채색에 가깝던 산자락은 산수유꽃이 만발하면서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다. 산동마을에 유독 산수유가 많은 것 역시 우리의 아픈 상흔과 연관 깊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 산골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졌다. 먹고살기 힘들어 초근목피를 구하려 돌아다녔을 시절에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서 산수유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동면 마을엔 산수유가 없는 곳이 없다. 노란 봄 소식을 전해온 산수유꽃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을을 따라 걷는 것이다. 꽃놀이에 정답은 없다. 마음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즐기면 그게 최고다.
◆아픈 기억 머금은 채 빛나는 산수유

지금은 아픈 기억을 묻은 채 산수유는 화창한 봄 풍경을 대표하고 있다. 구례 산동면 일대 마을엔 산수유가 없는 곳이 없다. 전국 산수유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니 이 마을에서 흔하디흔한 것이 산수유다. 이맘때 노란빛은 11월이면 열매를 맺어 붉은빛으로 변할 것이다.

노란 봄 소식을 전해온 산수유꽃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을을 따라 걷는 것이다. 산수유문화관을 중심으로 반곡, 하위, 상위 마을이 가장 대표적이다.

산수유문화관에서 600m가량 떨어진 곳이 반곡마을이다.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서시천을 기준으로 건너편을 대음마을, 반대편을 반곡마을이라 했는데, 지금은 반곡마을로 통칭한다. 서시천과 반석, 노란 산수유꽃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산수유 마을이다. 하천 주변으로 이어진 데크를 따라 노란 산수유꽃 아래를 걸어도 좋고, 계곡 반석 위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즐기며 주위를 노랗게 물들인 꽃대궐을 감상해도 좋다. 꽃놀이에 정답은 없다. 마음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즐기면 그게 답이다. 대음마을 부근에서 하천 건너편으로 보면 우뚝 솟은 지리산 봉우리가 보인다. 이맘때 정상 부근은 아직 눈이 쌓여 있을 수 있다. 봄을 즐기며 겨울 경치를 품을 수 있는 색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전남 구례 상위마을은 계곡과 산수유꽃이 어우러져 세상과 거리를 둔 깊은 산속 풍광을 보여준다.
반곡마을 입구에서 하위마을을 지나면 지리산 만복대 아래 자리잡은 상위마을에 이른다. 산수유 마을에서 가장 높고 깊은 곳에 들어앉은 마을이다. 상위교를 지나자마자 계곡을 따라 오르거나 마을로 진입하면 산수유나무 군락과 이끼 낀 돌담, 시골집이 한데 어우러져 서정적인 멋이 그윽하다. 특히 계곡과 산수유가 어우러진 풍광은 산수유 마을 중 가장 빼어나다. 마을 옆을 흐르는 계곡이지만, 조금만 걸어들어오면 세상과 거리를 둔 깊은 산속 풍광을 보여준다. 상위마을에서 이어진 도로를 따라 가면 평촌마을로 연결된다. 산수유나무 사이로 전각과 장독대가 인상적인 원좌마을, ‘산동애가’의 아픔이 남아 있는 상관마을 등이 주위에 있다.
계척마을의 산수유 시목(始木).
좀 더 한적하게 산수유꽃을 즐기고 싶다면 현천마을이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곳곳에 핀 산수유꽃과 지붕들이 어우러져 마음속에 그리던 한적한 시골마을 풍광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현천마을의 저수지에 비치는 산수유꽃도 유명하지만 올해는 그 풍경을 볼 수 없다. 공사로 저수지 물을 뺐기 때문이다. 현천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산수유 시목(始木)이 있는 계척마을이다. 약 1000년 전 중국 산동(山東) 지방 처녀가 구례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산수유가 퍼져 지금의 산수유 군락이 됐다는 얘기가 있다. 그때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1000년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산수유나무보다는 굵기나 풍채가 월등히 커 보이긴 하다.

◆고즈넉한 화엄사와 비밀의 정원 쌍산재

산수유꽃의 화려함으로 들떠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화엄사만 한 곳이 없다. 유명 고찰답게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한 후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중수됐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때 전소한 후 다시 지어진 것이다. 6·25전쟁 때도 한 줌 잿더미로 내려앉을 운명이었지만 당시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의 기지로 다행히 피해를 작게 입었다. 차일혁 총경은 부하들에게 각황전과 대웅전 문짝을 뜯어와 불을 지르게 했다. 상부 명령을 이행하면서 화엄사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화엄사 사천왕상을 지나면 보제루가 시야를 가린다. 방문객이 오른쪽 계단으로 오르면 대웅전을 먼저 본 후 왼편의 거대한 목조건물 각황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왼쪽 계단으로 오르면 각황전이 먼저 눈에 들어와 아무래도 감동이 덜하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상을 지나면 다른 사찰은 바로 대웅전 등 전각이 보이지만, 화엄사는 좀 다르다. 사천왕상을 지난 후엔 긴 보제루가 떡하니 시야를 가린다. 방문객은 오른쪽이나 왼쪽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땐 오른쪽 계단을 택해야 한다. 오른쪽 계단에 올라서는 순간 대웅전을 먼저 보고, 왼편의 거대한 목조건물 각황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불교 목조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다. 방문객의 탄성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왼쪽 계단으로 오르면 각황전이 먼저 눈에 들어와 아무래도 감동이 덜하다. 보제루에 들어가서 바라보는 풍경도 일품이다. 대웅전과 반대편 일주문 풍경이 화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전남 구례 화엄사 보제루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일품이다. 대웅전과 반대편 일주문이 화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대웅전 옆으로 난 길로 대나무숲을 지나 구층암까지 가서 차 한잔을 즐기는 것도 좋다. 절간 뒤편 가운데 기둥 두 개가 모과나무다. 다듬어지지 않고 뒤틀린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살아있는 나무에 절집을 올린 듯싶다. 이 공간을 찾는 이는 누구나 녹차를 마실 수 있다. 심신의 피로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층암에선 차 한잔을 즐길 수 있다. 심신의 피로가 자신도 모르게 사라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구층암의 모과나무 몸체는 다듬어지지 않고 뒤틀린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구례에서 놓치면 아쉬운 곳 중 하나가 쌍산재다. 잠을 잘 수 있는 한옥 고택인데, 정원으로 얘기하는 게 더 어울릴 듯하다. 상사마을에 있는 쌍산재는 살림채, 동·별채·서당채 등 부속 건물, 대나무숲, 잔디밭까지 있는 가옥이다. 주인장의 고조부가 지은 집으로, 집 앞엔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당몰샘이 있다. 이 마을이 장수마을이 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샘물일 것으로 추정한다.
쌍산재의 대나무숲.

 
구례 쌍산재 앞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물인 당몰샘.
하늘을 찌를 듯한 솟을대문 등은 없다. 소박한 입구를 지나면 마당과 올망졸망한 안채 건물이 눈에 띈다. 쌍산재의 매력은 건물 뒤편 대나무숲을 지나면서부터다. 대나무숲길에 있는 호서정 마루를 지나면 동백나무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어두운 동백 터널을 지나면 뻥 뚫린 비밀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드넓은 잔디밭에 매화, 산수유꽃 등이 한창이다. 이곳에서 봄꽃 구경은 다할 수 있을 정도다.
 
쌍산재 서락정에 들어서기 위해 문을 열면 묘한 형태의 나무들이 뒤엉킨 채 입구를 지키고 있다.
서당인 서락정 역시 예사롭지 않다. 작은 문을 열면 묘한 형태의 나무들이 뒤엉킨 채 입구를 지키고 있다. 마지막 숨은 풍경은 서당 반대편에 있는 문이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열리면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 넓지 않아 보이는 정원 곳곳에 오밀조밀하게 풍광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흔한 고택으로 생각하고 찾는 것이 좋을 듯싶다. 기대가 작아야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구례에선 바로 잡은 닭으로 요리한 육회를 맛볼 수 있다.
쌍산재 잔디밭에는 매화, 산수유꽃 등이 한창이다. 이곳에서 봄꽃 구경은 다할 수 있을 정도다.
구례=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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